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겨요. 믿을 수 있어요? 내가 장애인이 됐어요."
그녀가 양 주먹을 쥔다. 눈을 질끈 감는다. 경직된 듯 힘이 들어간 몸이 떨린다. 이것이 그녀의 울음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뇌종양 수술을 하는 과정에서 눈물샘이 같이 잘려나갔다. 소뇌에 종양이 자리 잡았다. 수술을 하지 않을 경우 몇 달을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 김시녀 씨는 의사에게 매달렸다. "우리 혜경이 그냥 내 옆에만 있게 해주세요. 내가 보고 싶을 때 보고 만지고 싶을 때 만질 수만 있게 해주세요." 몇 년 전만 해도 수술을 하지 않는 병이라고 했다. 그만큼 위험성이 크다는 말이었다.
"수술 끝나고 중환자실에 면회 갔는데 쟤 사지가 다 묶여있는 거예요. 간호사 보고 왜 묶어놨냐니깐, 서울대 병원 중환자실 침대 하나 값이 3000만 원이래요. 그 침대가 부서질 정도로다가 난리를 치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식물인간은 아니라는 거잖아요. 그래, 부셔져도 괜찮다. 식물인간만 아니면 된다. 그땐 눈물도 안 나오더라고요, 너무 좋으니까."
그러나 뇌종양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수술을 하러 간 날, 혜경 씨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휠체어를 보고 "이걸 내가 왜 타?"라고 반문하며 병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이 혼자 걷는 마지막 걸음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부축 없이는 혼자 서 있을 수조차 없다. 말은 힘겹게 나온다. 복시로 인해 사물이 4개로 보이는 바람에 한쪽 눈은 거의 사용하지 못한다. 시력도 크게 떨어졌다. 언어, 시각, 보행 1급 장애가 그녀의 상태를 말해주는 단어다.
한혜경 씨의 소원은 건강해져 예전처럼 일을 하는 거다. 월급을 받아 식구들에게 저녁을 사주고 싶다고 언젠가 이야기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어머니 김시녀 씨의 소원은 딸이 숟가락질이라도 제대로 하는 것이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모녀는 매일같이 재활치료원을 찾는다. 그녀가 예전처럼 직장에 다니는 일은 아마 없을 지도 모른다.
ⓒ매일노동뉴스(정기훈) |
모두가 인정했던 삼성, 하지만…
한혜경 씨는 6년을 한 회사에서 일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들어간 첫 직장이었다. 일은 힘들었다. 12시간 맞교대가 일상이었다. 그곳에 들어간 이유를 묻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삼성에 다닌다고 그러면 애들이 다 인정했어요."
그녀는 1995년 10월 삼성전자 LCD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좋은 회사'에 들어간 딸은 김시녀 씨의 자랑이기도 했다. 딸이 집에 오는 날이면 김시녀 씨는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그런데 정작 혜경씨는 밥 먹을 새도 없이 자기 바빴다. 늘 피곤해했다. 스물 몇 살짜리 얼굴에 빨간 여드름이 가득했다. 생리도 몇 달 넘게 하지 않는 때가 많았다. 하지만 여직원들 사이에서 생리불순은 회사에 들어오면 한 번씩은 겪는 절차처럼 얘기되고 있던 터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입사한 지 3년이 지나자 아예 생리를 하지 않았다. 일이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직 후에도 어깨나 머리가 자주 아팠다. 처음에는 감기몸살인가 싶어 병원을 찾았다. 약을 먹으면 며칠은 괜찮았다. 걸음도 자꾸 뒤뚱거렸다. 뼈를 다친 건가 싶어 X-ray를 찍어보기도 했다. 별 다른 이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병원을 전전하는 사이 몇 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혜경 씨는 신들린 것 마냥 헛소리를 해댔다.
신경과를 찾았다. 진료를 하던 의사가 머리를 MRI 촬영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온갖 병원을 갔지만 머리 쪽에 이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검사 결과 소뇌에서 종양이 발견됐다. 의사는 말했다.
"종양 크기로 보니 7, 8년 쯤 된 거네요."
2005년 수술을 받을 당시로부터 7년 전이면 혜경 씨가 삼성전자에 근무하던 때였다. 치료하기에 바빠 그 말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 재활치료를 받던 중, 혜경씨가 삼성전자에 근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회복지사가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인권과 건강지킴이)'이라는 단체를 알려주었다.
