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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은 노동자를 버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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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를 버릴 건가?"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민노당의 조직노동과 거리두기"
민주노동당이 우경화한 시기는 꽤 오래됐다. 우경화를 측정할 수 있는 지표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필자는 당과 조직노동(organized labour), 즉 당과 노동조합운동과의 거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2004년부터 시작된 민주노동당의 우경화

노동조합과 거리를 두었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의 우경화는 2004년 의회에 진출하면서 이미 시작되었다. 학생운동 이후 대학원에서 학위 공부를 한 게 사회 경력의 대부분인 당 연구원들이 한국 사회 10대 문제아에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을 포함시켰다. 이후 당 지도부 선거에서는 '비정규직의 당'을 만들겠다며 민주노총과 거리두기를 내세우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그리고 당시 한국노총 지도부의 잘못된 판단도 한 몫 했겠으나 조직 노동자의 절반을 데리고 있던 한국노총은 민주노동당의 활동 대상에서 사라졌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은 한국노총과는 일면식도 없는 당으로 전락했고, 민주노총과도 점점 멀어져갔다.

진보신당의 딴살림으로 귀결된 2008년 초의 분당 사태도 마찬가지다. 탈당파들이 내세운 이유는 '정파 패권주의'와 '종북주의'였다(조중동은 기다렸다는 듯이 '종북주의'의 카피라이트를 낚아챘다). 하지만, 그 속내는 '대기업 정규직 이기주의'로 비난받던 조직노동이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데 있었고, 표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보이는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으로부터 더 멀어지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민주노총 운동의 상징적 존재였던 단병호 위원장(그는 진보신당에 입당하지 않았다)을 비롯한 여러 노동운동가들이 민주노동당을 탈당해 진보신당에 합류했다. 지금 그 대부분은 진보신당의 중심부에서 밀려나 있다.

우경화의 모멘텀, 이정희 체제

▲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프레시안(여정민)
2008년 분당 사태는 창당과 발전에 헌신해왔던 상당수의 노동운동가들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의 우경화를 심화시켰다. 그 빈자리를 치고 들어온 것이 이정희 대표로 상징되는 현재의 당권파들이다. 이들에게 조직노동은 당의 중심이자 근간이 아니라 당을 구성하는 여러 갈래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물론 조직노동을 싫어하거나 부담을 느끼는 경향은 딴살림을 차린 진보신당 안에서도 주류가 되었다. 교수, 변호사, 전문직, 자영업자, 학생 등 이른바 '강남좌파'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들에게 한국노총은 상종할 가치도 없는 어용노조이고, 민주노총은 '대기업 정규직 이기주의' 운동일 뿐이었다.

당시 진보신당의 일부 이론가들은 민주노총을 분열시켜 제3노총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놨다(종북주의와 마찬가지로 제3노총 아이디어도 조중동 부류들이 잽싸게 가로챘다). 진보신당은 비정규직의 당이라 선언하면서 전국에 비정규센터를 만들자는 이야기도 내놨지만, 한국노총과 민주노총도 못하는 일을 진보신당이 혼자서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진보정당 =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한국 진보정당 운동의 역사는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목표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조봉암의 진보당이 참신한 정강으로 돌풍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 등 대중조직에 기반한 정당은 아니었다. 이는 조봉암 처형 후 진보당이 사멸해버린 주된 이유가 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중의 당, 한겨레민주당, 민중당 등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향한 시도들이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가장 큰 이유도 이 당들이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에 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노총은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막 등장했던 민주노조운동은 민주노총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거창한 강령과 공약을 내세웠지만 직업운동가들과 인텔리들이 주도한 정치 조직들의 한계는 분명했다.

그런 교훈을 딛고 만들어진 것이 민주노동당이었다. 1997년 12월 대선을 맞아 민주노총이 선두에 서고, 민족민주운동 연대체였던 전국연합이 결의하여 '국민승리21'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대통령 후보로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이 나섰다. 이회창을 당선시키는 일등공신이 될 거라는 비난 속에서도 권영길이 얻었던 30만 표(1.2%)는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지는 씨앗이 되었다. 물론 김대중도 대통령이 되어 사상 첫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

2000년 창당 이후 민주노동당은 당원의 40%가 민주노총 조합원이라는 사실을 자랑으로 여겼다. 민주노총으로 상징되는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와 성과를 민주노동당이 정식으로 계승했다는 운동적 자부심과 더불어,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내는 당비와 후원금이 당의 활동을 살찌우는 물질적 근거라는 현실적 계산이 그 배경이었다.

어쨌든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노동자정당으로 탄생한 민주노동당은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모토로 내걸었고, '일하는 사람들'인 생산직노동자, 사무직노동자, 농민과 도시서민 모두를 끌어안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농민운동 조직인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민주노동당 지지와 가입을 결의하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민주노동당 안에는 창당 이후부터 '민주당'으로 가려는 흐름과 '노동당'으로 가려는 두 흐름이 존재해왔다. 2000년부터 2004년 총선까지는 '노동당' 흐름이 주도했던 시기였다. 2004년 총선 이후 '노동당' 흐름이 약화되다가, 2008년 분당 이후 '민주당' 흐름이 주도권을 잡았다.

