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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감옥의 도서관 사서, 그를 석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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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방콕 감옥의 도서관 사서, 그를 석방하라"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탁신의 승리가 민주주의의 진보로 이어지려면…"
태국 선거가 야당인 푸에타이 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표면적으로는 망명 중인 재벌정치인 탁신의 승리로 보이지만, 필자가 방콕에서 만난 태국의 노동운동가는 "농민-빈민-노동자의 승리"로 평했다. 선거 결과를 인정하기 싫은 군부의 쿠데타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2010년 5월 방콕의 중심가에서 공식 사망자만 90명이 넘는 '방콕 내전'을 치른 군부가 민주적인 선거로 당선된 민간정부를 뒤엎고 다시 정치에 개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을 나온 엘리트인 아피싯 총리가 이끈 민주당 정부는 선거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전망 속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총선을 회피하려 했지만, 2010년 5월 태국 민중들은 방콕 중심가에서 피를 흘리며 총선을 요구했고, 그 결과 2011년 7월 3일의 총선거가 가능했다.

태국은 헌법의 보호를 받는 민주주의 국가인가

<방콕포스트> 7월 5일자를 보니 탁신 사면과 조기 귀국에 관한 기사가 눈길을 끈다. 지금 태국에는 400명이 넘는 정치범들이 감옥에 갇혀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왕실모독죄(the lese-majesty)를 적용받았다. 푸에타이 당이 탁신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 정당으로 남을 지, 아니면 민중의 민주주의 열망을 실현하는 정당으로 활약할지를 가늠하는 척도로 400명의 정치범에 대한 사면과 석방 문제는 중요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찬양받는 부미볼 국왕을 필두로 하는 왕실은 태국 법질서에서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다. 2007년 개정된 태국 헌법 제8조는 "국왕은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며, 결코 침해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어떠한 종류의 비난과 행위에 국왕을 드러내선 안 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형법 제112조는 "국왕, 왕비, 왕실 계승자 혹은 섭정인(攝政人)의 명예를 훼손·모욕·위협하는 자는 3년에서 15년의 징역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7월 3일 선거에서 패한 태국의 민주당 정부는 정적을 탄압하고, 정치적 반대파의 목소리를 잠재우며, 총선에서 당선이 유력한 야당인사의 입후보를 가로막기 위해 왕실모독죄를 남용해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태국 문제 평론가인 데이비드 스트렉퍼스(David Streckfuss)는 왕실모독죄의 근거가 되는 헌법 제8조와 형법 제112조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을 받아선 안 된다"고 규정한 헌법 제4조·제5조·제30조는 물론이고,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연설하고, 쓰고, 인쇄하고, 출판하고, 기타 수단으로 드러낼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한 헌법 제45조와도 충돌한다고 지적한다.

"태국은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의 보호를 받는 민주주의 국가인가 아니면 민주화를 가로막는 권위주의 구조를 가진 군주제 국가인가"라고 묻는 스트렉퍼스의 질문은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도 군사 쿠데타와 헌정질서의 중단이 반복되는 태국 상황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 2007년 3월 경기도 마석에 있는 전태일 묘소를 방문한 태국 노동자에게 전태일에 대해 설명해주는 소묫(사진 가운데 키 큰 이)

한국 노동운동의 친구, 소묫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정치범 400명 중에는 태국의 저명한 노동운동가이자 민주주의 투사인 소묫 프룩사카셈석(Somyot Pruksakasemsuk)도 들어있다. 4월 30일 왕실모독죄 혐의로 체포된 소묫은 방콕에 소재한 레만드 감옥에 갇혀 있다. 작년 5월에도 보안경찰(CRES)에 체포되어 군대 막사에 3주간 갇혔던 소묫은 올해 체포되기 전까지 <레드파워(Red Power)>라는 제목의 시사주간지를 활발히 운영하면서 왕실모독죄 폐지를 위한 국회청원운동을 벌이는 등 '레드 셔츠' 운동에서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활동해왔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 소묫은 90년대 중반부터 한국 노동운동과 꾸준히 교류해왔다. 정기적으로 태국 노동운동가들의 한국 연수를 주선했으며, 자신도 민주노총과 한국노총과 참여연대를 방문하였고, 양대 노총 산하 산별노조들과도 연대 활동을 펼쳤다. 특히, 한국의 노동운동가들이 한국 정부로부터 탄압받고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방콕 주재 한국대사관 앞에서 태국 노동자들과 함께 한국 노동문제의 개선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어 한국 정부에 보내는 항의서를 전달하였다.

그가 한국 노동운동에 보내준 관심과 애정은 남달랐다. 오늘날 태국 노동운동가들이 즐겨 부르는 '솔리대리티 solidarity'라는 태국 운동가요는 한국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소묫이 태국어로 개사(改詞)하여 현지 노동자들에게 퍼트린 것이다. 이는 상업주의 한류 열풍이 태국에 몰아치기 10년 전의 일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그와의 교류와 대화는 태국 노동운동은 물론 태국 사회 전체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 6월 29일 홍콩노총(HKCTU) 간부들이 홍콩 주재 태국총영사관에 소묫 석방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고 있다.

태국의 장래는 어두운가

2007년 3월 <프레시안>에 실린 인터뷰에서 소묫은 "농민층이 그(탁신)의 복귀를 원한다. 태국에서 농민층의 정치적 영향력은 대단하다. 정치적 복권은 어렵지만 경제인으로서의 복귀는 시간 문제다"고 진단한 바 있다.

