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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좌파의 새로운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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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중국 좌파의 새로운 모색 [먼슬리 리뷰] 중국 노동계급의 상황 (3)
마오 시대의 사회주의적 조직형태들은 그동안 시장경제의 새로운 여건에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정되긴 했으나, 그렇게 수정된 형태로나마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사례들이 있다. 이런 사례들은 그 수가 적지만 영향력은 아주 클 수 있다.
  
  예컨대 현재 중국의 전체 농촌마을 가운데 대략 1%는 인민공사 시절의 집단화된 형태를 완전히 포기한 적이 전혀 없다. 이런 농촌마을이 구체적으로 몇 개나 되는가는 누가 셈하느냐와 어떤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수천 개는 될 것으로 보인다. 덩의 개혁정책을 받아들여 실행했던 농촌마을 가운데 일부는 다시 집단화된 생산 체제로 돌아갔고, 그렇게 함으로써 농촌경제의 대안을 탐색하는 다른 마을들에 모델이 되고 있다.
  
  마오주의 마을 '난제춘'의 사례
  
  사회주의 시대의 목표와 방법들을 유지하고 있는 농촌마을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례는 허난 성의 정저우에서 차로 1시간가량 가야 하는 곳에 있는 '마오주의' 마을인 난제춘(南街村)이다. 이 마을은 15~20년 전에 재집단화에 착수했으며, 그 뒤로는 모든 주민들을 위한 일종의 코뮌(인민공사)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마을은 기본적으로 모든 주민들에게 주거, 보건, 교육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젊은이들에게는 대학 학비도 지급하고 있다. 이 마을은 숙련노동자들이 받는 임금보다 더 많은 보수를 관리들에게 지급하지 않는 등 사회주의 시절의 평등주의적 관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또한 이 마을은 여전히 마오의 정치적 목표들을 실현하는 데 전념하고 있으며, 마오의 사진과 마오가 한 말이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을 비롯한 다른 혁명 지도자들의 사진이나 그림과 함께 마을 전체에 눈에 띄게 내걸려 있다. 이 마을의 각 가정은 밝고 통풍이 잘 되는 아파트 한 채씩을 제공받으며, 이런 아파트를 포함한 다층 주택단지들이 깨끗하게 정돈된 가로수길, 산책로, 정원들에 에워싸여 있다. 이 마을에는 근사하게 지어진 학교와 아동보육시설도 있다. 이런 마을 모습은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도시의 신흥 주거지역을 제외하고는 중국에서 사실상 이곳에서만 볼 수 있으며, 이 마을과 인접한 외곽 지역의 보다 전형적인 중국 농촌의 환경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난제춘의 실천은 많은 모순을 안고 있다. 예를 들어 이 마을은 재정의 많은 부분을 외국인투자에 의존하고 있고, 이제는 자본주의 경제에 완전히 통합된 향진기업(鄕鎭企業,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에 따라 결성된 농촌 소기업-옮긴이)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주로 외곽 주변지역의 농민들로 충원하며, 이렇게 고용된 농민들은 살 만은 하지만 확실히 덜 편안한 합숙소에서 거주하고 있다. 우리가 난제춘을 방문할 때 동행해준 두 사람을 포함한 정저우의 활동가들에 따르면 최근 난제춘은 심각한 재정상의 어려움에 봉착해 있으며, 그 주된 이유는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영역으로 생산을 확장한 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한계는 난제춘이 자본주의의 바다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생존을 위해 시장경제 속에서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는 점에서 불가피하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난제춘은 중국 농촌을 위한 대안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여전히 믿는 사람들에게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난제춘이 어떻게 집단화된 생산과 분배를 계속 실천할 수 있었는가를 연구할 목적으로 중국 각지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매일같이 이곳에 찾아오고 있다. 농민이나 노동자들을 가득 채운 버스도 종종 이곳에 온다. 허난 성 당국도 난제춘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로 보호해주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좌파 당 원로들도 2004년에 후진타오에게 보낸 공개편지에서 난제춘을 가리켜 오늘날 농촌지역에서 추구할 수 있는 하나의 모델이라고 했다. 그러나 난제춘과 달리 마오 시대의 유산이 그렇게 뚜렷하게 남아 있지 않은 곳에서도 마오 시대의 경험과 개념들이 부단히 현재의 상황을 대조하고 분석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2004년 여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변화의 흐름은 농가단위 책임제 방식의 영농이 글로벌 시장에 직면해 겪고 있는 고립과 불안정성을 완화해보려는 노력의 하나로 농업 합작사(合作社, 협동조합)을 지향하는 새로운 운동이었다. 농업 합작사는 예를 들어 비료를 집단적으로 구매하고 수확한 농작물의 판매가격을 협상할 때 보다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는 것을 통해 시장에서 어느 정도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는 것과 구성원들에게 금융지원과 안전망을 제공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비록 모든 농민이 처한 지금의 상황이 지닌 절박한 측면들을 모두 해소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빠져 죽지 않으려면 계속 헤엄쳐라'라는 식이었던 개혁시기의 개인주의 정책으로부터의 의미 있는 이탈임은 분명하다. 또한 이런 노력은 비록 인민공사 체제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기껏해야 '반(半) 재집단화' 정도의 성격을 지닌 것이긴 하지만, 혁명 이전의 초기 합작사 운동의 경험뿐 아니라 농민들이 익숙하게 잘 아는 마오 시대의 개념들을 계속 참고하며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지린 성 동북부 지역의 쓰핑(四平) 근처에 있는 한 합작사를 방문했을 때 만난 합작사 대표나 그 합작사에 소속된 젊은이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특이할 게 없다. 그 합작사의 대표는 농촌과 도시의 여러 계급들과 오늘날 그들이 각각 처해 있는 환경에 대해 매우 자세한 비교분석을 해주었고, 젊은 합작사 소속원은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나라가 처한 상황을 국내적으로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도 관련시켜가며 깊이 있게 설명했다. 중국의 노동계급은 노동과 착취의 실제 세계에 관해 도시의 지식인들에게 가르쳐줄 것을 많이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실천하는 데도 보다 능숙하다. 또한 노동계급은 교육을 더 많이 받은 젊은 좌파 지식인보다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의 기본을 이해하고 응용하는 능력이 오히려 더 잘 개발돼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신중산계급의 형성과 변화
  
