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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인보다 못난 한국의 민영화 카르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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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인보다 못난 한국의 민영화 카르텔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5> 부실한 4대강 보와 2000년 된 로마 가도, 차이는?
로마의 오후 햇살이 달리는 버스에서 맞는 바람과 적당히 섞여 있는 시공간은 초콜릿과 바닐라가 혼합된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했다. 버스는 고대 아피아가도를 뜻하는 'APPIA ANTICA'라고 적혀 있는 도로 안내 표지판을 따라 달렸다. 왕복 이차선 정도의 폭을 갖고 있는 2300년이 넘는 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다녔던 원형이 살아있는 도로 중에 가장 오래된 길이 몇 년쯤 되었을까 생각해봤다. 기껏해야 100년 안쪽이었던 것 같은데, 아피아 가도의 연륜에 '쨉'이 안 된다. 굳이 비교하자면 길은 아니지만 만리장성이 만들어진 시기가 기원전 3세기로, 로마의 가도와 동시대에 만들어졌다. 베이징 외곽의 산악지대를 타고 넘어 이어지는 장성을 바라보며 느꼈던 웅장함과는 또 다른 신기함과 경외감을 느꼈다. 버스가 고대 로마시의 경계를 나타냈을 성곽을 벗어나자 한적한 시골 길이 나왔다. 투어버스가 정류장에 설 때마다 관광객들이 올라탔고 버스는 제법 승객들로 채워졌다. 완전 인기 없는 코스는 아니었다. (☞ 이전 편 바로 가기 : 로마의 '삽질 군대', 위대한 길을 만들다)

▲ 로마의 아피아 가도를 알리는 도로 표지판 ⓒ박흥수

고대 로마 가도의 폭은 6미터에서 10미터에 이른다. 일부 학자들은 프랑스나 한국의 고속철도 차량인 TGV(KTX)의 폭이 2.9미터이므로 로마의 가도와 복선 고속철도 노선의 폭은 거의 일치하는 구조라고 말하기도 한다. 산업혁명 시기 영국 철도를 소개할 때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렇게 폭이 일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기차의 바퀴 간격을 마차로부터 빌려 왔기 때문이다.

2000년을 이어온 '혁명적'인 로마 가도

아피아 가도는 폭 4미터 이상의 마차 전용 길을 깔고, 이 바깥에 배수로를 파서 도로 파괴의 가장 큰 적인 물이 빠져나가도록 만들어졌다. 배수로 옆에는 다시 인도를 깔아 걸어서 이동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 인도는 도보 여행을 하는 민간인 전용 도로이기도 했다. 로마의 중무장 군단병이 중앙 도로를 이용해 행군할 때 맞닥뜨리는 사람들은 양옆의 인도를 이용해서 길을 막는 일이 없도록 했다. 로마의 가도들이 일상에서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됐는지를 알려주는 것은 카이사르가 교통 체증에 대응한 법을 제정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카이사르가 집권한 기원전 1세기 중엽의 로마는 서구 세계의 중심이었다. 아마도 지금의 뉴욕이나 런던, 파리 같은 분위기를 풍겼을 것이다. 막 북아프리카나 루비콘 강 건너 북이탈리아 전선에서 돌아온 군인들, 지중해를 건너 로마로 들어온 아프리카인들, 마케도니아, 그리스, 비잔티움(이스탄불), 중동에서 온 방문객들과 상인들이 가도를 이용해 한데 모여들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도로에 체증이 생기고 교통사고 사상자도 늘어났다.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교통법'을 만들어 일출부터 일몰 때까지 공공 목적이 아닌 마차나 수레의 로마 진입을 금지했다. 이 법이 시행되자 로마 시내는 교통지옥에서 해방되고 제대로 걸어 다닐 수 있는 도시가 되었다. 성곽 밖에서 해가 지기만을 기다렸다가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사라진 후 일제히 로마 시내로 쇄도하는 수많은 마차와 수레들의 모습은 새로운 교통법이 만들어낸 진기한 풍경이었다.

해 질 녘 로마 시내로 앞다투어 들어오는 마차 바퀴들의 굉음은 도로 주변 주민의 원성이 자자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로마 시내에서는 걸어 다녀야 한다는 율리우스 교통법에 따라 카이사르도 걸어 다녔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던 날 부르투스로 알려진 칼을 품은 암살자는 걸어가는 카이사르를 뒤따르며 적당한 살해 시점을 노렸다고 한다. 한국처럼 권력을 갖고 있거나 법을 만드는 사람들만큼은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관행이 카이사르 시대에 있었다면 카이사르가 조금 더 오래 살았을지도 모른다.

