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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중국의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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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부활하는 중국의 좌파 [먼슬리 리뷰] 중국 노동계급의 상황 (2)
중국에서 전개된 사회주의 투쟁 과정에서 깊이 있는 경험을 했고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중국의 농민, 이주노동자, 도시 노동계급 속에 존재한다는 점이 높은 수준의 단합이 실현될 가능성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유산은 오늘날 중국에서 좌파가 부활하는 데 기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예전에 정저우에서 홍위병으로 활동했던 한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혁명의 사회주의와 현실의 자본주의를 명확하게 구분해 전개하는 투쟁인 '두 가지 노선의 투쟁'에 대한 이해에 기반을 둔 행동은 이제 지식인들보다는 노동계급으로부터 주로 나오고 있다. 그것은 특히 반부패 운동의 형태를 띤다. 반부패 행동은 금전적 불법행위나 뇌물수수에 대해 반대하는 것도 물론 포함하지만 이런 좁은 의미에만 그치지는 않는다. 그것은 국가와 당의 관료, 관리자, 기업가의 동맹이 생산수단을 신흥 자본가의 사적 재산으로 완전히 전환시킴으로써 혁명의 시대에 노동자와 농민들이 성취한 사회주의의 이득을 역전시키지 못하도록 막는, 더 폭넓은 시도로서의 반부패 운동이다.
  
  혁명의 이론, 정신, 실천은 활동가들의 노력에 의해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이런 현상은 정저우를 포함해 192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 지역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정저우 시 중심가에는 1971년에 세워진 쌍둥이 불탑 형태의 기념탑이 있다. 이 기념탑은 1923년에 베이징과 한커우 간 철도의 노동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지도 아래 벌인 총파업이 이 지역 군벌에 의해 야만적으로 진압되는 과정에서 살해된 100여 명의 노동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마오 시대의 유산이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의식 수준도 매우 높으며, 이런 점들이 두 가지 노선의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이 도시의 노동자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부각된 것은 그들이 일해 온 공장에서 스스로 갖게 된 권리의식이었다. 국유기업에서 노동자들이 갖는 사회적 소유 및 참여의 권리에 어떤 한계가 있든 간에, 그리고 그러한 권리는 덩샤오핑 식의 개혁정책이 초래하는 권리몰수에 대처할 수 있게 해주는 안전장치로서는 미흡함이 이미 확인되긴 했지만,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일해 온 공장에 대해 어떤 근본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것'이라는 강한 의식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누군가가 설명해주었듯이 전송장비 공장은 '노동자들의 땀으로' 지어졌으며, 노동자들은 그 공장이 자본가들에 의해 탈취되고 사유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 공장은 국가 전체의 것이며, 노동계급 모두가 집단적으로 이룬 경제적 축적의 일부라는 것이다.
  
  마오가 지도자로 있던 시절에는 노동자들도 공장에 대해 어느 정도의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고, 제시한 의견은 경청됐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문화혁명의 시기에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 당시에는 그들 자신이 지도자였다. 노동계급은 스스로를 대표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노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아무런 권한도 갖고 있지 못하다. 한 평생의 노동으로 쌓아올린 집단적 재산을 사실상 도둑맞고 과거에 누렸던 참여권을 박탈당한 결과로 노동자들이 갖게 된 권리상실감의 표출이 이어지고 있다.
  
  정저우의 한 노동자는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런 이해를 보다 이론적인 맥락 속에 위치시켰다. 그는 '관료적 자본'의 현 체제가 지닌 문제는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라고 했다. 이런 분석은 마치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논문에서 곧바로 도출된 것 같아 보인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갈등"이며 주로 정치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노동자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중국은 사회주의를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미국과 다르다. 나이든 노동자들은 역사적인 맥락을 이해한다. 그들 대부분이 마오의 시대와 문화혁명을 거쳤다. 그들은 마오쩌둥 사상을 경험했고, 그들의 세대는 중국을 '마오의 길'로 복귀시킬 수 있기를 원한다. 그 길은 사회주의의 경로를 보호하기 위한 국제적 투쟁의 일부다."
  
