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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미국은 정말 몰랐을까 <9ㆍ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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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미국은 정말 몰랐을까 <9ㆍ끝> 전쟁으로 득본 자, 누구인가
이제까지 제시된 정보들은 모두가 미국 언론을 비롯한 국제 언론에 공표된 사실들이다. 9.11 테러가 진행되는 동안 미국 정보기관들이 활용했던 통신 감청이나 비밀 감시, 혹은 기타 다른 정보 등 보다 풍부한 자료들을 일반인이 알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제한된 자료만으로도 세계무역센터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공격당했다는 미국 주장의 오류를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그 범죄로 누가 이득을 보았는가?’**

어떠한 범죄수사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범죄로 누가 이득을 보았는가?’ 하는 점이다. 9.11 사태로 인한 최대 수혜자는 다름 아닌 미국 내부에 있다. 부시 정부, 국방부, CIA, FBI, 군수산업체, 석유업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득을 본 장본인들이 그 사건이 발생하는 데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따져 묻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미국 정부가 그러한 행위를 했으리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미국이 세계적 강국으로 처음 등장한 1세기 전부터의 거의 모든 전쟁에서 미국의 통치계급은 민중들이 외국의 전쟁에 관여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건이나 학살행위 등을 이용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통킹만 사건-미 전쟁 도발의 대표적 사례**

몇몇의 사례, 예를 들어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대규모 개입을 의회가 승인한 계기가 된 1964년 통킹만 사건은 전적으로 가공된 것이었다. 이 사건은 베트남 내전에 대한 미 지상군 개입의 명분으로 작용했다. 반면 스페인-미국 전쟁의 빌미가 된 1898년 아바나 항에서의 미 전함 메인호의 폭발은 우연적 사고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경우, 전쟁의 도화선으로 작용한 사건들의 배후에는 미국 정부의 사건 조작이 개입됐다.

1915년 루시타니아호의 침몰은 민간 여객선에게 1차대전 교전국인 영국과 프랑스에의 전쟁물자 수송을 허용한 윌슨 정부의 결정에서 이미 예견된 사건이었다. 루시타니아호에 대한 독일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1천2백여명의 승객이 사망하면서, 이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는 미국의 참전을 가능케 했다. 1941년 여름, 미국이 일본에 대한 석유와 고철의 수출을 중단하면서 루즈벨트 정부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예견했을 것이다.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몰랐더라도 일본이 선제공격해 올 것은 분명했다.

보다 극명한 조작의 사례는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었다. 이 사건은 후에 대규모 미군과 전투기가 걸프만과 아라비아 반도에 거의 항구적으로 배치될 수 있도록 한 빌미가 됐다.

1980년대에 사담 후세인은 사실상 미국의 군사적 동맹세력이었다. 미국은 후세인의 이란전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정보를 제공했으며, 군사물자를 공급했다. 이란이 어쩔 수 없이 이라크에게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1988년 종전을 수용한 이후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된 관심은 1백만 군대를 거느린 이라크가 걸프만 지역을 지배하는 것을 막는 일이었다.

당시 이라크와 쿠웨이트간에는 쿠웨이트에 의해 도발된 일련의 갈등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쿠웨이트는 이라크에 전쟁비용으로 빌려준 수십억 달러의 즉각적 보상을 요구했다. 이와 동시에 이라크측 국경 부근에 위치한 루마일라 유전으로부터 석유를 뽑아내 이라크에게 엄청난 재정적 압박을 가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영국 제국주의에 의해 도둑맞은 이라크의 19번째 지방이라며 무력행사를 불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 전쟁에 대한 미국의 최초 반응은 놀랍게도 유보적이었다. 이라크가 침공하기 1개월 전 후세인과의 회담에서 주 이라크 미국 대사 에이프릴 글래스피는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분쟁은 그들간의 문제이며 그들 스스로 풀어야 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미국은 당시 합참의장 콜린 파웰의 명에 의해 노먼 슈바르츠코프 장군이 이라크를 겨냥한 대규모 미군 개입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전쟁계획은 글래스피와 후세인의 만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은 1990년 7월에 완수됐다.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하고 석유매장이 풍부한 걸프만 지역에 미군의 거점을 구축하겠다는 대외정책의 오랜 숙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현실화할 수 있는 구실을 얻기 위해 이라크의 쿠웨이트 공격을 조장했다는 것은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시 정부는 9.11 테러를 21세기의 걸프만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석유자원이 풍부한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 지역에 미군을 주둔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후, 미국 관리들은 후세인이 실제로 쿠웨이트 전체를 점령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미국은 후세인을 자극해 국지적 갈등이 발생하도록 만든 다음, 자신이 중재자로 개입함으로써 걸프 지역에서의 역할을 강화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9.11 사건에서도 이와 유사한 오산이 있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결과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엄청난 것이었다.

현재 알려진 사실에 근거해서 세계무역센터 재난에 관해 미국 정부가 사전에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를 단언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 의혹은 분명 철저한 조사를 통해 풀어야 할 가치가 있는 사안이다.

9.11 사태를 방지하지 못한 것이 FBI와 CIA의 실수였다는 설명은 너무 황당한 것이어서 미국 정부에게 쏟아지는 의혹을 벗기기엔 부족하다. 수천의 미국 시민들이 사망한 대재앙이 미국 정부가 용인한 것이든, 무능 때문에 방어하지 못한 것이든 현재 미국 정부는 끝없는 군사적 행동을 위해 왜곡된 진실을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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