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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에게서 '개방성과 관용정신'을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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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에게서 '개방성과 관용정신'을 배워라 <로마인 이야기>독후감 대회 대상작
<프레시안>과 한길사가 공동 주최한 『로마인 이야기』독후감 공모전의 수상자가 결정됐다. 영예의 대상은 최은지 씨의 「로마, 당신의 드라마」가 차지했고, 최우수상은 김상훈 씨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 통해 바라본 양극화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조 변화의 필요성」, 그리고 우수상에는 정지혜 씨의 「로마는 하루아침에 멸망하지 않았다」와 최문석 씨의 「인간을 이해했던 소통의 드라마」등 2편이 각각 선정됐다. 이밖에 가작 10편과 입선 10편도 선정됐다.

<프레시안>은 수상작 중 대상 「로마, 당신의 드라마」와 최우수상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 통해 바라본 양극화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조 변화의 필요성」을 싣는다. <편집자>


로마, 당신의 드라마

에드워드 기번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앉아 오렌지빛 석양이 비추는 폐허를 내려다보며 그 유명한 <로마제국쇠망사>를 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시오노 나나미도 아마 팔라티노 언덕에서 로마 시가지를 굽어보며 명상에 잠겼으리라. 그리고 나 역시 그들과 같은 로마의 꿈을 꾼다. 4C의 고구려 소녀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찬란한 포룸 로마눔에 입성하는 상상도 하고, 언젠가 이탈리아라는 머나먼 이국땅에 도착하여 독일의 문호 괴테마냥 로마에 도취되는 꿈도 꾼다.

비단 로마를 꿈꾸는 사람의 꿈은 이뿐만이 아니리라. 투명에 가까운 지중해를 가로지르며 로마의 외항인 오스티아로 향하는 수십 척의 갤리선, 파르티아와 이집트에서 들여온 진귀한 세공품들, 온갖 민족이 융합되는 세계적인 메트로폴리스 로마. 모든 현대인은 그 평화로웠던 팍스로마나를 추억한다. 현대의 법은 로마법의 변주이며, 미국의 국회의사당은 판테온의 모방이지 않은가? 또한 로마라는 채석장은 셰익스피어에서부터 최근 인기리에 상영된 미국 드라마 <스파르타쿠스>까지 풍부한 문화의 석재를 제공한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환상적인 나일강 관람과 폼페이우스 극장에서 친히 리라를 켜며 노래를 했다는 폭군 네로의 일화는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 어느 시기보다 이상에 가까웠던 팍스로마나에 대한 향수, 그리고 천 년에 걸친 시간이 빚어낸 다양한 인간 군상의 흥미로운 일화 때문에 우리는 로마를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로마가 꾸준히 현대인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건, 로마의 역사 자체가 인간의 드라마와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로마는 늪지로 된 언덕에 건국되었으며, 바다와 인접해 있지 않은 불리한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에트루리아나 켈트족과 같은 강한 주변 세력이 혼재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로마가 역사의 승리자가 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로마는 예상을 뒤엎었다. 그리고 황금시대를 열었다. 그 영광은 무려 천 년이라는 기간 동안 지속되지만, 그 어떤 것도 영원히 지속될 순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이 결국 찬란하게 멸망한다. 이러한 굴곡은 감동과 반전, 그리고 결말이라는 측면에 인간의 삶과 닮아 있다. 나는 로마의 역사란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기록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로마의 역사적 흐름은 굴곡진 우리의 인생과 같다. 그러기에 우리는 로마의 역사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팍스로마나와 같은 위대한 어떤 것을 위해 로마를 배울 필요가 있다.

▲ ⓒ한길사

<로마인 이야기> 15권을 찬찬히 읽으면서 나는 그 '어떤 것' 때문에 로마인들이 위대한 시기를 열 수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시오노 나나미 역시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로마인은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지중해를 자신들의 내해(內海)로 만들었다. 그 이유는 <로마인 이야기> 15권을 관통하며 계속 등장하는 '개방성과 관용정신'에 있다. 이 두 단어는 <로마인 이야기>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나 역시 이 이상으로 로마인의 민족성을 대표할 수 있는 단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미덕이고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나는 늑대의 자손이 건국했다는 그 고대의 제국이 현대보다 개방성의 측면에서 더 진보했음에 깜짝 놀랐다.

