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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한국 기업이니까…', 이젠 안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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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한국 기업이니까…', 이젠 안 통해" [우석훈 칼럼] "ISO26000 시대가 온다"
1990년대를 금융화의 시대로 이해할 수도 있고, 세계화라고 시대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어차피 같은 흐름을 공유하던 한 시대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1990년대는 다국적기업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다국적기업의 힘이 세지면서 기업들 사이에서도 지켜야 할 약속이 중요해졌다. 예전에는 제품 표준화에 집중하던 ISO라는 국제표준기구가 기업들 사이에 지켜야 할 약속을 일종의 경영규칙으로 제시하기 시작한 데에는 다국적기업의 전면화라는 시대적 배경이 있다고 할 수 있다.

ISO의 기업 표준화에는 4개의 주제가 있다. ISO 9000은 QM이라고 불리는 품질경영에 관한 것이었고, ISO 14000은 EM, 환경경영에 관한 것이었다. 지난 11월 1일, 지침서가 발표된 ISO 26000은 SR(Social Responsibility)라고 불렸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내용이고, ISO 31000은 위험 관리에 대한 내용이고, 아직 논의가 진행 중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해서는 우리로서는 아직은 제한된 논의 정도 밖에는 없으며, "기부 많이 하면 될 거 아니냐?"는 대단히 초보적인 수준이다. 물론 '윤리 경영'이라는, 사회적 책임 보다 더 앞으로 나아간 논의들 역시 한국의 대기업 혹은 다국적기업들에게는 아직은 낯선 것에 가깝다.

ISO는 민간 부문이 주도하는 국제기구이지만, 한국에서도 지식경제부의 기술표준원이 이 협의에 공식 대표로 참가하였다.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표현을 쓴다면, 기업 특히 다국적기업들이 국적과 관계없이 이 정도는 경영상에서 표준적으로 하자는 정도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 ⓒ프레시안

ISO 26000에서 주요 항목으로 설정된 것은 다음의 7가지라고 할 수 있다.

6.2. 기업내 조직 관리
6.3. 인권
6.4. 노동 관행
6.5. 환경
6.6. 공정성
6.7. 소비자 관계
6.8. 지역공동체와의 관계

물론 ISO 26000의 가이드라인에서 제시된 것은 최소한의 기준이지만, 노조와의 관계, 노동자의 보건권 그리고 지역공동체와의 관계처럼 한국 대기업들에게는 아주 지키기 어려운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삼성을 비롯해서 많은 회사들이 "우리는 한국이니까…"라는 이유로 좀 황당한 일들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최소한 그런 것들에 대해서 국제적 기준이 이번에 제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 있던 9000 시리즈나 14000 시리즈와의 차이가 없지는 않다. 품질경영과 환경경영은 제3의 전문적 인증기관을 통해서 공식적인 인증을 받도록 하고 있지만, 26000의 경우는 워낙 국가별·업종별 편차가 크기 때문에,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을 스스로 채택하면서 일종의 '자발적 선언' 같은 것을 하도록 하고 있다. 물론 실무적으로는 큰 차이는 없다.

QM이나 EM이 정부 발주사업과 수주참여 등에서 배점 등으로 작동하면서, 어지간한 대기업들은 앞의 두 가지의 인증은 거의 받았다. 그 인증이 '선언'으로 대체될 것인데, 국제 경쟁 과정에서 이 선언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가 기업이나 사업 평가 과정에서 배점 항목으로 사용될 가능성은 높다. ISO 기준이 강력한 것은, 특정 국가에서 시행하는 소위 '비관세 무역장벽(non-tariff measures)'에 대한 WTO의 시비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건 비록 UN에서 채택한 기준안이 아니더라고 하더라도 기업들 스스로 지키겠다고 한 것이기 때문에 특정 국가의 정책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한국 정부에서도 ISO 14000의 경우는 그 자체로도 여러 가지 기준이 되었을 뿐더러, '친환경기업'이라는 우리나라에 고유한 기업 인증체계도 개발한 적이 있다. 지난 정부 때 '상생경영'이라는 항목으로 중소기업과의 협력관계 그리고 '균형개발'이라는 항목으로 지역에 대한 기여 등을 공기업 및 CEO에 대한 경영평가 항목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렇게 일부 공기업에서 시도하던 일종의 윤리경영 혹은 '사회적 책임'이 국제적으로 전면화된 것이 이번 ISO 26000 가이드라인의 도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ISO 26000이 도입되었다고 해서 다국적기업이나 대기업들이 한꺼번에 천사와 같이 된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 기업들이 하는 행위들에 대한 도덕성이나 정당성을 포괄적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메시지가 있고, 경영 현장으로 더 들어가면 이런 기준들이 다국적기업들 사이의 경쟁의 요소가 된다는 슬픈 사실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일으켰던 다국적기업들이 ISO 26000을 먼저 경영에 도입하고 "우리는 도덕적으로 우수하다"고, 그렇지 않은 개도국의 기업들을 핍박하는 도구로 사용될 여지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970년대와도 다르고, 1980년대와도 다른, 새로운 경영 환경이 국제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국제적으로 좌파들이 다국적기업의 논의에 부당하게 개입하면서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인가? 사회적 변화에 대기업 스스로가 맞춰나가려다 보니, ISO 기준들이 경영 표준화라는 항목으로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 같은 것까지 가이드라인으로 정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21세기가 꿈의 세기는 아니더라도 부도덕한 기업가들만 배불리는 시대라고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해서는 곤란하다는 얘기가 다국적기업 내부로부터 나오는 게 현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에도 이마트 피자 사건과 SSM 사건처럼 우리 사회를 뜨겁게 한 기업 이슈들이 있고, 일부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무노조 경영을 하는 삼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아니면 이미 불법으로 법원에서 결정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시정하고 있지 않은 일부 작업장의 '불법 파견'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풀어나가는 또 다른 요소가 바로 ISO 26000 가이드라인 내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전례대로 보면, ISO에서 새로운 인증체계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 보통 한국의 대기업들은 최소한 다른 선진국 기업들보다는 늦지 않게 새로운 체계를 도입하거나 적응했다. 11월 1일의 가이드라인은, 대기업과 사회의 관계에서 최소한 3가지 층위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셈이다.

