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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틀러는 왜 협상을 당당히 거부할 수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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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틀러는 왜 협상을 당당히 거부할 수 있었나? [한미FTA 뜯어보기 62:기고] 통상행정 시스템의 문제점과 통상절차법
여느 맞벌이 가정처럼 우리 집도 아이들 교육에 걱정이 많다. 그러다보니 둘째 아이에게 받아쓰기 시험 준비를 시키는 것은 필자의 몫이 되었다. 아이와 같이 부대끼면서 필자는 받아쓰기를 잘 하려면 맞춤법만 아니라 어휘력도 좋아야 한다는 상식을 깨닫게 되었다. 언젠가 '서당에 찾아 갔습니다'가 정답인데 아이가 '식당에 찾아 갔습니다'로 받아쓴 일이 있었다. 아이는 서당이라는 어휘를 몰랐던 것이다.

'선결조건'이라는 선명한 어휘가 들어 있는 정부 공식문서가 발견됐는데도 그것은 '진중하지 못한 표현'이었을 뿐이라는 정부의 해명은 어휘력 부족을 변명한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미국 협상대표인 웬디 커틀러(Wendy Cutler)는 지난 11일 한국 보건복지부의 새 의약품등재 정책을 이유로 협상의 진행 자체를 아예 거부함으로써 미국 측으로서는 '선결조건'이라는 어휘가 매우 정확한 표현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말과 행동이 다른 한국 정부

커틀러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은 말과 행동이 달랐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커틀러의 협상 거부에는 명분이 있었다. 한국은 선결조건의 이행을 위하여 지난 4월 18일 제2차 예비협의에서 미국에 '의약품 분야 작업반(pharmaceutical and medical device working group)'을 17개 '협상분과(negotiating group)'와 별도로 만드는 데 합의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작업반 설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업반은 협정문안 협상과 별도로 의약품 분야에서의 구체적 현안을 논의하는 제도적 장치인 것이다.

커틀러는 지난 6월 5일 워싱턴 디시에서 1차 협상을 시작하면서 미국 국내 이해관계자들과 전화회견(conference call)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다름 아닌 한국의 새로운 의약품등재 정책이 논란이 됐다. 그리고 미국이 과연 이 문제를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하나의 쟁점(an issue)'으로 논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그러자 커틀러는 단호히 대답했다.

"반드시 논의된다(Absolutely)."

그런데 본디 FTA 자체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규범일 뿐이지 특정 현안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한국 하이닉스반도체의 임직원 4명이 반도체 가격 담합행위로 미국에서 징역을 살아야 하는 현안이 있다. 하지만 한국이 이 문제를 당연히 한미 FTA 협상에서 쟁점으로 삼아 그 해결책을 논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커틀러는 한국 보건복지부의 특정 정책이 1차 협상에서 반드시 논의될 것이라고 미리 호언장담할 수 있었을까? 바로 작업반 설치가 합의됐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의약품 분야의 정책이 이 작업반의 틀 안에서 논의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작업반이 설치된 이상 이러한 기대는 정당한 것이었다. 커틀러는 위에서 언급된 전화회견에서 "작업반이야말로 한미 FTA 협상에서 독특한 것(The working groups are really unique to this negotiation)"이라고 자랑했다.

그런데 한국의 보건복지부는 5월 3일 '건강보험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발표했다. 모든 의약품을 건강보험 적용 대상으로 관리하던 기존의 방침을 선별등재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의약품 분야 작업반의 설치에 합의해준 지 불과 보름 만에 작업반의 틀 밖에서 중대한 정책변경을 공식 발표한 것이다. 작업반 설치에 따라 미국이 품었던 '합리적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커틀러의 입장에서는 한국은 말과 행동이 달랐다. 한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커틀러는 한국의 홈그라운드에서 명분 있게 협상을 거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한국으로서는 협상의 성패를 좌우할 '미국의 반덤핑 규제' 문제는 협상이 제대로 시작되지도 못했다.

법률시장은 왜 개방목록에서 뺐나?

그런데 정부가 2차 협상에서 말과 행동을 달리 한 것은 미국에 대해서만이 아니었다. 정부는 우리 국민에 대해서도 말과 행동을 달리 했다. 한국이 법률시장을 개방목록에서 제외시켰다는 보도를 보았을 때 필자는 오보라고 판단했다. 정부는 그동안 일관하여 지식기반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을 한미 FTA 추진의 본질적 동기로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그래야 중국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다고 정부는 누누이 밝히지 않았던가? 법률 서비스는 정부가 즐겨 입에 담던 고급 지식 서비스의 가장 대표적인 분야다. 그런데 막상 정부는 2차 협상에서 법률시장을 개방에서 제외하는 안을 내놓았다.