개방성은 지구촌이니, 코즈모폴리턴이니 하는 범세계적인 요즘 추세에 강조되는 미덕이다. 하지만 여전히 세계 도처에는 타민족과 타문화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존재한다. 여기서는 나 자신조차도 자유롭지 않다. 내가 다니는 대학 캠퍼스에는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온 여러 학우가 있는데, 피부색이나 복장에서 '다름'이 확연히 느껴지는 그들에게 다가가기가 여간 쉽지 않다. 반면 일본이나 유럽에서 온 학우들에겐 친해지고 싶고, 그들의 문화를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한다. 책으로 문화엔 우열이 없음을 수없이 배웠지만, 나 역시 현실에선 뿌리 깊은 문화상대주의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문화상대주의란 자신보다 저열하고 보잘것없다고 생각되는 문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다. 관심이 없다는 것은 그것의 소멸과 파멸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패자가 된 로마는 어땠을까? 그들은 승자로서 우월감에 도취되어 타민족의 문화를 말살하지는 않았을까? 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탈리아 반도 위에 자리 잡은 갈리아인은 라틴족인 로마인과 그 기원 자체가 다르며 문화적으로도 확연히 다른 양상을 띤다. 게르만족이나 브리타니아족 역시 신체적 측면에서 한눈에 로마인과 구분이 되며, 다소 비문명적인 양상을 띤다. 어디 그뿐인가. 지중해 저편에는 커피 빛 피부색을 지닌 누미비아인과 이집트인이 있으며, 동방세계의 파르티아인 역시 다르기로는 말할 것도 없다. 로마는 이런 다양한 이민족을 억압하거나 말살하지 않았다. 그들의 종교를 인정해주었고 때론 자치를 인정해주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다양한 구성분자로 이루어진 지중해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하나의 통일된 문화와 종교만을 강요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심지어 속주민들에게 기존의 기득권인 '시민권'을 부여했다는 것은 놀라운 진보라고 생각한다. 로마의 현제(現帝)로 추앙되는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속주 출신이었다. 일제식민지 치하의 조선인이 일본 총리가 된 것과 비슷하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지는 몰라도 어쨌든 본질적 측면에서 로마인들은 진보적이고 개방적이었다. 그들에게 본국과 속주의 관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착취와 억압,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었다. 그저 지역의 특수성에 따라 나뉜 행정구역에 불과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말한다. "고대인들이 애국심이라고 명명한 공적 미덕은 자신이 속한 자유 정부의 유지와 번영이 자신의 이해가 달려 있는 문제라고 느끼는 데서 시작한다"라고. 시민권의 획득으로 로마의 변방에서 지중해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 순간, 속주민들은 로마와 자신의 운명을 같이하게 된다. 유명한 예를 들자면, 율리우스 키빌루스가 갈리아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을 때 갈리아는 로마의 속주로 남기를 원했다. 타민족을 수용하고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줌으로써, 그들 자신이 '핍박받는 속주'가 아닌 로마와 한배를 탄 '제국의 중심'이라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장점만 있을 수는 없다. 로마는 팽창주의의 측면에서 근대 제국주의의 모태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군사력을 앞세운 폭력적 확장이라는 점에서 비판받을 만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로마의 제국주의와 근대의 제국주의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근대의 제국주의는 식민지의 고유문화를 인정하거나 소규모의 자치라도 허용하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식민지란 착취의 대상이었다. 고대 로마에도 전리품의 약탈은 있었지만 매년 속주에 공납을 요구하는 일은 없었다. 속주란 로마세계에 편입된 일원으로써 협력하고 보호해야 할 하나의 행정 구역이었던 것이다. 물론 누가 누구를 보호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한 민족이 결정해야 할 사안이며,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는 집단이 결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근대 제국주의와 로마의 제국주의를 공통된 지점에 두고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공존이 제거된 근대의 제국들은 단지 로마의 독수리 문양만을 본 따 깃발에 달았을 뿐이다. 팍스저먼도, 팍스브리튼도 실현되지 않았다는 게 그 결정적 증거가 되지 않을까?

