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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의 배신, 가족의 외면…얻은 건 직업병과 빚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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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동료의 배신, 가족의 외면…얻은 건 직업병과 빚더미

[현장] 한진중공업 노사합의 1년, 그동안 무슨 일이

일 년 만에 다시 찾은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에는 각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담장 안에는 파란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산 자'로 남아 자리를 지켰다. 담장 밖 천막은 평상복을 입은 해고자가 지켰다. 정문을 사이에 두고 파란 작업복과 평상복은 서로 침묵을 지켰다.

정문 앞에는 "회사와 하나되어"라는 문구가 있었다. 새로 들어선 복수노조가 걸어놓은 현수막이었다.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것도 있었다. 지난해 1년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농성했던 85호 크레인은 철거되고 없었다.

▲ 기존 노조인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의 천막농성장과 새 노조인 한진중공업노조의 현수막. ⓒ프레시안(김윤나영)

정리해고 1년, 남은 건 직업병과 빚 2000만 원

지난 8일 평상복을 입고 한진중공업 정문 앞 천막농성장을 찾은 김종구(가명·55) 씨는 정리해고자 94명 중 하나다.

한진중공업에서 27년 청춘을 바친 끝에 김 씨가 얻은 것은 직업병인 난청과 해고 통보였다. 해고 후 스트레스성 종양까지 생겨서 양쪽 귀에 감각을 잃었지만 그는 일을 놓을 수는 없다. 아들 대학 등록금을 벌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재취업은 '한진 해고자 출신'이라 안 된다고 했다. 지난 1년간 대리운전, 건설 일용직을 전전했다. 한 달에 100만 원 벌기가 빠듯했다. 남은 것은 빚 2000만 원. 아들 손에 등록금을 쥐어줄 수 없었다.

교사가 꿈인 작은아들은 올해 휴학하고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장가 보내야 한다던 큰아들은 호텔 아르바이트에 나섰다. 아내는 이혼하자고 했다. 일용직마저 끊긴 날 그는 불안한 마음을 술로 달랬다.

"27년 회사생활, 이것도 인맥이라고 쌓아왔는데…"

김 씨는 오는 11월 10일 복직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세상"이라고 했다. 그는 똑똑히 기억한다. 2003년 김주익 전 지회장이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도, 회사는 노조에 "임의적인 구조조정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몇 년 만에 뒤집어졌다.

지난해 흑자를 내 174억 원의 주주배당 잔치를 하고 '경영이 어려워서' 170명을 해고한 회사는, 그가 보기에 영도 조선소를 접고 필리핀으로 옮기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복직하더라도 언제 휴직발령이 날지, 들어가 입사 1년은 버틸 수 있을지 불안하다. 몇 년 안에 그를 포함한 공장 안 모두에게 또 다시 해고의 칼날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김 씨는 복수노조에 가입한 옛 동료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현장의 동료들은 해고자인 그에게 등을 돌렸다. 회사가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놨지만, 수십 년 묵은 친분까지 갈라놓을 줄은 몰랐다.

"몇 십 년씩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현장에 있는 친했던 사람들이 전화하면 '미안해' 한 마디 하고 연락도 끊고 만나기도 꺼립니다. 27년을 한 회사에 다니면서 이것도 인맥이라고 쌓아왔는데…."

"공장 복귀한 노동자 중 금속노조 조합원은 3명"

한진중공업에 복수노조가 들어선 것은 지난 1월. 당시 현장에는 "복수노조에 가입하면 생활안정지원금 대출 1000만 원을 받을 수 있지만, 금속노조에 남아 있으면 못 받는다.", "복수노조에 가입하면 강제 휴업도 안 보내고 보내도 빨리 복귀시킨다"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새 노조에 가입한 동료들의 연락이 하나둘 끊기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새 노조는 들어선 지 일주일 만에 비해고자 700여 명 가운데 80%가 넘는 570여 명을 조합원으로 확보했다. 정리해고에 맞섰던 기존 금속노조 조합원은 130여 명으로 줄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휴업자 300여 명도 새 노조에 가입했다.

지난 1월에 회사에서 퇴근 준비하다가 뇌질환으로 쓰러진 최 모 조합원과 지난달 술을 마시고 계단에서 넘어져서 혼수상태에 빠진 김 모 조합원도 새 노조에 가입했다. 혼수상태인 남편 대신 아내가 노조 가입서에 도장을 찍었다.

천막농성장에 남은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들은 "회사가 금속노조 조합원인 휴업자를 차별 복직시켰다"고 토로했다. 공장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 270여 명 가운데 기존 노조인 금속노조 소속은 단 3명에 불과했다.

지난해 '희망버스' 행사 이후로 기존 노조와 회사의 갈등은 깊어졌다. 교섭은 지지부진했다. 한진중공업지회가 올해 교섭에서 158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철회하라고 요구했을 때 "2011년에 대한 회장님 한을 풀어줘야 한다"면서 거절하던 회사였다.

기존 노조가 3년 동안 타결하지 못한 임금단체교섭은 올해 들어 20일 만에 속전속결로 타결됐다. 회사는 기존 노조의 대표 교섭권이 끝난 후인 지난 9월 26일 새 노조와 교섭을 끝냈다. 기본급이 15% 올랐다. 새 노조는 '무파업 선언'을 했다. 올해 11월 10일까지 복직하기로 약속한 정리해고자 93명과 휴업자 500여 명의 업무 복귀 일정은 밝히지 않은 채였다.