  사회의 급속한 양극화는 신중산계급을 그들의 구체적인 직업이나 지위와 관계없이 노동자와 농민이 직면해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이런 변화는 신중산계급과 노동자, 농민이 하나로 단합할 토대를 구축해주는 동시에 좌파가 부활할 대중적 근거가 형성되도록 돕는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소외집단들이 점점 더 폭넓게 생겨난다. 오늘날에는 국유기업에서 일하던 공산당 기간당원들조차도 자기가 소속된 국유기업을 사적 투자자들에게 매각하는 작업을 거들고 나서는 그 기업에서 내쫓기고 있다. 국유기업을 사들여 새로 소유주가 된 자본가들은 그들을 기업 안에 그대로 놔두지 않고 쫓아낸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한 노동자는 "방금 건넌 다리를 불태우는 격"이라고 표현했다. 기업에서 쫓겨난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실업자가 되고서야 비로소 "시장경제로의 이행"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그들의 의식이 고양된다"는 것이다.
  
  자기 삶의 여건 변화로부터 사회에 대해 이처럼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된 사람들은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우리가 베이징에서 대화를 나눈 한 진보적 학자처럼 처음에는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을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마오쩌둥으로 되돌아가고 있으며, 더 나아가 문화혁명까지 재검토하고 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여러 차례 들었다. 그 중 일부는 "대중으로부터 배워서" 그렇게 됐다고 했다. 예전에는 농촌 지역의 아주 보수적인 학생이었던 한 유명한 사람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그가 "전향"하게 된 것은 농민들을 만났을 때 마오에 대한 비판은 한 마디도 듣지 못한 반면 덩에 대한 비판은 많이 듣게 된 것이 그로 하여금 과거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재검토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재평가는 일부 사람들의 개인적인 경험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개혁의 시대가 시작된 뒤에 '중국적 특징을 가진, 시장경제로의 이행과 사유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와 당의 선전가들이 개진한 논리에서부터 학계와 비정부기구들에서 주로 발견되는 서구의 자유주의적 개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념적 경향들이 생겨나면서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엘리트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그동안의 이런 다양한 이념적 경향들은 오늘날 중국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상황들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점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한 홍위병 출신자와 한 젊은 지식인 활동가는 각각 우리와 가진 별도의 대화에서 똑같이 "다른 모든 것을 시도해보았으니", 애초에는 개혁정책을 선호했지만 이제는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을 이해해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현재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두 가지 노선의 투쟁과 문화혁명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방법들을 다 시도해보았지만 그 어떤 방법도 현재의 문제에 대한 설명을 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중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은 구체적이었고 그래서 비교적 쉽게, 예를 들어 '반부패 운동' 같은 것을 통해 교정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오늘날에는 중국 사회의 문제들이 체제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 쉽게 다루기 어렵다는 인식이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이제는 중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근본적인 변혁이 요구되지만, 자본주의와 글로벌 시장은 그런 변혁을 이루어낼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며 국가와 당도 지금과 같은 상태로는 그런 변혁을 이루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그 결과 문화혁명의 시기에 자본주의적 길에 대해 마오가 전개한 비판이 오늘날의 현실에 들어맞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왜냐하면 마오가 그의 말년에 전개한 비판에 들어있는 사상은 현재의 체제에 대해 그 점증하는 모순들의 뿌리를 건드리는 철저한 분석을 계속해서 제공해주며, 그런 모순들을 단지 경감시키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보다 깊은 해법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동안 온존돼온 많은 금기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문화혁명은 대부분의 학자들과 엘리트 계층의 사람들에게 대체로 아직 혐오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문화혁명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조금이라도 내비친다면 그것은 동료들로부터 고립되고 경력을 망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우리는 들은 바 있다. 그러나 그런 문화혁명조차도 토론과 재검토의 주제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나름대로 역사 연구를 수행하면서 오랫동안 무시돼온 사료를 발굴하고, 문화혁명의 시기에 활동했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새로 발견된 사실들을 웹에 게시하고, 그밖의 다른 방법으로도 문화혁명 당시의 사건들에 대한 당의 공식 입장에 도전하고 있는 젊은 층 좌파 사이에 특히 이런 분위기가 뚜렷하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관계
  