이처럼 고대 로마인의 개방성과 관용정신을 계승하지 못한 우리는 아직도 수많은 혼란을 빚고 있다. 전쟁과 테러, 종교와 인종 간의 갈등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이다. 특히 종교적인 부분에서 우리는 고대인들의 의식을 한참 따라가지 못한다. 고대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통합한 모든 이민족 신을 자신의 신으로 받아들였으며, 어느 특정 신만을 위한 신전이 아닌, 만신을 위한 판테온을 지었다. 종교적 화합이 정치적 안정을 위해 중요한 이유는 종교가 절대적인 신념체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의 논리로 어떤 지역을 평정했다고 한들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그들의 가치체계까지 정복할 수는 없다. 그것을 억지로 바꾸려 든다면 반감만 일어날 뿐이다. 특히 다양한 민족들이 포진한 지중해 세계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수많은 이민족과 싸웠지만, 그들의 수많은 사상과는 싸우지 않았다. 인간은 이질적 종교에 전쟁으로 인한 종속보다 더 급격히 저항하는 존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사점을 찾아내 받아들였고 인정했다. 반면 오늘날 우리는 타인의 종교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자신의 종교를 강요한다. 포교와 선교 역시 가치관의 강요라는 하나의 폭력적 행위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부분에서 인류가 반드시 진보하는 것만은 아님을 깊이 통감한다. 인류는 언제쯤 다시 일신교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박애며 자비며 仁이며 결국 그 내면에 흐르는 줄기는 '사랑'이라는 거대하고도 일관된 흐름일 텐데.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느낀 또 하나는, 그들의 근면하고 성실한 농부적 기질이 한국인과 닮았다는 것이다. 묵묵히 땅을 일구고, 노력한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는 근면함. 흙냄새 묻은 손으로 차근차근 빚어내는 정신. 누군가는 로마의 수도와 가도를 보며 실용성만이 강조된 완벽한 상상력의 결여라 폄하하지만 나는 오히려 담백하고 멋 부리지 않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 영민한 현실주의자들이었다. 파라오의 황금 데스마스크가 아닌, 찌푸리고 주름진 모습 그대로를 본뜬 로마인의 데스마스크는 검버섯마저 그대로 표현하는 조선의 초상화와 참 닮아 있었다. 있는 그대로, 지금 이 땅에 나는 것들을 사랑하는 로마는 농부의 땀이 밴 우리의 과거와도 일치점이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더욱 로마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인종이 같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시대가 있다는 사실을 쓰고 싶었다." 장엄한 세월에 묻혔을 법한 로마인들이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화두를 던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팍스로마나. 전쟁이 없는 평화. 강도와 해적은 자취를 감추고 제국 전역에서 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하는 전례 없는 황금시대. 모든 인종이 아우러지는 세계 국가. 2000년이 지난 후에도 그들의 업적이 회자되는 이유는 이루지 못한 이상에 그 어느 시기보다 근접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언제나 '나음'을 위해 도전하는 인류에게 로마는 수없이 되새김질해야 할 숙제일 것이다.

기원전 로마의 집정관 아이밀리아누스는 카르타고가 함락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런 말을 뱉었다고 한다. "언젠가 트로이도, 프리아모스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전사들과 함께 멸망하리라." 그는 어떤 국가와 문명도 영속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에, 로마도 언젠가 오늘의 카르타고처럼 멸망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로마라는 드라마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언젠가 그 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살아가야 하는 삶의 아이러니, 언젠가 우리들의 유산이 을씨년스런 과거가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웃어야 하는 오늘.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아픔을 동병상련하는 로마의 역사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의 과거는 퇴색하나 소멸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위대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폐허가 된 포룸 로마눔을 보기 위해 오늘도 로마로 향한다. 그리고 때론 빛바랜 프레스코화가 원본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로마인 이야기> 독후감 대회 심사평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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