ⓒ프레시안(김윤나영)

산 자, 기다리는 자, 죽은 자

한진중공업에서 15년 동안 일하다 해고된 송인호(가명·47) 씨는 "업무에 복귀해도 휴업자가 될 것 같다"고 우려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진중공업도 '제 2의 쌍용자동차'가 되리라는 불안도 있었다. 송 씨는 "멀쩡하게 산행하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분이 있다. 그렇게 돌아가신 분이 두 명"이라며 "다만 회사 안에서 안 죽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해고자인 조명철(가명·38) 씨는 "예전에는 같은 사원아파트에 살면서 호형호제했지만, 우리는 해고자가 되고 동료들은 복수노조로 떠나가니 가슴에 대못이 박힌다"며 "옛 동료를 보기 힘들어서 대인기피증이 생긴 사람들이 많다"고 거들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회사 근처에 오기도 싫고, 죽거나 죽이고 싶고, 누군가를 만나기도 두려워한다"고 했다.

현장에 남아 있는 '산 자'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한상철 한진중공업지회 부지회장은 "공장은 감방보다 더하다"며 "불합리한 작업지시에도 말 한마디 못하고, 다치면 산재는커녕 하소연할 데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식사하거나 퇴근할 때도 관리자들이 작업장을 이탈하지 못하게 감시한다"며 "말 안 들으면 휴업 보낸다, 선수 교체한다고 협박한다"고 덧붙였다.

사측 "정리해고자 93명, 재취업 시 휴업자 될 수 있어"

한진중공업 관계자는 "해고자 재입사 일정에 대해서는 곧 노조와 합의가 나올 것이고 국회 권고안대로 복직될 것"이라면서도 "일이 없으면 재취업한 뒤에 해고자가 휴업자가 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장기 휴업자 복귀에 대해서는 "노사가 노력했지만 조선 경기가 어려워서 수주를 하나도 못했다"며 "일이 있으면 (휴업자를) 부르기도 하고 안 부르기도 해서 얼마나 복귀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한 "금속노조 조합원이라고 해서 복귀에 차별대우를 한 적은 없다"며 한진중공업지회에 청구한 158억 원 손해배상은 철회할 계획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새 노조인 한진중공업노조 관계자는 "노조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는 만큼 해고자도 조합원으로 받을 수 있다"면서도 "다만 들어와서 노조를 와해시키면 안 되기 때문에 새 노조에 가입하려면 검증 절차가 필요하다. 휴업자를 포함해 지금까지 노조에 가입한 모든 사람이 검증 절차를 거쳐왔다"고 말했다.

이재용 한진중공업 사장의 국정감사 출석을 일주일 앞뒀지만, 산 자와 죽은 자, 기다리는 자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휴업자인 조동기(가명·41) 씨가 침묵 끝에 말했다. "우린 바라는 거 없습니다. 동생, 형님, 친구야랑 옛날처럼 웃으면서 일하는 게 바람입니다."

조 씨의 말이 끝나자 또 다시 우울한 침묵이 흘렀다. 산 자와 죽은 자, 기다리는 자가 모인 124일째 한진중공업 농성장의 밤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제2의 쌍용차…가정은 무너지고 마음은 만신창이

정리해고 사태 1년이 지난 한진중공업은 '쌍용자동차'와 판박이였다. 일용직을 전전하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다.

돈은 없고, 빚은 늘었다. 몸과 마음의 병을 얻었다. 가족, 동료, 주변 사람들에게 고립됐다. 실직해도 사회안전망은 없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괴로워서 회사 근처에 오기도 싫고, 죽거나 죽이고 싶고, 누군가를 만나기도 두려워하는" 이유다.

한진중공업에서 31년 동안 일했다가 정리해고된 고진수(가명) 씨는 우울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이번이 두 번째다.

고 씨는 2003년 김주익 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지회장이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85호 크레인에 올라갔을 때 129일 동안 그에게 밥을 지어 올려 보냈다. 김 전 지회장이 크레인에서 스스로 목을 매 목숨을 끊자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병원을 찾았다.

8년 뒤 회사가 다시 정리해고를 발표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똑같은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지난 6월부터 그는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그가 힘없이 말했다. "아픈 곳 또 찌르네. 돈도, 마음도, 인간관계도 그렇고. 안 힘든 곳이 없죠."

김종구 씨도 정리해고를 받아들이기 않았다는 이유로 혼자가 됐다. 동료와의 연락이 끊겼고, 가족들에게 외면받았다. 아들의 말은 비수가 됐다. "아버지가 뭐 할라고 데모하노?" 이혼하자는 아내를 붙잡기도 그는 미안하다. 그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도 혀를 찼다. "오죽 못났으면 해고됐나."

김 씨는 자식들에게 아버지로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끝까지 남기로 했지만, 무너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늘었고, 술을 마시는 날이 잦아졌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심리치유모임인 '와락'의 권지영 대표는 "정리해고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은 폭력적으로 노조가 깨지는 경험, 사회의 냉대, 관계의 단절, 동료에 대한 배신감 등을 동시에 폭격 받는다"며 "한진중공업에서도 지지받고 위안 받는 느낌을 받지 않아 조합원들이 고립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 대표는 "가족이 해체되고 가부장이 무너지면서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는 만큼 정리해고는 단위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라며 "정부와 지역사회가 동료 관계가 깨진 노동자들에게 상담을 하는 한편, 해고자들이 초기에 건강한 일상을 찾을 수 있도록 사회안전망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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