▲ 아피아 가도변의 주택. 고대의 도로변에 수 천 년을 이어 사람이 살고 있다. ⓒ박흥수

고대 로마 가도는 지표면에서 1-1.5m 깊이로 파 내려가서 길을 평탄하게 한 후 자갈을 까는 1단계 시공을 한다. 최하층 구조다. 이 위에 돌과 자갈과 점토를 섞어서 깔고, 이 위에 다시 잘게 부슨 돌멩이를 아치형으로 깐다. 잘게 부순 돌멩이들은 철도에서 선로의 안전성을 강화하기 위해 자갈을 깐 것처럼 가도가 받는 압력을 지탱해 주는 완충 역할을 맡았다. 아치형의 설계는 비가 오면 도로 양옆으로 자연 배수가 되도록 한 것이다. 마지막 최상층에는 사방 70cm로 두껍게 자른 돌을 빈틈없이 붙여 완벽한 포장도로가 되게 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로마의 가도들은 전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가능하게 했다.

"로마 가도가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그로부터 2000년 뒤에 태어난 현대인이 상상하려면 고속철도를 떠올리는 것이 가장 간단할 것이다."<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0권>

로마 가도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세계 각지의 물리적 거리를 고속철도처럼 대폭 단축시켰다. 게다가 비만 오면 움직일 수 없는 조건에서 주·야간을 불문하고 언제든지 전천후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2000년 전의 과학 기술과 사회 발전 정도를 따져볼 때 그야말로 혁명적인 일이었다.

현대 철도에서도 쓰이는 기원 전 이정표

물질적 토대가 정치적, 법률적 구조를 생성해내듯이 기원전 120년경에 드디어 인류사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셈프로니우스 도로법'이라는 -'율리우스 도로법'보다 훨씬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본격적인 도로교통법이 만들어진다. 이 법에 따라 로마 가도에는 마일스톤, 즉 구간 이정표가 생긴다. 1로마 마일인 1밀리아레는 1.4-1.5km 정도의 거리인데 이 1밀리아레마다 사람의 키 높이 정도 높이에 지름 30cm의 기둥 모양 이정표를 세웠다.

▲ 왼쪽의 화단처럼 보이는 것이 아피아 가도의 이정표 기둥이다. 달리는 버스에서 순간적으로 찍었다. ⓒ박흥수

이정표가 세워지자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정도 거리를 지나왔는지 쉽게 알 수 있었고 방문하고자 하는 사람의 집을 찾기도 쉬워졌다. 한국에선 뒤늦게 기존 방식을 대체하고 있는 도로명 주소 방식이 이때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아피아 가도의 로마 기점 20번째 이정표 옆에 있는 붉은 흙벽 집이라고 알려주면 택배 기사는 마차를 타고 로마 시내에서 30km 정도 외곽에 사는 수취인을 찾을 수 있었다.

철도 노선에도 이 같은 이정표가 있다. '키로 정표'라고 불리는데 200m마다 철도 선로 옆에 세워져 있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경부선 전철을 이용해서 수원이나 천안을 여행할 때 창밖으로 선로의 가장자리를 보시라. 파란 바탕에 흰색이나 노란 바탕에 검은색으로 쇠로 된 직사각형 판에 숫자가 쓰여 있는데, 서울역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지를 나타내는 이정표다. 파란 바탕 위에 쓰여 있는 숫자는 1000m 단위의 킬로미터를 나타내고 노란 바탕에 나타난 숫자는 200m 단위의 숫자이다. 키로 정표들은 경부선을 포함한 모든 노선의 시발역이 되는 중심역에서 시작되어 선로를 따라 나란히 서 있다.

▲ 천안역 경부선 상행선 승강장 끝에서 보이는 철도 '키로 정표'. 서울역까지는 정확히 96.8km다. ⓒ박흥수

이 키로 정표는 열차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된다. 기관사가 열차를 운행하다가 특정 선로에서 평소와 다른 진동이나 충격을 받았을 때는 바로 인근 역에 무전 연락을 한 후 이 키로 정표를 기준으로 위치를 알려주고 점검이나 보수를 의뢰한다. 또는 사고가 나거나 응급 환자가 발생했을 때 신속한 대처를 위해서도 요긴하게 쓰인다. 예를 들면 "수원-병점 사이 서울기점 경부 하1선 00키로 00미터에 정차해 있습니다"라고 무전을 하면 역이나 관제실에서 구급 요원이나 긴급 조치반을 파견할 때에도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로마의 기동력을 뒷받침한 역참제도

카이사르처럼 고대 로마를 대표하는 사람이 있을까? 정치인이자 뛰어난 군인이면서 작가로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글을 남겼다. 그가 남긴 저작 중의 하나인 <갈리아 원정기>에는 그가 병사들을 이끌고 어떤 전술을 수행했는지 자세히 나온다. 그중에서도 기습공격과 위험에 빠진 부대를 지원하는 데 이용한 그의 장기는 전광석화 같은 기동력이었다. 긴급한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하루 100km를 달렸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병사들의 하루 행군 속도가 20km가 안 되는 것을 고려하면 100km의 이동거리는 적의 예측을 빗나가게 하기에 충분했다.

