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sterity: At Whose Cost?)
오늘날 세계 어디에서나 긴축은 시대적 요구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 브라질, 중동 산유국들, 그리고 기타 몇몇 국가들은 당장은 예외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예외일 뿐이며, 오늘날 긴축은 세계체제 전반에 대해 요구되고 있다. 부분적으로 이 요구는 완전히 가짜다. 부분적으로 이 요구는 실제 경제 문제를 반영한다. 핵심 문제는 무엇인가?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엄청난 낭비 성향은 세계체제가 지금까지 지속해왔던 세계적 소비 수준을 지속할 능력을 위협할 정도가 됐다. 특히 절대적 소비 수준이 꾸준하게 상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우리의 생산과 투기 행위의 기본이 된 소비지상주의를 감안하면 우리는 확실히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기본 요소를 고갈시키고 있다.
▲ 15일(현지시간) 포르투갈에서 열린 긴축반대 시위 모습. ⓒAP=연합뉴스 |
한편으로 우리는 세계적 차원에서의 소비가 국가 간, 그리고 국가 내부에서 매우 불균형하게 이뤄진다는 점을 안다. 게다가 현재 (불균형한 소비의) 수혜자와 피해자 간의 격차가 계속 커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의 세계체제에서 경제적뿐만 아니라 정치적·문화적으로도 근본적인 양극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이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기후변화와 그 결과, 식량 및 물 부족과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를 뚜렷이 인식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소비지상주의(consumerism)에서 벗어나 문명가치(civilizational value)의 전환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극화가 초래할) 정치적 결과는 몇몇 거대 자본가들에게 확실히 큰 우려사항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이 더 이상 지지받지 못할 것임을 깨닫고 있고, 그럼으로써 (이제까지 자신들이 누려왔던) 자원과 부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길 수 있는 상황에 직면했다. 현재의 긴축 요구는 세계체제에 가해진 구조적 위기의 파고를 저지하려는, 일종의 최후의 시도다.
지금 시행되고 있는 긴축은 전 세계 사람들 중 경제적으로 취약한 부류에 가해지는 긴축이다. 정부는 자신들이 파산하는 것을 막고 (특히 비단 메가 뱅크(mega bank)뿐 아니라) 메가 기업(mega corporation)들이 자신들의 지독한 어리석음과 자초한 손해에 대한 대가(잃어버린 수익)를 치르는 것을 막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들이 이를 시도하는 방식은 실업, 중증질환, 주택압류, 그리고 사람들과 그 가족이 정기적으로 마주하는 모든 문제로부터 개인을 구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형성된 안전망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다면) 근본적으로 줄이는 것이다.
(긴축의) 단기적 장점을 찾는 이들은 주식시장에서 지속적이고 빠른 거래를 계속한다. 그러나 중기적으로 이는 판매 중인 상품의 구매자를 찾는 능력에 의존하는 게임이다. 유효수요는 꾸준히 사라지고 있다. 안전망의 감소와, 이보다 더한 긴축이 오고 있다는 거대한 공포 때문이다.
긴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제 고비를 넘기고 있다거나 또는 곧 고비를 넘길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활기를 되찾은 번영이 곧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이 가공된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활기를 되찾는다는 약속은 항상 미미했고, 뒤로 밀리게 된다.
사회민주주주의적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긴축 대신에 우리는 정부지출을 늘리고 부자들에게 과세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사 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하다 해도 효험이 있을까? 긴축 지지자들의 주장 하나는 타당하다. 더 많은 이들이 더 많이 소비하길 원한다고 정치적 요구를 하는 상황에서 모두가 바라는 소비수준을 지탱할 지원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필자가 말했던 예외가 등장한다. 이들 국가들은 현재 소비를 많이 하는 이들을 늘리고 있지, 단순히 이들 소비자들의 지리적 위치를 전환하는 게 아니다. '예외'인 국가들은 그럼으로써 경제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키우고 있다. 이 구조적 위기에 관련된 실제적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비자본주의적, 권위주의 세계체제가 세워져 지금의 '시장'보다 더 힘과 기만술을 사용해 기본적인 소비의 불평등한 분배를 허용하고 늘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문명가치를 바꾸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민주적이고 평등한 역사적 시스템에서 사는 것을 현실화하려는 우리에게는 '성장'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에서 '부엔 비비르'(buen vivir, good life)라 부르는 것이 필요하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실제 생존하는 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들이 동등한 수준으로 살 가능성을 비축하기 위해 전 세계의 자원을 어떻게 할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성적 토론에 관여하는 것이다.
이는 전 세계 사람들 중 일부에게 자신의 아이들이 덜 '소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다 더 '소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런 시스템에서 우리는 모두 그런 시스템이 가능케 하는 사회적 주권에 의해 보장되는 삶의 '안전망'을 가질 수 있다.
앞으로 20~40년 동안 거대한 정치적 싸움이 예상된다. (시스템으로서 모든 가능성을 고갈시킨) 자본주의의 생존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자본주의의 대체물로 '선택'할 시스템에 대한 싸움이다. 계속되는(그리고 확장되는) 양극화를 지속시킬 권위주의 모델인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민주적이고 평등한 시스템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 <월러스틴의 '논평'>은 세계체제론의 석학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가 매달 1일과 15일 발표하는 국제문제 칼럼을 전문번역한 것입니다. <프레시안>은 세계적인 학자들의 글을 배급하는 <에이전스글로벌>과 협약을 맺고 월러스틴 교수의 칼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 * 저작권 관련 알림: 이 글의 저작권은 이매뉴얼 월러스틴에게 있으며, 배포권은 <에이전스 글로벌>에 있습니다. 번역과 비영리사이트 게재 등에 필요한 권리와 승인을 받으려면 [email protected]으로 연락하십시오. 승인을 받으면 다운로드하거나 전자 문서로 전달하거나 이메일로 보낼 수 있습니다. 단 글을 수정해서는 안 되며 저작권 표시를 해야 합니다. 저자의 연락처는 [email protected]입니다. 월러스틴은 매월 2회 발행되는 논평을 통해 당대의 국제 문제를 단기적인 시각이 아닌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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