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포커 게임에서 가장 나쁜 것은 꼴등이 아니라 2등이다. 막판까지 승자와 경쟁을 하다가, 마지막에 승자에게 가장 많은 돈을 헌납하는 것이 2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아예 승부에 뛰어들지 말든지, 그게 아니라 일단 승부에 뛰어들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우선 승리를 쟁취하고 나서, 그 후에 이러니저러니 말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승자독식. 비정하지만, 이것이 진리다. 미안하지만, 2등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당신은 기억하는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의 뒤를 이어 들어온 선수가 누구인지를.
그러면서 이건희 삼성회장이 한 말이라며 읊조린다. "올림픽 100m경기에서 우승과 2등은 불과 0.01초의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그 0.01초의 차이가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고 한 사람은 기억조차 나지 않게 만든다. 이처럼 1등과 2등의 차이는 엄청나다. 세계적인 명품을 만드는 일류 회사와 그저 평범한 수준의 물건밖에 만들지 못하는 이류 회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 기자에게는 태권도 같은 스포츠나 삼성전자 같은 기업 운영 모두가 전쟁으로 보인다. 세상살이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인 것이다. 그렇기에 "열 번 2등을 하는 것보다는 한 번 1등을 하는 것이 낫다"는 김 감독의 한 마디가 그에게는 기사의 '야마'가 된다.
스포츠나 기업이나 1등만 살아남으니 수단과 방법에 심각한 문제가 있더라도 1등을 해야 한다는 논리는 박 기자만의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조선일보>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조선닷컴! 1등 인터넷뉴스"라고 뜬다. 물론 1등주의에 대한 집착이 <조선일보>만의 것도 아니다. "천재 1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한 이가 누구였던가.
아나톨리 칼레츠키의 '자본주의 4.0'
요즘 <조선일보>의 화두는 자본주의 4.0이다. 8월 들어 <조선일보> 지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자본주의 4.0이란 말은 영국의 언론인이자 경제평론가인 아나톨리 칼레츠키가 2010년 6월에 낸 <자본주의 4.0: 위기 이후 새로운 경제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연유했다. 이 책 뒷표지를 보면 섬뜩한 이야기가 나온다.
2008년 9월 15일 몰락한 것은 은행이나 금융제도, 혹은 빚더미 신용카드에 올라앉은 집이 아니었다. 그날 붕괴한 것은 정치 철학이고 경제 체제 전체였으며, 세계에 대한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이었다. 이제 문제는 2008년 가을 산산조각난 세계자본주의를 대체할 것이 무엇인가이다.
칼레츠키는 "자본주의가 고정된 제도의 묶음이 아니라, 환경의 변화에 따라 진화하고 적응해온 사회 체제"라면서, 역사를 보면 자본주의가 위기를 통해 재조직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1803년~1815년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 전쟁, 1930년대의 대공황, 1970년대의 경제위기, 2007년~2009년의 금융위기가 대표적이다.
자본주의 제1기, 즉 자본주의 1.0은 나폴레옹에 대한 영국의 승리에서 시작해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에 이어 대공황으로 막을 내리는 '자유방임 자본주의'다. 유럽에서 복지국가가 전성기를 누리고 미국에서도 루즈벨트의 뉴딜과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가 팡파르를 울리던 시기가 자본주의 제2기(2.0)다. 그것의 특징인 '사회 민주주의'와 '복지 자본주의'는 1970년대의 세계적 인플레이션으로 위기에 처한다. 제3기(3.0)는 마가렛 대처와 도날드 레이건의 시장 혁명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였는데, 이것은 2008년 가을 미국의 금융위기로 종을 쳤다.
자본주의 1.0과 자본주의 3.0의 공통점
<자본주의 4.0>에서 칼레츠키가 주장하는 바는 미국발(發) 금융위기로 이전의 세 가지 버전과는 다른 자본주의 체제의 네 번째 버전이 만들어지는 중이라는 점이다. 그는 "순전히 시장의 인센티브로 돌아가는 사회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파국을 맞을 것"이라면서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과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같은 고전에서도 성공적인 자본주의를 위해 정치 제도가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자본주의 3기가 국가와 시장의 분리를 철저히 추진했다면, 자본주의 4기는 국가와 시장이 다시 밀접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는데, "'자유 시장은 자유인을 만든다'는 대처-레이건의 낙관적인 슬로건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노골적인 이해관계, 냉혹한 '현금 계산' 이외에 아무런 끈도 남겨 놓지 않았다. … 자본주의는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를 자신들의 유급 임금 노동자로 바꾸어 버렸다. 자본주의는 가족 관계로부터 그 심금을 울리는 감상적 껍데기를 벗겨 버리고, 그것을 순전한 금전 관계로 되돌려 놓았다.