▲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 이 사건은 한국 대기업의 불투명한 경영 관행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도전을 감당하지 못했다. 삼성에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끝났다. ⓒ뉴시스

먼저 정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을 정부가 어떻게 이해하고, 거기에 맞추어서 수주 등 발주체계에 대한 방향을 정할 것인가, 분명히 이런 질문이 있다.

두 번째 기업.
제3자 인증방식과 달리 이번의 ISO 26000은 기업 스스로 자신의 체계를 정비하고 선언을 하도록 하고 있다.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선언이라는 과정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인가, 그런 질문들이 던져질 것이다. 대기업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사이에 역시 국제 경쟁과 국내 경쟁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먼저 선언을 하는 기업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만약 재계순위 50위 내에 있는 기업들이 상당수 '사회적 책임경영'에 대한 선언을 한다면? 이런 유무언의 압력이 발생할 것인데, ISO 가이드라인의 원 취지가 기업 스스로의 그런 자체적인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다.

세 번째 시민.
편하게 시민이라는 '격(格)'을 사용하지만, 부모가 엄청난 재산을 물려준 경우가 아닌 다음에는 우리 모두 '소비자'와 '노동자'라는 두 가지 격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소비자라는 격은 아직 우리에게 익숙지 않고, 노동자라는 격 역시 노조가입률의 지속적 저하 그리고 비정규직화 등으로 대기업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다는 시민적 권리 자체를 우리가 스스로 의심하고 있던 것 아닌가? 그런 고민을 본격적으로 해야하는 시점에 온 것 같다.

1세기 전 스탠다드 오일 컴퍼니가 전권을 가지고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시기가 다시 올 것 같지만, 그런 시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 이미 '사회적 책임'이라는 항목은 1차적으로 정리가 된 상황이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항목이 추가되면서 더욱 빡빡하게 지금의 가이드라인이 수정되면서 진화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위험 관리와 함께 윤리 경영 등 다국적기업과 대기업들이 지켜야 할 사회적 규범이 경영 표준화 형식으로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다.

또 다른 종류의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우리에게 온 셈이다. 착한 기업, 윤리적 기업, 그런 어려운 말은 너무 철학적이라서 모른다고 할지라도 ISO 가이드라인은 현실이다. 14000의 환경경영은 이미 지난 10년 동안 국제적 경쟁 양상 자체를 바꾸어놓았고, 26000이 이제 다시 새로운 현실이 된 셈이다.

"님은 소비도 이념적으로 하시나요?"

트위터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이 문장 하나가 경제학자인 나에게 꽤 많은 것을 고민하게 하였었다. ISO 26000이 지나치게 이념적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현실이다. 워드뱅크, UNDP, UNIDO 등 국제적으로 실물경제의 프레임을 좌지우지하는 UN 등 국제기구들이 있고, 이런 곳들에서 ISO 26000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국제 협상이 앞으로 수 년 동안 숨가쁘게 이어질 것이다.

따라오고 안 따라오는 것은, 한국적 현실에서는 오너의 재량권 내에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대기업들은 충분히 투명하지 않고, 거버넌스 역시 국제 규범에 잘 안 맞는 요소도 많다. 그러나 그 오너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혹은 경제나 기업을 어떻게 이해하든, 글로벌 스탠다드는 새로운 방향으로 가고 있고, 수 년간의 논의를 끝내서 "어지간하면 이 정도는 지키세요"라고 가이드라인을 우리에게 던져 놓았다. 이 질문은 이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국제적 경영 현실에 관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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