한번 연락이나 해보자 하는 심정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돈을 노리고 접근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가 찾아왔다. 혜경 씨가 삼성전자에서 한 작업 내용을 듣기 위해서였다.
혜경 씨는 6년 동안 솔더크림을 회로기판에 바르는 작업을 했다. 회로기판을 열처리 기계에 넣고, 이 과정에서 나오는 불량을 검사하는 것도 그녀의 일이었다. 그런데 종일 곁에 두었던 솔더크림의 주성분이 '납'이었다. 납은 발암물질이다. 솔더크림은 종종 피부에 묻곤 했다. 불량품은 육안으로 가려야 하기에 열처리 된 회로기판을 가까이서 봐야 했다. 이 과정에서 기판에 묻은 납이 호흡을 통해 들어오는 건 당연했다. 작업장에 납 냄새가 가득했다. 종일 맡다보니 기숙사에 와도 냄새가 코끝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급된 보호장비는 면으로 된 마스크와 비닐장갑뿐이었다.
혜경 씨에게 물었다.
"위험하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
"삼성은 좋은 회사이니까, 당연히 그런 (위험한) 거 안 쓰겠지 생각했나봐요."
겨우 19살에 들어간 회사였다.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작업장에서 버젓이 사용된다는 것을 알 나이가 아니었다. 회사는 그녀가 사용하는 약품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선배들이 일을 가르쳐주면서 손에 크림이 묻으면 IPA(Isoprophyl Alcohol)로 닦으라고 말한 게 안전교육의 전부였다. 유기용제 IPA조차 중추신경계열에 영향을 주는 독성물질을 포함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말도 안 되는 작업환경이었다. 그러나 몰랐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일했다.
ⓒ프레시안(김봉규) |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떤다. 으, 으, 화를 누르는 소리다.
"내가 귀신이 돼서라도…가만히 안 놔두고 싶어요."
"먹어도 맛을 몰라, 슬퍼도 눈물이 안나…"
그러나 그녀의 분노는 인정되지 못했다. 근로복지공단은 혜경 씨의 병을 산재라 인정하지 않았다. 업무 연관성이 없는 개인질병이라고 했다. 삼성에 대한 그녀의 분노를 착각이라고 했다.
혜경 씨에게 산재 인정은 억울함을 넘어 생존의 문제였다. 딸의 곁을 떠날 수 없기에 김시녀 씨는 어떤 벌이도 할 수가 없다. 집을 팔고 차를 팔아 치료비를 대고 약값을 댔다. 찬바람이 불어오자 김시녀 씨의 근심은 늘어간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어느덧 진정이 된 혜경 씨가 차분히 말한다.
"내가 갑자기 장애인이 됐어요. 이해를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가끔씩 울컥울컥 해요."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혜경이는 종일 집에 있거나 병원에서 운동하는 거 밖에 없어요. 쟤도 예쁜 옷 입은 사람 보면 자기도 입고 싶을 거고, 저도 하고 싶은 거 있을 거잖아요. 뭘 먹어도 맛을 아나. 슬퍼서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기를 해. 그렇다고 잠을 편히 잘 수 있나? 밤마다 벌떡벌떡 일어나요…너무 많은 걸 잃어버렸어요."
대체 그녀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티는 걸까.
"혜경아, 금방 돼. 될 거야. 너 너무 걱정하지 마…내가 나한테 말해줘요."
그리고 돌아본다.
"엄마가 고생이 많아."
"아니야…엄마잖아…."
"나 나중에 또 병 걸리면 수술시키지 마. 진짜로 약속."
ⓒ반올림 |
"됐어, 이 지지배야."
"수술시키면 안 돼."
"아유, 재발 안 돼."
그녀가 이번엔 내 쪽을 보며 말한다.
"건강해, 건강할 때 지켜야 해. 건강이 최고예요."
종양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위험부담이 큰 까닭이었다. 남은 종양이 언제 재발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재발해서는 안 된다. 그녀들이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워서는 안 된다. 혜경 씨 어머니 말대로 "재발되면 모녀가 삼성 앞에 가서 텐트치고 살다가 거기서 둘이 죽던지 뭘 하던지"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올해 4월, 반올림은 한혜경 씨에 대한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판정에 맞서 재심사를 요청했다. 8월 초 결과가 나왔다. 불승인이었다. 현재 반올림은 노동부에 재심사청구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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