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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전두환의 언론탄압, 그리고 '집단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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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전두환의 언론탄압, 그리고 '집단매수' [인터뷰]'단팥죽'까지 판 박종만 위원이 증언하는 '동아투위 30년'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의 일이었다. 1975년 3월17일 자정 무렵, 지금도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동아일보 구사옥 앞으로 2백여명의 건장한 체구의 괴한들이 몰려들었다. 어디서 마셨는지 술 냄새를 물씬 풍겼던 그들은 한 인솔자의 지시 아래 굳게 닫혀져 있던 동아일보 정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사옥 안으로 진입한 그들은 안에서 농성 중이던 동아일보 기자들과 동아방송 PD 등을 한 명씩 밖으로 들어내기 시작했다.

당시 5일째 단식 농성을 벌이느라 기진맥진해 있던 8년차의 박종만 기자는 소란한 바깥의 소리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아! 올 것이 왔구나." 저항할 힘조차 없었던 박 기자는 이윽고 번쩍 들려 밖으로 내동댕이 쳐 졌다. 정신을 수습해 주위를 둘러보니 경찰들이 사옥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경찰은 이 몸서리 쳐지는 야만적 폭력 앞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사옥 장악에 성공한 일단의 '구사대' 무리들은 인도적 차원(?)에서 단식 농성자들은 병원으로 긴급 후송해 주겠다며 또다시 박 기자의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넣었다. 분노로 양쪽 볼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들은 '구사대'라고 했지만 박 기자는 지금도 그들을 박정희 유신정권의 치졸한 졸개들로 기억하고 있다.

***"60~70년대 한국언론은 연탄가스에 중독돼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30대 중반이었던 박 기자도 이젠 60대 중반이 돼 어느 새 머리에는 서리가 내려앉았다. 그동안 이름 뒤에 늘 붙어 다녔던 '기자'라는 직함은 없어지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이라는 새 직함이 달렸다. 함께 고생하던 '동지' 12명은 이미 유명을 달리 하기도 했다.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 그래서 동아투위 위원들은 자신들의 30년 투쟁을 기록한 6백쪽 분량의 방대한 <자유언론>(해담솔 刊)을 집필해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기자였던 우리들이 사건을 기록한 일지조차 제대로 가진 것이 없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기록을 남기면 동지 가운데 누군가는 이로 인해 감옥에 가야 했기 때문이지요. 더 많은 동지들이 저 세상으로 가기 전에, 그리고 우리들의 기억이 더 나빠지기 전에 정말 제대로 된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결실이 바로 <자유언론>입니다."

박 위원은 책 소개를 부탁하자 먼저 60년대~70년대 언론 상황을 알아야 한다고 서두를 꺼냈다. 박 위원이 동아일보에 입사한 것은 67년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미 영구집권 구상을 가지고 있었던 박 정권은 가장 먼저 정비해야할 대상으로 언론을 꼽았다. 64년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만들어 기자들의 목을 조여 오더니 67년 총선을 앞두고는 '권-언 유착'을 통해, 한편으로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언론사에 본격 상주시키는 전법으로 언론을 통제해 나갔다.

"69년 1월 기자협회보 신년호에 '연탄가스에 중독된 언론'이라는 글이 실렸어요. 부지불식간에 스며들어 사람을 죽이던 그때 상황을 가장 잘 표현했던 글이죠. 그거 아세요? 당시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들 가운데 단 1명을 제외하고 나중에 모두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가 됐다는 사실 말입니다. 박 정권의 언론통제가 얼마나 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죠."

견습기자 1년 뒤 경찰기자로 활동했던 박 위원은 이러한 언론에 대해 민초들이 갖고 있었던 반감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신문만 보면 사회가 태평해요. 정작 대학가에서는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단 한 줄의 기사도 나갈 수 없었거든요. 오죽했으면 71년 3월 서울대생들이 동아일보 앞에서 언론 화형식까지 치렀겠습니까. 72년 10월 유신 뒤에는 기자들이 하루 종일 뭐 했는 줄 아세요? 지금은 창경궁이지만 그 때 동물원이었던 창경원에서 누워있던지, 아니면 자연보호캠페인을 나갔어요. 동아일보 지면이 8면이었는데 이것도 메우기 힘들었어요."

***"동아일보, 민주화 공로 있는 것처럼 포장 말라"**

밤이 깊으면 새벽은 일찍 온다고 했던가. 혹독한 '겨울공화국' 속에서 서서히 반란의 싹이 돋아났다. 71년 4월 30여명의 기자들에 의해 행해졌던 '1차 언론자유 수호 선언'이 단순히 '선언'에 그쳤던 점을 반성하며 73년 봄부터 동아일보 내부에 조직적인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기자들에 의해 2차·3차 언론자유 선언이 이어졌고, 사회현상을 반영하는 기사가 나가지 못하면 기자들이 그날 퇴근을 하지 않고 편집국에서 철야농성을 하는 방법으로 회사측을 압박해 나갔다.

"정부에서 내린 보도지침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것이 학생시위·종교계 구국기도회 등을 보도하지 말고, 월남전쟁과 관련해 부정적인 기사도 일체 안되며, 연탄값 인상 등 서민들의 생활고와 관련한 기사 또한 안된다는 것이었죠. 이를 깨기 위해 기자들의 분투가 이어졌지만 역부족이었죠."

그래서 기자들은 74년 3월 건국 이래 최초로 기자노조를 결성하고, 그 해 10월 24일에는 마침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게 됐다. 명칭도 '언론수호' '언론자유' 등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자유언론실천'으로 바뀌었다.