노동자들의 노동은 기계의 발전과 분업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립적 성격을,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주는 모든 매력을 상실하였다. 노동자들은 가장 간단하고, 가장 단조롭고,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손동작만 요구받는 단순한 기계 부속품이 된다. … 그러므로 노동의 혐오스러움이 증대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임금은 하락한다. … 공장주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가 끝나서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을 현금으로 지불받게 되면, 자본주의의 또 다른 부분들, 즉 집주인, 소매상인, 전당포 영업자 등등이 그에게 달려든다.
위에서 인용한 글은 칼레츠키 것이 아니라,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글에서 '부르주아지'를 '자본주의'로 바꾼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칼레츠키의 개념을 빌리자면 자본주의 1.0에서 살았던 사람들로 자유방임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으로 유명하다. 윗글은 자유방임 자본주의에서 살았던 노동자들의 삶이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는 노동자들의 삶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음을 보여준다. 10.0이나 100.0 버전을 붙이더라도 노동자들의 피땀을 착취해서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이 바뀔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회경제사의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자본주의의 역사는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둘러싼 투쟁의 역사였다. 자본주의 1.0은 자본가들과 국가가 한편이 되어 노동자들을 조져대던 시대였다. 1802년 자본주의 종주국인 영국에서 최초의 노동법이 '공장법'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는데, 이 법은 성인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열 살도 안 되는 아이들의 출근시간을 아침 6시 이후로 하고, 퇴근시간은 저녁 9시 이전으로 하라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격화되면서 노동자들의 봉기가 이어지자 1847년 '10시간 법'으로 불리는 노동법 개정이 이뤄지는데, 핵심 내용은 여성 노동자와 어린이 노동자의 하루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제한하는 것이었다. 성인 남성노동자에 대한 노동시간 규제는 없었다.
칼레츠키의 말장난
물론 이런 체제가 유지될 리 없다. 당연히 혁명과 전쟁으로 온 세계가 도살장과 아수라장이 되었고,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겪으며 사회주의 체제가 지구 인구의 1/3을 석권한 다음에야 유럽에서는 사회 민주주의가 등장하고 미국에서는 복지 자본주의가 등장할 수 있었다. 칼레츠키는 이 시기를 자본주의 2.0이라고 부르지만 1.0이니 2.0은 말장난에 불과하고,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수정 자본주의' 혹은 '혼합 경제'라 부른다. 그 특징은 자본주의 체제를 본원적으로 철폐하지는 않았으나, 사회경제 제도에 국가 주도의 계획과 사회주의 요소를 대폭 가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 흐름에서 당시의 남한도 예외일 수는 없었고 50년대 이승만 정권과 60년대 박정희 정권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가장 대표적인 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김영삼 정부가 없앴는데, 이 시기는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대와 겹친다. 남한 경제가 자본주의 체제였음은 부인할 수 없겠지만, 국가 계획의 사회주의적 요소가 가미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한국은 필리핀처럼 되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한창 위세를 떨치던 무렵 들어선 김대중 정부 시절 앤소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이라는 책이 유행이었다. 이 책의 내용은 당시 집권했던 영국 노동당의 우경화를 합리화시키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국민의 정부'의 정책 기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오늘날 영국이나 유럽에서 '제3의 길' 운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제3의 길'이 막 뜨기 시작할 무렵, 영국인들의 상식은 대처리즘이 나라 경제를 망친 주범이라는 것이었다. 역사의 박물관에 처박힌 대처리즘을 불과 얼마 전까지도 '철의 여인' 운운하며 찬양하던 이들이 자본주의 4.0을 재빠르게 들고 나왔다. 하지만, 나라 안팎에서 '자본주의 4.0' 이론의 생명력은 '제3의 길'보다 길어 보이지 않는다. 별로 새로운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말장난보다 실천
자본주의 4.0 기획을 시작하면서 <조선일보>는 "전문가들은 시장에만 맡기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제안한다"고 썼다. <조선일보>에게는 새로울지 모르지만,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조선일보>가 나라경제 말아먹는다고 비난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가장 대표적인 비판세력이다. 반면 자본주의의 본령인 시장 중심주의로 가야하며, 본질적으로 친재벌적이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조차 사회주의 정부라고 주장한 세력도 있었다. 전경련, 대한상공회의소 등 재계단체가 대표적이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권까지 민주화 이후의 정부들은 일관되게 재계의 목소리에 귀를 더 기울였고, 그 결과가 <조선일보>도 "자본주의의 위기"라고 인정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졌다.
분배와 성장을 대치되는 개념으로 만들어놓은 게 <조선일보>였다. 1등주의 이데올로기를 온 사회에 퍼트려 온 것이 <조선일보>였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지지하면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마음대로 해고‧채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게 <조선일보>였다.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가장 큰 저항세력이었던 노동운동에 대한 저주를 집요하게 퍼부어온 게 <조선일보>였다.
그런 <조선일보>가 '사회 양극화', '비정규직 양산'이 문제라며, 나아가 신자유주의 자체가 문제라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자본주의 4.0'이라는 외국인이 개발한 신조어에 묻어가면서 "따뜻한 자본주의", "승자 독식의 카지노 경제, 피도 눈물도 없는 샤일록 경제는 안 돼" 운운하고 있다. 가소로운 일이다.