2006년 9월 미국 뉴욕의 유엔총회 참석 중에 일어난 군사쿠데타로 망명길에 올랐던 탁신은 2007년 12월 그의 노선을 계승한 정당이 총선에서 승리하자 2008년 초 방콕으로 귀환했었다. 하지만, '옐로 셔츠'가 주도하는 시위가 격화되면서 태국의 정치상황이 불안해지자 다시 망명길에 오른 바 있다. 이번 7월 3일 선거 결과 등장할 새 정부는 대대적인 사면·화해 정책을 펼칠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성과에 따라 탁신의 귀국도 연내에 이뤄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07년 인터뷰에서 '태국 민주주의의 장래가 어둡게 느껴진다'는 필자의 물음에 소묫은 미래를 예언하는 듯한 답변을 해주었다.

"그렇게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태국 사회는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독재와 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더 커졌고, 쿠데타도 좋게 보진 않는다. 기존 정당의 무능과 부패가 단기적으로는 정치 불신으로 나타나겠지만, 길게 보면 민중의 각성을 통한 정치세력화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 태국은 역동적인 변화 도정을 지나고 있다. 노동운동, 지식인운동, 사회운동, 농민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이런 요소들이 새로운 정당 건설로 이어지면서 태국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것이다."

물론 그가 말한 노동자, 농민, 민중에 기반한 새로운 정당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 새로운 정당의 자리를 탁신을 계승하는 정당들이 차지해왔다. 노동자, 농민, 빈민들에게 탁신은 "구시대 엘리트들에게 박해받는 민중의 영웅"으로 여겨지고 있다. 부패한 재벌정치인에서 민중의 지도자로 등극한 것이다.

2010년 10월 한국어로 번역·출판된 <탁신: 아시아에서의 정치비즈니스>의 저자들인 파숙 퐁파이칫과 크리스 베이커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탁신)는 더러운 정치인이기도 하지만 위대한 영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현실이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엄청난 규모의 돈을 벌기 위해 정계로 진입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그는 민중의 지도자로 등륵했습니다. 여기에는 소득과 부 그리고 권력의 편중에서 야기된 태국 사회의 부조리를 극복해야 한다는 민중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습니다. 역사란 때로 무척 골치 아픈 것입니다.

많은 세계인들이 태국의 현존하는 갈등에 대해 비관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태국이 위대한 역사적 변화의 과도기에 있다고 여깁니다. 궁극적으로 태국 국민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를 위해서도 긍정적인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열악한 태국 노동자들의 조건

아시아 각국의 노동조건을 비교해보면 태국이 가장 열악하다. 법정 주간노동시간이 48시간이고, 법적으로 허용되는 연장근로시간(overtime)은 주당 36시간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길다. 일주일에 84시간의 노동시간이 합법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법정 허용 최대 노동시간이 한 주에 52시간이다. 태국보다 경제발전 수준이 낮다고 평가되는 인도네시아의 법정 기준노동시간이 한 주에 40시간이다. 실질 노동시간을 살펴봐도 태국의 노동시간은 아시아에서 가장 긴 편에 속한다. 노동권과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국제노동기구(ILO)의 국제노동협약 비준 수를 보면 전체 189개 협약 가운데 태국 정부가 비준한 것은 14개로 최하위권이다. 공산권 국가들인 중국과 베트남도 각각 22개와 18개를 비준해놓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경제규모에 비해 노동후진국으로 평가되는 대한민국 정부도 24개를 비준했다.

노조 결성 혹은 노조 가입을 이유로 한 해고와 차별은 비일비재하다. 군부와 손잡은 반민주 정권들이 노동자 권리와 노동조합 활동에 관심을 가질리 만무하다. 노동현장에서 벌어지는 사용자들의 불법 행위와 인권 유린은 가히 세계적 수준인데도, 태국 정부는 사용자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급여가 많고 노동조건이 좋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푸에타이 당에 표를 던지지 않았다. 하지만 급여가 적고 노동조건이 열악한 민간부문 노동자들은 대거 푸에타이 당에 표를 던졌다"고 방콕에서 만난 노동운동가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방콕 감옥의 라이브러리언

방콕의 레만드 감옥에서 죄수 소묫이 받은 보직은 도서관 사서다. 그래서 소묫의 석방을 바라는 아시아의 활동가들이 만든 블로그의 제목도 "방콕 감옥의 라이브러리언(The Librarian of Bangkok Prison"이다(freesomyot.wordpress.com 참조). 블로그에는 방글라데시, 홍콩, 호주, 뉴질랜드 등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프리 소묫(Free Somyot)" 캠페인 소식이 실려 있다.
▲ "Free Somyot(프리 소묫. 소묫에게 자유를!)" 포스터

태국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던 소묫은 정치 개혁이 절실함을 깨닫고 '레드 셔츠'운동에 참여하였고, 민주주의 활동의 일환으로 시사주간지를 내고 왕실모독죄의 개폐(改廢)를 추진했다. 그것이 못마땅했던 태국 민주당 독재정권은 그를 감옥에 보냈다. 7월 3일 선거 결과 물러나게 되는 민주당 정권은 국민 총선거로 권력을 거머쥔 합법적인 정부가 아니었다. 법원 판결과 의회 내부의 투표를 거쳐 탄생한 정통성이 결여된 비정상적인 정부였다. 왕실, 군부, 상층 엘리트, 교육받은 방콕 중산층의 후원으로 연명하던 소수파 정부였다.

자유민주주의의 출발점인 '1인1표제'는 2001년, 2004년, 2006년, 2007년에 이어 2011년에도 탁신의 정당에게 권력을 주는 위력을 보여주었다. 새 여당이 민중의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나설지, 그 열망을 배반할 지는 아직 예측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 시금석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다 부당하게 감금된 정치범의 석방과 노동권의 개선 여부가 될 것이다. 이것이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의 접점에 서 있는 소묫의 석방에 필자가 관심을 갖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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