"이 실천선언 뒤 드디어 동아일보 지면에 1단 기사지만 대학가 데모 소식이 실리게 됐고, 또 얼마 뒤에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인권기도회 사진도 지면에 실리게 됐죠. 하지만 어디 정권과 사주측이 가만히 있었겠어요? 곧 광고탄압이 들어왔고, 저항하는 기자들은 차례로 해고됐죠."

75년 3월, 그렇게 거리로 내몰린 기자들은 그 뒤에도 6개월 동안 매일같이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도열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매일 집에서 나오면서 겉옷 속에 내복을 입고 나왔다고 한다. 언제 경찰에 연행돼 구속될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권의 탄압과 사주의 안면몰수보다 견디기 힘든 일은 생활고였다. 일부는 재취업 뒤 다시 회비를 걷어 동아투위 사무실을 운영하도록 뒷받침했다. 박 위원은 당시 재취업 대신 총무를 맡아 사무실 운영을 책임졌다.

***집요한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당근과 채찍'**

"동아투위의 끈질긴 투쟁은 필연코 구속을 불러왔죠. 78년 동아투위 결성 4주년을 맞아 언론에 실리지 않는 기사거리를 모아 만든 '민주·인권일지'라는 것을 냈는데 곧 탄압이 들어오더군요. 이 사건으로 인해 13개월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죠. 그 뒤의 삶이요? 떠돌이 생활이었지만 더 자세히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동아투위 동지들 모두가 비슷한 고생을 했는데 제 경험을 말해서 뭐합니까."

이렇듯 본인은 지난 30년의 삶을 밝히길 극구부인했으나 주변 지인들의 전언에 따르면, 박 위원은 그후 '제 힘으로 먹고 살면서 독재와 싸우기' 위해 유신시절 밑바닥 삶을 마다하지 않는 치열한 삶을 살았다.

유신정권은 동아투위의 재취업을 철저히 봉쇄했다. 신문사들 사이에 자유로왔던 기자들의 이동이 금지된 것도 동아투위 사태 이후였다. 박정희 정권이 '기자놈들이 왜 이렇게 겁없이 정권에 도전하는가'를 분석해 봤더니, 그중 한 이유가 기자들이 한 신문사에서 다른 신문사로 이직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엉뚱한 결론에 도달한 탓이다. 그후 유신정권은 각 신문사 사주에게 기자 스카웃을 중단할 것을 지시했고, 그때부터 각 신문사는 스카웃을 멈추고 기자들을 공채로만 조달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기수 시대'가 본격화된 것이다. 이렇듯 공무원처럼 기수 중심으로 기자사회를 재편한 이후 정권과 신문사주의 기자 통제는 한층 효율화됐다. '기자의 공무원화'의 뿌리는 이때부터다.

정권과 사주는 언론장악의 대가로 종전에 기초생활비에도 미달하던 기자들의 월급을 '대폭 인상'해 주었다. 전형적 당근정책이었고, 그 혜택은 1백13명의 동아투위가 길거리로 쫓겨난 직후 타신문사들에서 긴급보충된 인력과 동아일보 잔류세력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반면에 길거리로 쫓겨난 동아투위의 삶은 말 그대로 가시밭길이었다. 유신정권이 '씨를 말려버리겠다'며 이들의 재취업을 철저히 봉쇄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심각한 경제난으로 고통받아야 했고, 박 위원도 마찬가지였다. 노모를 모시고 자식을 키우던 박 위원은 한때는 부인과 함께 새벽에 일어나 단팥죽을 쒀 들통에 들고 나가 남대문 시장 한 구석에서 단팥죽을 팔기까지 했다. 명문 서울대를 나와 내로라하던 신문사에 다니던 민완기자이던 그가 단팥죽 장사까지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지인들 가운데에도 많지 않다.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정책도 박정희 정권의 그것을 그대로 승계한 것이었다. 신군부가 집권후 비협조적인 기자들을 대거 숙청하는 동시에 한 작업이 언론계에 남아있던 '집없는 기자'들에게 강남에 수천채의 아파트를 뿌린 일이었다. '집단범죄화'를 도모한 것이다. 예기치 못한 '전두환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놓고 일부 집있던 기자들까지 분양을 받으려 해 모신문사의 경우 대자보까지 붙는 등 언론계에는 복마전적 상황이 연출됐다. '전두환 선물'을 받은 기자들은 그후 강남 아파트값이 폭등을 거듭하면서, 중산층에 합류할 수 있었다.

반면에 동투위원들에게는 혹독한 감시와 견제가 계속됐다. 80년대초 박위원은 한 아동물 출판사에 어렵게 출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정은 간단치 않았다. 신군부는 '문제 인물인만큼 만약 재직중 사고를 치면 사장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압박을 가할 정도로 그들의 취업 봉쇄는 집요했다.

이렇듯 동아투위의 지난 30년 삶은 지난했다.

개인사에 대한 얘기는 극구 사양하던 박 위원은 끝으로 이것만은 꼭 써달라는 '특별주문'을 했다.

"<자유언론>을 펴낸 이유는 후배기자들에게 당시 사건이 역사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언론'의 가치가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죠. 또 하나, 동아일보 사주 일가가 '일장기 말소사건'을 나중에 자신들의 치적인 것처럼 훔쳐갔듯이 75년 광고탄압도 도둑질해 갈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죠. 광고탄압 사건은 오로지 올곧았던 동아일보 기자들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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