  이 노동자는 중국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해, 그리고 사회주의의 길로 복귀하는 것이 그들에게 왜 중요한지에 대해 서방에서 더 깊이 이해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것은 기나긴 투쟁이다. 그는 중국의 노동자들이 서서히 사회주의의 길로 돌아가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럴 경우 노동자들이 결국은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운동이 곧 보다 높은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젊은 층 노동자들은 그것을 단지 '더 나은 생활여건'을 위한 경제적인 투쟁으로만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젊은 층 노동자들의 분위기는 반사회주의 개혁의 시기가 남긴 유산이며, "부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말을 포함한 덩샤오핑 어록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바로 그런 것들이 젊은 층 노동자들의 사고력을 파괴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서로 만나 이런 것들을 토론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 노동자가 드러낸 느낌과 같은 종류의 느낌을 드러내는 나이든 노동자들의 발언을 여러 번 들었다.
  
  여전히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이 혁명의 유산을 계속 살려가고 그것을 새로운 세대에 이전하기 위해 자기들의 의식과 경험을 전수하는 다른 방법들, 다시 말해 단지 정치경제적인 형태만이 아닌 문화적인 형태의 방법들을 찾고자 하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찾아갔던 정저우 시내의 노동계급 거주지역 한가운데 있는 공원의 한 모퉁이에서는 매일 밤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 옛 혁명가요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 가본 주말 저녁에는 늙은 은퇴자들로부터 10대 후반,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100여 명이 모였다. 그들은 역동적인 몸놀림을 하는 지휘자가 이끄는 음악가들의 연주에 맞춰 아주 활기찬 노래들을 불렀다. 다른 주말에는 그곳에 "몇 배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며, 어떤 때는 1천여 명이 모이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를 그 공원으로 데려가준 노동자들 가운데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것의 정치적 의미는 공산당, 즉 변질된 지금의 공산당에 대한 우리의 반대를 보여주고, 마오를 이용해 그런 공산당에 대항하며 우리의 의식을 높이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역사적 정신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실천적 투쟁에도 스며들어 있다. 이 지역에서 사유화에 대한 저항의 '모델'로 남아있는 2000년의 종이 공장 파업 당시에 노동자들은 관리자들을 몰아내고, 공장을 접수하고, 장비의 반출을 막고, 노동자들에 의한 관리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문화혁명'의 방식을 이용했다고 한 활동가는 말했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친 뒤에도 이 공장의 일부는 여전히 노동자들의 수중에 남아있다. 하지만 그들은 시장경제 속에서 살아남고 공장을 경제적으로 훼손하려는 관리들의 기도를 극복하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들의 투옥된 지도자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이 공장 노동자들이 이런 형태의 투쟁방법을 선택한 것은 "파리코뮌의 원칙은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기장비 공장에서 전개된 투쟁에서도 이와 비슷한 좌파의 역사적 관점이 보인다. 이 공장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은 생산하며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슬로건도 내걸었지만, "마오쩌둥 사상을 지속적으로 받들자"라고 쓰인 깃발도 내걸렸다. 노동자들은 이보다 훨씬 더 명시적으로 정치적인 형태의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노동자들이 종이 공장을 접수한 바로 그 해에 마오의 사망일(9월 9일-옮긴이)을 기념하는 행사가 시작됐다. 2001년에 열린 이 행사에는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고, 1만여 명의 경찰이 그들을 에워쌌으며, 대규모 파업과 충돌이 벌어졌다. 마오가 태어난 날이나 사망한 날에는 이 도시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마오의 동상이 있는 작은 광장은 노동자들의 출입이 금지된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이 광장으로 가서 경찰과 대치한다. 바로 이곳에서 2004년 9월 9일에 노동자 활동가인 장정야오가 공산당과 정부가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저버리고 광범위한 부패에 가담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내용의 전단을 뿌렸다. 이 전단에는 중국이 자본주의로 치닫는 것을 비난하고 마오가 나아갔던 '사회주의의 길'로 돌아가자고 호소하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이 전단을 작성한 장정야오와 장루취엔은 집에 급습해온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이들의 일은 중국에서 곧 유명한 사건이 됐고, 2004년 12월에 이 두 사람에 대한 비공개 재판이 열렸을 때 중국 전역에서 많은 좌파 사람들이 정저우를 찾아와 법정 밖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두 사람은 재판에서 각각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두 사람 외에 전단의 작성과 인쇄를 도왔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괴롭힘을 당한 게리잉 및 왕장칭 등 모두 4명의 노동자 활동가들은 그 후 '정저우 4인'으로 알려지게 된다.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 총리에게 이들의 석방을 호소하는 내용의 탄원서가 전달됐다. 이 탄원서에는 200명 이상이 서명했으며, 그 가운데 절반 정도는 중국 국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는 특히 서명한 사람들이 직면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을 고려할 때 좌파 노동자들에 대한 전례 없는 지지의 표출이었고, 중국 내 지식인 및 활동가들과 해외에 있는 그들의 국제적 동료들을 단결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 탄원서에 대해 중국 정부가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장루취엔은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가 석방된 표면적 이유는 건강상의 문제였으나, 일부 활동가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탄원서와 더불어 정저우 4인 사건에 관한 많은 정보와 분석을 좌파 웹사이트에 게시하는 등의 연대활동이 불러일으킨 압력이 작용한 결과로 그가 석방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정저우 4인 사건은 중국의 노동자들이 당과 국가가 부과하는 새로운 여건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일반 노동자들 사이에 좌파의 이념과 행동주의가 끈질기게 유지되고 있으며, 중국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이들에 대한 지지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중국 좌파가 새로이 힘을 얻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중국 좌파의 분열도 드러내준다. 정저우 4인에 관한 탄원서 서명 운동은 주로 젊은 층 좌파가 인터넷을 통해 탄원서 내용을 회람시키는 등의 방식으로 주도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이들 젊은 층 좌파는 좌파 선배나 스승들 가운데 적어도 처음에는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던 이들을 비판했다. 이들 젊은 세대에게는 정확하게 올바른 노선을 취하는 것보다는 공개적으로 좌파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나이든 세대의 좌파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념과 정책에 관한 과거의 분열과 갈등이 공동의 행동을 향한 단합을 가로막곤 했다. 이들의 경우에는 현재의 새로운 여건들에 맞서기 위해 역사적인 갈등을 제쳐놓는다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어려웠다.
  
