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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선물을 고마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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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선물을 고마워하지 않는다"

[기자의 눈] '깃발은 물가, 방향타는 성장'이라는 경제정책

요 며칠 사이, 경제정책 수장들의 말이 성장과 물가 사이에서 흔들려 왔다. 그래서 시장이 잠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정리되고 있다. 정책 수장이 든 깃발은 물가를 가리키되, 그가 잡은 방향타는 성장을 향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하면, 최근 며칠 동안의 혼란이 정리가 된다.

그러나 이런 방향타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성장 일변도 경제정책의 최대 수혜자인 재벌 총수가 현 정부에 불만을 쏟아냈다. 한국 경제는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는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다.

11일, 임종률 "'고환율' 정책 유지한다"

기획재정부 임종룡 1차관은 11일 오전 "환율은 잘못 건드리면 여러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며 "물가 안정을 위해 (환율을) 조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밝혔다. 지금의 '고환율' 정책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고환율' 정책은 최근 논란이 되는 물가 불안의 핵심 원인이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발언처럼, 물가 불안의 원인이 나라 밖 사정에 있다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고환율' 정책을 유지한다는 것은, 정부가 물가 안정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뜻이 된다. 대신, 수출 대기업은 계속 혜택을 누리게 된다. 환율이 높아지면, 수출 대기업은 가만히 앉아서도 수익을 낸다.

이틀 전, 윤증현 "'안정 성장'하겠다…경기 회복, 낙관 어렵다"

하지만 임 차관의 말은 이틀 전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한 말과 어긋난다. 윤 장관은 지난 9일 '안정 성장'이라는 말을 꺼냈다. 물가를 불안하게 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성장을 추구하는 게 '안정 성장'이다. 수출 대기업을 지원해서 성장률 수치를 끌어올리는 데만 초점이 맞춰졌던 정책 기조에 대한 반성이 담긴 말이다. 경제정책 수장이 '안정 성장'이라는 말을 쓴 것은 현 정부 출범 이후 처음이다.

윤 장관은 이날 "경제 회복의 흐름이 계속될 수 있을지 낙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말도 했다. '고환율' 정책으로 수출 대기업을 밀어줘 봤자, 성장률 수치를 높이는 데도 기대만큼의 효과를 거두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실제로 같은 날 <프레시안>과 만난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역시 "지금의 국제 정세를 보면, '고환율' 정책이 꼭 수출 증대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물가는 불가항력'…대통령이 할 말인가?")

김 전 수석은 이날 "달러당 원화 환율이 910원대까지 내려갔던 2004~2005년 무렵에도 수출은 두 자리 수 이상 늘었다"라고 말했다. '저환율' 환경에서도 장사를 잘 했던 대기업들이, 이제는 '고환율' 환경이 주어져야만 수익을 낼 수 있다면, 그건 이들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증거 아니냐는 말도 했다. 그런데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업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은 현 정부가 금과옥조로 삼는 시장원리에도 어긋난다. 또 이런 지원이 다수 국민의 피해를 무릅쓴 것이라면, 정치적으로도 옳지 않다.

하루 전 청와대, 물가 잡겠다면서, '5%성장' 밀어붙인다?

그런데 다음날인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혼란이 생겼다. 우선 이 대통령은 물가를 잡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금년 국정 과제 가운데 성장과 물가 안정이 있는데 물가에 국정의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또 이날 한국은행 역시 기준금리를 3%로 올렸다.

여기까지만 보면, 명료하다. 그런데 같은 날, 김희정 청와대 대변인은 "경제전망치 수정은 없다"라고 못 박았다. '5%성장'을 밀어붙인다는 말이다. 이런 목표치는 설정 당시부터 너무 높다는 지적을 받았었다. 민간 연구기관조차 이처럼 높은 성장을 예상하지 못했었다. 민간의 예측치를 뛰어넘는 목표치를 제시한 순간, 시장은 정부의 속내가 성장에 있다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런 목표치를 달성하려면, 수출 대기업에게 유리한 '고환율' 정책 역시 포기할 수 없다.

속내는 성장…'트리클 다운'에 대한 믿음?

그렇다면, 성장과 물가 중에서 물가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대통령의 말은 뭔가. 또 "경기 회복을 낙관할 수 없다"며 '안정 성장'을 도모하겠다던 윤증현 장관의 말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성장과 물가를 동시에 잡는 경제 이론은 없다.

이런 혼선은, 임종룡 차관의 11일 발언으로 정리됐다. 물가를 잡겠다는 대통령과 장관의 말은, 그저 말일 뿐이라는 것. 속내는 여전히 성장에 있다는 게다.

정치적으로는 자살 행위다. 물가 불안으로 흉흉한 민심을 떠올리면, 그렇다. 이런 부담을 지면서까지 '고환율' 정책에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 "어떤 성장이건, 그 자체로 좋다"는 신념? "수출 대기업이 큰 수익을 내면, '트리클 다운' 효과(대기업과 부유층이 윤택해지면, 물이 넘쳐흐르듯 다른 부문도 혜택을 입는다는 주장)에 대한 믿음? 아니면 그저 정책 당국자들의 관성?

배신당한 짝사랑…"그들은 선물을 고마워하지 않는다"

답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게 있다. '고환율' 정책의 최대 수혜자인 수출 대기업은 현 정부를 고마워하지 않는다.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뉴시스
지난 10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현 정부의 경제정책 성적표를 몇 점을 매기겠느냐'라는 질문에 "낙제는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다.

현 정부에서 총리를 지냈던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의 '초과이익공유제' 제안에 대해선 막말에 가까운 대답을 했다.

"도대체가 경제학 책에서 배우지도 못했고 누가 만들어낸 말인지 사회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자본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공산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모르겠다"라는 게다. "(이 회장이) 어릴 때부터 기업가 집안에서 자라 경제학 공부를 해왔으나"라는 설명도 따라붙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 가운데 한 명인 정 위원장이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오랜 '짝사랑'이 배신당했다. 긴 '짝사랑'의 시간 동안, 재벌에게 건넸던 선물들이 떠오른다. 유죄 판결에 대한 사면 조치, '고환율' 정책…등. 국민이 보기엔 그들에게 분에 넘치는 선물인데, 정부 당국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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