  좌파가 부활하면서 '노동계급의 투쟁'과 연대의 폭을 넓혀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매우 의미 있는 징조가 여럿 발견된다. 1999년에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는 한 작은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베이징의 대학생들과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이들은 흔히 중국의 MIT로 불리는 칭화대학 학생들이었고, 이들이 참여하는 모임은 최근에 특히 일류대학들에서 생겨난 비슷한 모임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 나는 모임이 효과적이려면 대학 교정을 벗어나 노동계급과 연대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1989년의 톈안먼 학생운동은 초기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적어도 베이징에서는 노동자들이 나중에 대거 가담했다가 살인적인 폭력과 탄압을 집중적으로 받았고, 결국 그러한 폭력과 탄압으로 인해 운동이 종료됐으며, 학생들과 노동계급 사이의 골은 근본적으로 메워지지 못했다.
  
  중국 북동쪽 지역에 있는 창춘에서도 보다 작은 규모이긴 하나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 도시에 있는 자동차회사인 제일기차집단공사의 넓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대학 교정을 뛰쳐나온 학생들과 결합하기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학생들은 매우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런 뼈저린 경험은 학생들로 하여금 노동계급과 격리된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 재평가하도록 했다. 톈안먼 운동의 경우 결국에는 중국의 역사에서 흔히 벌어지곤 했던 대로, 베이징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가 출동하기를 꺼려하자 베이징 외곽의 농촌에서 동원된 농민군이 운동을 진압하는 데 투입됐다. 톈안먼 운동 당시의 경험이 준 교훈은 지금의 젊은 학생들 세대의 좌파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2004년 여름에 관찰된 변화는 매우 극적이었다. 오늘날 상당수의 학생 활동가들이 대학 교정을 떠나 노동계급과 접촉하고, 노동계급의 삶의 여건을 연구하고, 그들에게 법률적이거나 물질적으로 지원해준 뒤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어난 일들에 관한 소식을 갖고 교정으로 돌아가곤 한다.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이었고 지금도 정저우에서 핵심적인 좌파 조직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 사람은 학생과 노동자 사이의 관계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경위를 설명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이미 2000년부터 중국의 최고 고등교육기관인 베이징대학의 마르크스주의 연구모임 소속 학생들이 베이징 안에 있는 공장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칭화대학 학생단체 소속 학생들도 2001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공장들을 방문해왔다. 2004년에는 베이징에 있는 또 다른 대학의 학생 80명이 정저우를 찾아왔다. 국가당국은 이런 종류의 접촉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껴 저지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문화혁명 때는 나라의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열차를 공짜로 타게 해주는 등 여러 가지 격려조치를 취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정부는 그런 흐름을 차단하려고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학생 대표들에게 열차표를 판매하기를 거부하거나 그들이 정저우에서 하차하지 못하게 막기도 한다. 그러나 정부가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어도 정저우를 방문하는 학생들의 발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정저우에 도착한 학생들은 공장을 방문한다. 정저우의 투쟁이 초기단계였을 때는 일부 학생들이 공장 안에서 지내면서 공장폐쇄를 막는 데 도움을 주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런 운동은 정저우에서 시작된 뒤 북동쪽으로 확산됐고, 그밖의 다른 지역으로도 퍼져나갔으며, 농촌지역으로도 번지고 있다. 농촌지역으로 가는 학생들도 농민들에게 필요한 자료를 가져다주고, 농민들과의 연락망을 구축하고, 법률적 지원을 해주는 등 비슷한 활동을 벌이고 있고, 그러는 과정에서 전반적으로 많은 농민 활동가들이 갖는 고립감을 깨뜨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베이징대학을 비롯한 많은 대학에 바로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농민의 아들들'이라는 이름의 조직이 결성돼있으며, 이름과 달리 이 조직에는 '농민의 딸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우리가 1999년에 한 좌파 활동가를 만났을 때 그는 노동계급의 여건에 대해 직접 조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하는 일을 거의 혼자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2004년에는 스스로 동기부여된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어 자기와 같은 선도적 활동가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됐다고 말했다. 이제는 학생들이 주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운동은 대학생 사회 자체의 구성과 여건 변화에 의해 추동되기도 하고 더욱 촉진되기도 한다. 1999년 이후 대학 입학생 수가 세 배로 늘어나면서 대학생이 되는 노동계급의 자녀들이 늘어났지만, 그들 중 다수는 재학 중 교육비를 마련하고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하는 데서 점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결과로 많은 대학생과 노동자, 농민들 사이에 공감과 단합의 사회적 토대가 확장되고 있다. 개혁정책 초기에는 문화혁명에 대한 반작용으로 덩샤오핑이 홍(紅)보다 전(專)을 강조하면서 대학 입학에 보다 배제적인 자격조건을 부과하도록 했다. 오늘날에는 그때에 비해 중국의 대학들이 특권층의 영역이라는 성격이 줄어들고 좀더 대중적인 성격을 갖게 됐다. 그 결과로 지금 중국에서는 좌파 학생들이 공장이나 농장에서 힘겹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엘리트 지식인들을 연결시켜주고 있다.
  