필자는 <녹색평론> 5/6월 호에서 법률시장 개방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밝힌 바 있다. 물론 개방의 구체적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이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하지만 정부가 다름 아닌 법률시장을 개방에서 제외하기로 했다면 그 이유는 반드시 설명돼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하지 않고도 정부가 농업인들에게 한미 FTA를 받아들이라고 설득하려는 태도를 취해도 되는 것일까?

통상행정 시스템의 단절

지금 한미 FTA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정부의 말과 행동은 왜 서로 다른가? 필자가 보기에는 단절된 통상행정 시스템이 악순환을 만들고 있다. 정부조직법에 의하면 외교통상부 장관은 외국과의 통상'교섭'에 관한 총괄과 조정을 담당한다. 외교통상부가 통상과 관련해 갖고 있는 권한은 원칙적으로 '교섭'의 영역으로 제한된다. 보건복지부의 새 의약품등재 정책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면, 이 제도의 수립과 시행은 보건복지부 장관의 고유 권한에 속하며, 외교통상부는 이 제도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 게다가 통상교섭의 차원을 넘는 일반적 통상정책은 산업자원부 장관의 권한에 속한다. 이처럼 한국의 통상행정 시스템은 분절적이다. 이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나 중국 상무부(MOFCOM), 일본 경제산업성(METI)의 체제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들 체제에서는 대외교섭과 통상정책의 입안과 조정이 분리돼 있지 않다. 그래서 국내 산업정책을 다루어본 경험이 없는 직업 외교관이 통상협상의 대표가 되는 일이 거의 없다. 커틀러 또한 1983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 상무부(DOC)에서 근무했던 산업통이다.

'자유무역협정추진위원회'와 '대외경제장관회의'라는 편법

정부는 '자유무역협정추진위원회'와 '대외경제장관회의'를 각각 외교통상부와 재정경제부에 설치하는 방식으로 통상협상에 관한 부처 간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조직은 대통령 훈령과 대통령령에 근거한 것일 뿐 아무런 법률적 근거가 없다. 두 회의에서 논의된 그 어떠한 사항도 대외적으로 책임성이 없으며 법률적 구속력도 없다. 이 점은 이미 한국의 사법부가 판단을 내린 바 있다. '대외경제장관회의'는 2002년 7월 중국 마늘에 대한 긴급수입제한관세(세이프가드)의 시한을 연장하지 않고, 그 대신 마늘산업 대책을 발표했다. 서울행정법원은 2002년 11월 "이같은 회의 결과의 절대적 구속력을 인정할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므로 지금 국내 마늘농가들이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상대로 마늘산업 대책을 제대로 시행할 것을 요구할 방법은 없다. 이처럼 대외적으로는 '대외경제장관회의'는 얼굴 없는 유령과 다르지 않다. 더욱이 환경, 노동, 복지 등의 분야를 다루는 비경제 부처는 위 두 회의에 상시적으로 참석할 권리조차 없다.

그리고 '자유무역협정추진위원회'에서 '자유무역협정 정책의 기본방향 및 추진전략'을 심의하도록 한 훈령 규정은 '무역관련 협상 추진방안'의 수립을 산업자원부 장관의 권한으로 명시하고 있는 대외무역법에 위반되는 소지마저 있다. 행정부의 훈령은 결코 입법부의 법률을 어길 수 없음은 법치행정의 기본이다.

국회에서 낮잠 자는 통상절차법안

선결조건까지 선물하면서 협상을 시작한 한국이 왜 홈그라운드에서 협상거부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는가? 한국 정부의 말과 행동은 왜 서로 다른가? 그 원인이 되는 통상행정 시스템의 단절을 법률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정부도 한미 FTA의 성공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민간 이해관계자들의 참여권을 법률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내용으로 하는 통상절차법이 제정돼야 한다. 그리고 통상절차법안은 이미 국회에 제출돼있다.

회사 일이 바빠 늦게 귀가한 날에는 아이의 받아쓰기를 챙겨주는 것도 귀찮다. 눈치 빠른 아이는 자기가 다 알아서 준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냥 넘어간다. 그래서 아이가 학교에서 치르는 받아쓰기 시험에서 틀리더라도 아이를 나무랄 수 없다. 귀찮아하는 태도로써 필자는 이미 아이에게 받아쓰기 시험에서 틀려도 괜찮다고 동의를 해준 셈이기 때문이다. 통상절차법안은 지금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국회가 이 법안에 대해 심의조차 하지 않는 모습은 마치 시험을 앞둔 아이를 돌보지 않고 그냥 방치해두는 부모의 모습과 같다. 혹은 정부가 불러줄 '성공한 협상', '재협상 불가'라는 말을 국회는 그저 받아쓰기만 하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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