군대의 성공적인 작전을 위해서도 신속한 정보 공유가 필수적인데 가도를 통해 일찍부터 발달한 역참제도가 이를 가능케 했다. 로마사에 대한 독보적인 저술인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도 로마 황제들이 넓은 제국을 수월하게 통치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들의 통치 이념과 정치적 명령을 제국 전체에 신속히 전달하도록 한 우편제도 덕분이라고 말했다.

이런 신속한 이동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곳곳에 지친 말을 교체할 수 있는 스타티오네스(stationes)라는 말 보급소를 두었기 때문이다. 로마 전 가도에 걸쳐 4-5마일 간격으로 세워진 역참에는 40마리의 말들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말들은 황제의 명령을 전하는 사신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이 사신들은 조선 시대의 암행어사처럼 마패와 비슷한 것들을 소지하지 않았을까? 영어의 기차역을 뜻하는 스테이션(station)은 이 스타티오네스에서 비롯됐다.

아피아 가도와 검투사 스파르타쿠스, 반란 노예들

수 천 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아피아 가도에는 영광의 역사도 있지만 피로 얼룩진 역사도 있다. 아피아 가도는 유명한 노예 반란 사건인 스파르타쿠스 항쟁의 주요 무대이기도 했다. 기원전 73년 발칸반도 남동부 트라키아 출신의 노예였던 스파르타쿠스는 이탈리아 남부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 소속 검투사 준비생이었다. 정식 글래디에이터로 데뷔하기 위해 여러 가지 규정 과목들을 이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훈련소의 악질적인 소장부터 복리, 후생이랄 것도 없는 처참한 대우에 교관들의 비인간적인 처우는 예비 검투사들의 가슴에 분노를 차곡차곡 쌓게 했다.

이 시기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 이후 카르타고를 얻은 자신감으로 1세기에 걸쳐 국격이 상승하고 경제도 활성화되었지만 안으로는 썩고 있었다. 지역 속주의 학정에 반란을 일으키거나 악질적인 군단 사령관에 반기를 들고 군을 탈영해 아예 원래의 로마 군단을 물리치고 지역의 속주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무단 정치의 폐해들이 나타났고 반란이 일어났다. 이런 불길들이 결국은 이탈리아 본토로 옮겨붙었는데 그곳이 카푸아에 있는 검투사 양성 학교였다.

정식 검투사가 되어도 소속사를 옮겨 다니며 높은 수익을 보장받는 게 아니라 로마 시민의 예능감을 피로 충족시켜야 했던 스파르타쿠스와 77명의 동료 예비 글래디에이터들은 반란의 횃불을 들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밝힌 스파르타쿠스는 노예이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위대한 정신과 튼튼한 신체를 가졌고, 신분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똑똑한 교양인이었으며 트라키아인보다는 그리스인에 가까웠다고 한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했지만 문화와 예술적으로는 정복당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그리스 출신 노예들은 로마의 고위층 집에 입주해 주인이나 그 자식들의 가정교사로 철학과 역사, 천문, 수학, 예술 등을 가르쳤다. 스파르타쿠스가 그리스인에 가까웠다는 것은 노예 신분을 뛰어넘는 비밀을 간직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단순한 봉기로는 3년여에 걸쳐 이탈리아 전체를 공포에 떨게 할 수 있는 반란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와 동료들은 양성소 교관들을 단숨에 처치하고 험준한 베수비오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항쟁을 벌인다. 로마 당국은 이들의 반란을 과소평가하고 정규 군단을 보내는 대신 지역에서 모집한 3000명의 예비군을 토벌대로 투입했다가 스파르타쿠스의 부대에 참혹하게 격퇴당한다.