'조직노동과의 거리두기'

물론 민주노동당에서 분열된 진보신당 역시 '노동당' 흐름이 아닌 '민주당' 흐름이 대세였다. 두 '민주당' 흐름의 차이는 '친NL적 강남좌파'와 '반NL적 강남좌파'의 차이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의 주요 모순에 대한 이해, 북한을 바라보는 태도는 다르지만 '조직노동과의 거리두기'를 밀고 나갔다는 점에서 실천적으로 공통적이었다.

민주노총은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과 2004년 총선 승리의 주인공이었다. 2008년 초 분당 위기에 처한 민주노동당을 구해낸 것도 민주노총이었다.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민주노총은 최고의결기구인 대의원대회의 결의를 통해 민주노동당을 정치적·조직적으로 지지하고 엄호해왔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당'으로 불렸고, 그것은 두 조직 모두에게 훈장(勳章)인 동시에 멍에였다.

민주노동당 당권파가 밀어붙이는 국민참여당과의 합당은 훈장은 돈(표)이 안 되니 던져버리고 멍에(영향력)는 버거우니 벗어버리려는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결론으로 보인다. 이러한 흐름은 민주노총을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민주노동당과 마찬가지로 진보신당도 민주노총의 자식이다. 그 자식이 쓰든지 달든지 그것을 매몰차게 내버리지 않고 한데 모으려했던 민주노총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국민참여당은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한물간 이념적 흐름으로 치부하는 정치세력이다. 안타깝게도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의 합당은 국민참여당이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역사적 의미를 인정하고 그 대의에 복무하려는 쪽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깃발을 내리고 자유주의가 주도하는 '강남좌파'의 흐름에 다가가려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

국민참여당과의 합당을 밀어붙이는 민주노동당의 당권파들은 '노동자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가치를 희생시키더라도 자유주의 세력과 당을 합쳐 당세를 키우고, 이를 바탕으로 반(反)한나라당을 내세우는 보수야당과 연립정부를 세우고, 그 정권에 참여하는 것이 민중의 뜻이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하면서 오는 9월 25일을 그 출발점으로 만들기 위해 분주하다.

그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의 '최대 주주'인 민주노총과의 공식적인 논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민주노총의 공식 의결기구에서 전혀 결정된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 당권파의 흐름을 지지하는 민주노총의 일부 간부들이 두 당의 합당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무책임하게 내면서 민주노총 내부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강기갑, 권영길, 천영세의 호소

민주노동당 우경화의 주체적 원인은 조직노동의 침체에 있다. 침체의 증거로는 21세기 들어 10% 안팎에 머물고 있는 노동조합 조직률이 대표적이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각각 그 10%의 절반씩을 차지하고 있다. 2000년 창당 이후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이 대표하는 5%도 안 되는 조직노동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민주노총 조합원이 민주노동당 당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4년 총선의 40%를 정점으로 점점 줄어들었다. 조합원 당원의 상당수는 실제 정당 활동을 하지 않고 있으며, 민주노동당의 각급 의사결정구조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못하다. 당 안팎에서 나타나는 조직노동의 취약함은 민주노동당이 우경화하고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포기하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초대 민주노총 위원장이자 초대 민주노동당 당대표인 권영길, 민주노조운동과 민족민주운동의 '지도위원' 천영세, 농민 정치세력화의 상징인 강기갑. 세 사람의 전직 민주노동당 대표들이 "참여당과의 통합은 진보정치의 반쪽을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관련 기사 : 민노당 권영길·강기갑·천영세 "참여당과 통합반대")

세 명의 전직 대표들은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 전농, 빈민단체 등 대중운동을 기반으로 성장해온 정당입니다. 노동자 민중을 대변할 정당,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대중적 요구에 의해 건설된 것이 민주노동당입니다. 우리는 진보정치 역사의 역동적인 개척자입니다. 1997년 정치세력화를 추진했던 최초의 합의와 공감, 그 근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정신은 진보진영의 대통합과 민중의 정치세력화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004년 총선의 영광과 2008년 분당의 고통, 그 모든 역사의 교훈이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라고 호소했다.

우경화의 기로, 9월 25일 민노당 당대회

오는 9월 25일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이 승인된다면 이는 "1997년 정치세력화 시작의 합의와 공감, 그리고 그 근간"인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그 경로를 이탈했음을 뜻한다. 그 결과는 노동자·민중의 정치가 거세당하고 기회주의적인 정치엘리트들이 판치는 미국 민주당 노선으로의 급격한 쏠림이 될 것이다.

9월 25일 민주노동당 당대회가 1987년 6월항쟁 이후, 길게는 1960년 4월혁명 이후,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달려온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흐름에 결정적 일격을 가하는 대회가 될 지, 아니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처지에 몰린 "1997년 정치세력화를 추진했던 최초의 합의와 공감, 그 근간"을 되살리는 대회가 될 지는 민주노동당 대의원들의 어깨에 달려있다.

▲ 민주노총 노동자대회. ⓒ프레시안(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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