  이제는 대학생들이 공장이나 농장의 노동자들과 친척관계인 경우가 보다 많아졌으며, 그렇지 않은 대학생이라도 노동자계급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어떤 측면에서 중국의 현 단계는 마르크스주의 학생들이 레닌의 인도 아래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공장구역으로 달려갔던 러시아혁명 초기 시절과 매우 닮았다. 물론 당시의 러시아와 지금의 중국은 같지 않다. 당시의 러시아와 달리 지금의 중국 대학생들 가운데 다수는 노동자나 농민 집안 출신이다. 또 지금 중국의 젊은 층 좌파는 노동계급과의 새로운 관계 형성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씨름하고 있긴 하지만, 마오의 지도 아래 쌓은 50년 간의 혁명적 사회주의 경험을 배후에 갖고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고 있다.
  
  좌파의 토양과 현실
  
  마오 시절의 개념, 정책, 관계들을 그때와 매우 달라진 오늘날의 상황에 아무런 변경도 가하지 않고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 정책, 관계들은 좌파가 자본주의적 개혁정책과 세계적인 시장경제화의 현 단계에 노동계급이 처한 여건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의지하고 활용할 수 있는 혁명적 사상과 실천의 거대한 저수지로 여전히 남아있다. 새롭다고는 할 수 없는 좌파의 사상이 노동자와 농민들 사이에 이미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향들을 과장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가 될 수 있다. 하나의 세력으로 파악되는 중국 좌파는 아직 소규모이고 주변적인 상태이며, 노동계급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그룹과 분파들로 분열돼있다. 전 세계의 모든 좌파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좌파도 그들이 이전에 알고 있었던 세계가 붕괴하는 현실에 직면해야 했고, 그들 자신을 조직화하고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행동에 나서도록 하는 데 중심 기반으로 삼을 만한 공통의 개념들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대체로 보아 노동자와 농민들이 스스로 주도력을 발휘하며 때로는 힘겨운 투쟁에 직접 나서고 있다. 이런 투쟁을 들여다보면 좌파가 지도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지만, 좌파가 전체적으로 좀더 큰 규모로 조직화된 운동에 나서는 경우는 그동안 거의 없었다.
  
  자유주의적 개혁론과 사회민주주의적 개념을 비롯해 새로이 경합하고 있는 여러 이념들은 좌파에게도 하나의 도전이 되고 있다. 미국에서의 상황이 그대로 되풀이되듯 오늘날 중국에서는 '계급'이라는 단어 자체가 예전보다 덜 사용되고 있고, 그 대신 시장에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회적 집단이라는 뜻의 '사회약세군체(社會弱勢群體)'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착취라는 개념이 겉으로 덜 드러나는 방향으로 용어가 변한 셈이다. 도시의 전문직 종사자들이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든 간에 그들 중 다수가 보여주는 삶의 양식도 이런 경향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중국에서 스스로 좌파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포함한 일부 지식인들은 요즘 도시에서 꽤 많은 돈을 벌고 있으며, 삶의 여건에서 점점 더 자신들과 멀어지는 노동계급과는 실천적 연결관계를 대체로 잃어버리고 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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