요즘 유행하는 이종격투기 대회에 출전해도 하나도 '꿀릴 게' 없는 인간 병기들인 스파르타쿠스 부대의 위력은 상당했다. 검투사들은 창이나 칼을 다루는 개인 전술만이 아니라 집단적인 전투에도 능했다.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맹수들을 사냥하는 장면을 리얼 버라이어티로 재현해야 하는 노예들의 전공 필수 과정 덕분이었다. 고대 로마에서 펼쳐진 예능의 규모와 리얼리티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를 뛰어넘고 있다. 원형 경기장에 물을 채우고 사람이 실제로 불화살이나 갈고리에 맞아 죽는 해전을 재현할 정도이니 태양의 서커스나 평양의 능라도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아리랑 같은 공연도 고대 로마의 공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밥 먹고 싸우는 것만 연습한 이들에게 군기 빠진 예비군들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스파르타쿠스의 승리 소식은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 노예들에게도 전해져 노예들의 탈출 러시가 이루어지고, 베수비오 산은 수호지의 양산박처럼 각지에서 로마에 대항해 싸우러 몰려온 반란군의 본산이 되었다. 스파르타쿠스는 동료 노예들의 심금을 울리는 뛰어난 연설로 유명한데 단지 말을 잘했다기보다는 누구보다도 노예들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대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탈리아 전역에 반란의 회오리를 몰아붙였던 스파르타쿠스 군은 처음의 78명에서 7만 명에 이르는 대부대로 발전한다.

3년여에 걸쳐 로마의 정규 군단을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리면서 남부 지역 일대에 광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반란군은 기원전 71년 로마군 총사령관 크라수스가 이끄는 8개 군단에 이르는 압도적 병력의 로마 정규군에 의한 토벌 작전에 소탕된다. 이때 6000명의 노예 반란군이 포로로 잡혔는데 진압군 대장 크라수스는 로마에서 처음 반란이 시작됐던 카푸아까지 이어지는 아피아 가도의 양옆에 십자가를 세우고 처형을 집행했다. 반란 노예들이 못 박혀 매달린 십자가들이 아피아 가도를 따라 일정 간격을 두고 이어졌다. 노예들의 시체 행렬이 아피아 가도의 이정표를 대신했다. 이렇게 역사 속에 소멸했던 스파르타쿠스단은 수십 세기가 지나서야 베를린과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서 부활한다. 1919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베를린 봉기와 1923년 12월 일제 식민지 치하의 경성에서 '조선 스파르타쿠스당'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며 아피아 가도에 못 박혔던 저항 정신의 봉인을 다시 풀었다.

▲ 이탈리아 남부를 향해 뻗은 아피아 가도. 반란 노예들의 십자가 형이 집행되었던 사형장이기도 하다. ⓒ박흥수

아피아 가도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어느새 버스는 처음 출발지로 돌아와 있었다. 만약 다시 로마에 올 기회가 있다면 천천히 중간 중간 내려서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그런 날이 오게 될지….

2000년 전 고대인보다 못한 한국의 '민영화 카르텔'

버스에서 내려 가까이에 있는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을 기념해 만든 공화국 광장 앞의 노천카페를 찾아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키고 숨을 골랐다. 맞은 편 테이블에는 패션모델이라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젊은 아가씨들이 모여서 신 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옆에는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가 석양의 그림자를 즐기다 동양의 젊은이와 눈이 마주치자 가벼운 웃음을 건넨다. 한 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답게 이탈리아는 유럽의 다른 나라보다 이방인에게 편한 느낌을 준다. 에스프레소를 비우고 어둠이 깃든 거리의 중고 책 노점들을 지나 테르미니역을 향해 걸었다. 새벽부터 긴 하루였고 아직 보내야 할 밤 시간이 남아있는 힘겨운 로마에서의 첫날이었다.

▲ 로마 공화국 광장 앞의 노천카페 ⓒ박흥수
▲ 로마 공화국 광장 근처의 중고 책 노점 거리 ⓒ박흥수

로마의 가도들은 튼튼하게 지어지기도 했지만, 유지 보수에도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수 천 년을 이어 보존될 수 있었다. 각 가도마다 '쿠라토르 비아룸'이라는 공적 직책으로 가도를 관리하는 책임자를 두었다. 로마가 가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만큼 쿠라토르들은 고위직 공무원들로 채워졌다. 로마 가도들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6세기에 이탈리아를 찾은 사절단이 아피아 가도를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착공된 지 800년이나 된 도로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한강의 다리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고 4대강 유역의 보 밑에서 시멘트 덩어리들이 유실되는 것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다.

가도들은 "비아이 푸블리카이"(viae publicae)라고 불렸는데 국가가 책임지는 공적 도로란 뜻이다. 고대인들은 사회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 도로가 반드시 필요하며, 따라서 국가가 당연히 도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위정자들과 사적 이익 확보에 여념이 없는 일부 공무원들과 토건 금융 자본이 결합한 카르텔들은 어떻게든 공공성의 중요성을 깎아내리고 효율성이라는 가면을 앞세워 국가의 공적 역할을 축소하려 든다. 민자 고속도로와 민자 지하철, 경전철들이 내고 있는 파열음에 귀를 막은 채 KTX마저 흔들고 있는 자들을 보면 2000년 전의 사람들보다도 못났다는 생각에 측은함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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