  이와 같은 태도의 차이는 중국의 좌파에는 세 개의 주요 그룹이 있다는, 널리 인정되는 분석과 상응한다. 여기서 세 개의 주요 그룹이란 ① 주로 당과 국가의 조직 속에서 경력을 쌓아오면서 많은 경우 처음에는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받아들였으나 그 뒤 개혁정책이 지닌 자본주의적 성격이 점점 더 분명해지자 그에 대한 반대로 입장을 바꾼 '옛 좌파' ② 마오의 지도 아래 중국 사회주의의 혁명적 시대에 추진된 정강정책을 꾸준히 지지해왔고, 주로 노동자와 농민들에 대중적 기반을 두는 '마오주의자' ③ 1960년대 서구의 신좌파와 비슷하게 주로 대학과 새로 생겨난 비정부기구(NGO)들에 활동중심을 두면서 넓은 범위의 마르크스주의는 물론이고 더 넓게는 사회학적이고 사회민주주의적인 경향에도 문호를 개방하고 있지만, 흔히 옛 좌파보다는 마오의 지지자들과 보조를 같이 하기를 더 좋아하는 '새 좌파'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세 그룹 사이의 구분선은 고정적이지도 상호 배타적이지도 않다. 옛 좌파는 정부의 안과 밖에 걸쳐 사회 전반에서 발견되지만, 마오주의자들 중 다수와 새 좌파 중 일부는 당과 국가의 내부에도 존재한다. 서구의 좌파 분류범주 가운데 비슷한 것이 있다고 해서 그것과 중국의 좌파 분류범주를 과도하게 빗대어서는 안 되며, 특히 '새 좌파'의 경우가 그러하다. 왜냐하면 위와 같이 세 가지로 분류된 중국의 좌파 그룹은 각각 중국에서의 투쟁역사를 반영하는 고유의 중국적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최고위 지도자들이 모여 국가전략을 논의하는 장소인 해변도시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2001년에 극히 보기 드문 회의가 열렸다. 네 가지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의 그룹들이 한데 모인 이 회의는 정저우 시의 홍위병 지도자였고, 개혁정책이 시작된 뒤 여러 해 동안 투옥돼 있다가 풀려난 한 활동가가 조직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 모인 사람들은 개혁정책 전부에 대해 반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서로 간의 의견 차이를 인정하기로 했지만, 덩샤오핑이 추진한 자본주의의 복원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나갔다고 한 목소리로 비판했다.
  