위기, <조선일보>식 말장난으로 해결될 수준 넘어
자본주의 4.0을 향한 <조선일보>의 해법은 자본가들이 따뜻해지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이 주도해야 지속 가능하다"면서 시장근본주의의 연성(軟性) 버전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 강경파에서 온건파로 돌아섰다 뿐이지, 그 인식은 위기의 근본인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면에서 내놓는 해법들도 좌충우돌이다.
"자본가들이 따뜻해져야 한다"느니 "존경받는 자본가여야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에 진배없고,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제도 개선과 체제 개혁의 문제를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인격 수양 문제, 자선과 시혜의 문제로 돌려버리는 물타기는 자유방임 자본주의 시절 자본가 무리들이 즐겨 하던 낡은 수법이다.
지금의 위기는 3.0이니 4.0이니 하는 말장난, 그리고 2.0 시대와 3.0 시대에 나온 이야기들을 섞어놓은 수준으로 돌파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것이다. 2008년 가을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시기였음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그러나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분석이 가해져야 한다. 혼돈의 시대에 무엇보다 경계할 일은 병의 원인은 모르면서 병을 고치겠다고 나서는 돌팔이 전문가들이다. <조선일보>도 잘 알고 있겠지만, 오늘날 <조선일보>가 병을 고치겠다고 자문을 받는 전문가들의 대부분이 어제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나팔수였다.
상황은 낙관적인가 비관적인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대가 에릭 홉스봄은 올해 초에 나온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킬 것인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해답이 아니라 문제라는 점을 재발견했다. … (그러나) 체계적인 대안 체제는 수평선 위에 있지 않고, 기존 체제의 해체와 몰락의 가능성은 더 이상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무엇이 일어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아는 쪽은 (좌파든 우파든 아무도) 없다"고 썼다.
분명한 것은 위기들을 겪으면서 '시장'은 21세기에 부딪히고 있는 주요한 문제, 즉 최첨단 기술을 토대로 생산의 불가결한 요소인 인간 노동과 천연 자원을 희생시키면서 지속 불가능한 이윤을 향해 치닫는 경제 성장이 세계적인 부를 만들어내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는 따로든 묶어서든 21세기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할 수 없다. 진지하게 마르크스를 고민할 때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마르크스로부터 나올 것인가. 물론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탁월한 성과를 거뒀지만, 자본주의 이후에 필연적으로 도래한다고 자신이 설파한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 위기의 경제학적 해답은 <자본주의 4.0>의 저자 칼레츠키가 살짝 내비친 아담 스미스나 막스 베버의 지적 전통만으로는 온전한 그림을 그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결국은 마르크스의 지적 전통으로부터 중요한 가닥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이는 바, 그 점에서 '마르크스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왔다'는 홉스봄 책의 마지막 구절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빠르게 산업화하는 '신흥 경제들'에서 제조업 노동이 퇴조할 가능성은 없다. 노동운동이 이미 존속하고 있는 구(舊)자본주의 부자 나라들의 경우, 노동운동이 대부분 공공 부문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기는 하지만, 신자유주의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 자체가 쇠퇴하는 기미는 없다. 마르크스가 예언했듯이, 경제활동인구의 대다수가 임금과 급여에 의존해 살아가고, 이들이 임금 지불자와 임금 수령자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서구의 (노동)운동들은 살아남았다. 따라서 양자 사이에 대립이 일어난다면, 이는 임금 수령자들에 의한 단체행동을 뜻한다. 그러므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힘을 실어주는지 여부를 떠나, 계급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더군다나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계층들 사이의 빈부 격차는, 그 계층들을 '계급'이라고 부르든 말든,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다. 일이백년 전의 사회적 계급‧계층들(social hierarchies)과는 매우 다를지라도, 계급 정치가 부분적일지는 모르지만 정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국민국가가 소멸의 길로 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노동운동은 계속된다. 국가와 여타 공공기관들은 인간적 측면에서 사회적 생산물을 사람들 사이에 분배하고, 시장이 만족시킬 수 없는 인간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역량을 가진 유일한 제도로 남아 있다. 정치는 사회 개선을 위한 투쟁의 필수불가결한 차원으로 남아왔으며, 지금도 역시 그렇다.
<조선일보>는 '따뜻하고 존경받는 자본가'들에게 위기 이후의 해법을 발견한 듯하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 해법은 실현될 수 없는 공상적인 것이다. 대신 필자는 '따뜻하고 존경받는 노동자', 그리고 노동자들을 위한 따뜻함과 존경을 가능케 하는 노동운동의 자기 개혁과 발전에서 위기 이후의 해법을 본다. 자본주의 4.0을 설파하는 <조선일보>의 해법이 맞을지, 노동운동을 강조하는 필자의 해법이 맞을지는 시간이 증명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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