  보다 최근에는 몇몇 유명한 연구소, 대학, 정부기관의 고위급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중국의 현재 상황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하기 위한 포럼이 열렸다. 이 포럼의 개막사는 베이징대학 총장이 했고, 참석자들은 이 포럼이 일회성 행사가 아닌 정기적인 모임이 되기를 바랐다. 고참 당원으로서 이 회의를 배후에서 조직하는 일을 맡아 한 사람은 적어도 고위급의 누군가가 지원하지 않았다면 이같은 회의는 열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저우에서는 이와 유사한 포럼이 지난 10여 년간 계속 열려왔다.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오늘날 중국에서 '자유주의자'로 불리는 사람들 중에는 서구의 자유주의자보다 더 급진적인 사람도 흔히 포함된다)이 이끄는 정저우의 이 포럼에는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폭넓게 참여한다. 이 회의 참여자들의 공통분모는 중국사회와 정부정책이 지금 나아가는 방향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배경과 접근방법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옛 좌파, 마오주의자, 새 좌파 등 세 가지 좌파의 범주 모두에 대체로 포함될 수 있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이들은 당과 국가의 기간조직 및 관련기관의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이들의 사상도 그렇지만 이들이 여는 다양한 포럼과 회의들도 서로 겹치고 상호침투하면서 영향을 주고받고 있으며, 이념을 공유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끌어당기고 있다. 새로 생겨난 비정부기구들에는 강력한 좌파적 성향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빈궁한 농촌 마을에 학교를 지어주는 일이나 사회가 보다 더 노동자와 농민에 의해 운영되도록 하는 일 등을 한다. 이와 같은 좌파의 부활은 노동계급의 대중적 투쟁력이 강화됨에 따라 중국이 사회적 위기에 대한 대응을 더 이상 회피할 수 없게 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중국의 사회적 위기는 점점 더 위협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도 좌파의 부활을 뒷받침하고 있다. 중국에서 이렇게 좌파가 부활하는 것이 마오 시대의 혁명적 사회주의를 오늘 당장 되살려낼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그럴 가능성 자체는 만들어내고 있다.
  
  좌파가 이런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여준 두드러진 사례 중 하나로, 2004년 10월 한 무리의 '원로당원, 기간당원, 군부인사, 지식인'들이 후진타오 국가주석에게 보낸 편지를 들 수 있다. "현재의 정치지형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의견"이라는 제목의 이 편지는 정저우 4인의 전단에 비해 그 어조가 겸손했고, 개혁정책이 이룬 경제적 성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다루어진 주제는 매우 비슷했고, 교정조치를 취해 "자본주의의 길"에서 벗어나 사회주의의 길로 돌아가기를 요구하면서 현재의 상황에 대해 비판을 가한 점에서는 정저우 4인의 전단과 같은 정도로 투쟁적이었다.
  
  이 두 개의 문건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어쨌든 중국 내 좌파는 정저우 4인을 지지하는 서명을 받는 작업을 계속했고, 새 좌파 중 일부는 정저우 4인이 내건 대의명분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이들을 비롯한 마오주의자 활동가들을 옹호해주었다. 그리고 이런 새 좌파의 행동은 옛 좌파들로 하여금 후 주석 앞으로 보낸 편지에 쓴 내용과 같은, 그들이 오래 전부터 품어온 비판을 공개적으로 제기할 수 있도록 운신공간을 넓혀주었다. 초기 혁명투쟁에 참여했던 원로당원들이 당과 국가의 현 정책에 대해 이처럼 기꺼이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은 새로이 형성되고 있는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1999년에만 해도 나이든 세대의 중국 내 좌파와 토론을 하다보면 개혁정책의 분위기 속에서 그들이 얼마나 스스로를 억제해야 한다고 느끼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예전의 지도자들은 물론 그들과 비슷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자기 의견을 보다 공개적으로 말하기가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에 따라 이제는 과거가 현재에 정보를 주고, 좌파 중 어느 한 부분의 행동이 다른 부분들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단지 이론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런 상황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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