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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아 울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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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아 울지 마" 〈전태일통신 19〉'비어가는 농촌' 앞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하고 현실문화연구가 최근 펴낸 〈어디 핀들 꽃이 아니냐〉는 우리 관심의 사각지대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조근조근 깨우쳐 주는 책이다. 이 책에 실린 10편의 사진 에세이는 비록 낮은 목소리이지만 그 울림은 생각 이상으로 크다.

이 가운데 농촌 문제를 다룬 한 편의 글을 필자와 국가인권위원회의 양해를 얻어 전재한다. 글은 소설가 공선옥 씨가 썼고, 사진은 사진작가 이갑철 씨가 찍었다.

이 글은 오늘날 우리 농촌 문제를 목소리 높여 외치지 않는다. 그 대신 "자기들은 절대로 농사 짓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 끝없이 국내산 농산물만 찾는 그 심보란 도대체 어떤 심보란 말인가"라고 우리에게 되묻는다. 그런가 하면 "저희들은 변하고 변하고 하루에도 골백번은 더 변하면서 농촌은 그대로 있으라고, 어떻게 농촌 인심이 그러냐고" 하는 우리들을 향해 도대체 당신의 생각이 무엇이냐고 슬쩍 옆구리를 찌른다.

농촌 문제에 대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성찰을 촉구하는 이 글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편집자〉

…그 아래 순창 할매집은 사람이 사는 집 같지 않았다 나간 집 같았다 뚤방은 허물어졌고 작은방 문짝 돌쩌귀가 빠진 지 오래 되어 휭-했다 몇 개 덜렁 놓인 장독대에 독들은 깨져 있고 나뒹굴고 독을 열어봐도 소금만 쉬지 않았고 독들은 다 비어 있었다 헛청에 나무가 떨어진 지 오래 되었으며 슬레이트 지붕은 삭아 구멍이 뚫렸다 집도 한쪽으로 기울어가고 담은 허물어졌으며 흙벽은 숭숭 뚫리고 서까래는 부러졌다 마당에 마른 풀들은 미친 여자 머리처럼 엉켜 쓰러지고 쑥대는 쑥대머리로 서 있었다 여기저기 썩어 나자빠진 헌 덕석, 지게는 썩어 부러졌고 구멍 뚫린 천장으로 '밖'이 보였다 푸른 하늘이…

김용택 시, 〈저 강변 잔디 위의 고운 햇살1〉 일부이다. 소설가 김훈은 또 소설 〈개〉 작가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강토는 곳곳에서 버려져 있다. 나는 사람들이 못살고 떠난 마을들을 자전거로 떠돌아다녔다. 허물어진 지붕 위로 칡넝쿨 머루넝쿨이 기어올라왔고, 염소가 빠져죽은 우물에서 버섯이 피어올랐다.

더도 덜도 말고 2005년 현재스코어, 농촌의 현주소다. 이것은 실제상황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스락, 쿵, 쩌억, 농촌의 집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내 고향 마을만 가봐도 그렇다. 한때 100여 호가 넘던 마을은 이제 '살아남은' 집이 겨우 30여 호나 될까 말까다. 그 30여 호들에도 젊은 사람이라곤 없다. 그저, 노인들이다. 그나마 부부가 사는 집은 드물다. 거개가 할머니들만 산다. 시골은 이제 '할머니촌'이 되었다. 그 할머니들 세상 떠나면 마을은 비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공가촌(空家村)이 될 것이다. 그전에 기름진 경작지들이 지금 폐허가 되었듯이. 사정이 그러한데도, 지금 이 순간에도 '농촌 비우기'정책, 아니 '농촌 죽이기' 정책은 입안되고 상정되고 통과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쌀 수입에 관한 협상안 타결건이다.

농촌 죽이기 정책은 정권이 바뀌어도 바뀔 줄 모른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다. 지어먹을 작물이 하나씩 줄어듦과 동시에 농촌 사람들은 제 나고 자란 곳을 떠나 낯설고 물선 도시로 떠났다. 그 품목들을 열거해 보자.

지금은 그 노래조차도 기억에서 사라지는 '목화밭'이라는 노래가 있다. 하사와 병장이라는 듀엣이 불렀다. 노래는 물론이거니와, 요즘 세상에서 목화밭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나, 불과 30년 전만 하더라도 이 나라 산천에 목화밭이 있었다. 내 고향에서는 '미영밭'이라고 했다. 나는 지금도 이슬 촉촉이 머금은 '미영다래'의 들부드레한 맛을 잊지 못한다. 어머니는 미영다래를 너무 많이 따먹으면 벙어리가 된다고 했었다. 다래가 나중에 목화가 된다. 목화를 따다가 '씨아'로 씨를 빼고 물레로 실을 자아 베틀로 미영베를 짜던 어머니.

어머니는 산밭에 밀을 심고 '삼천리 강산에 노고지리 우짖는 봄이 오면' 하얀 베수건 머리에 쓰고 밀밭을 메곤 했었다. 밀, 서숙, 수수, 메밀… 그 모든 작물들을 어머니는 직접 씨앗을 받아 두었다가 심곤 했었다. 나는 또 고사리 같은 손으로 고추씨, 무씨, 상추씨들을 받곤 했었다. 그 씨앗들이 사라진 것은 종묘상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어머니는 씨앗을 받지 않고 읍내 종묘상에 가서 씨앗을 사오고 나중에는 씨앗도 아닌 모종을 사다 심기 시작했다. 그 일련의 변화과정이 바로 농촌 붕괴의 전조였음을 그러나 우리 어머니도, 나도 알지 못했다. 다국적 거대 농산물기업에 의한 농촌자생력 무력화정책은 언제나, 소리없이 다가와서 순식간에 집행되었다.

늘 농촌에서 익숙했던 많은 작물들이 사라지던 것과 같이 이제 쌀이 사라질 운명에 다다른 것인가. 그런데, 사정이 그러함에도 왜 도시사람들은 여전히, 늘, 언제나 '국내산 농산물'만 찾는 것일까. 자신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국내산 농산물을 지어 먹을 농토가 날이면 날마다 없어지고 있는데도, 아니, 농토들을 어떡하면 개발하여 이득을 남겨 먹을까만 궁리하는 사람들이 국내산 농산물은 더 찾는 것만 같다. 농토가 없어지고 그 농토 일구던 사람들이 제 살던 땅에서 쫓겨나고 있는데도.

'기생충알 김치'에 대한 소식으로 소란스럽다. 처음에는 중국산 김치에서 기생충알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국내산 배추가 금값이 되었다. 그러다가 국내산 김치에서도 기생충알이 검출되었다고 하니 배추가 똥값되고 무값이 올라간다고 한다. 기생충알 김치 뉴스 다음에 곧바로 이어지는 뉴스는 바다 오염으로 인해 중금속에 오염된 수산물 소식이다. 바다가 왜 오염되었을까. 뉴스를 보고야 처음 알았는데, 육지에서 발생한 가축분뇨를 처리하고 남은 슬러지란다. 그 슬러지들을 동해바다와 서해바다에 그냥 쏟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부들이 잡은 꽃게에 돼지털이 박혀 있는 것이다. 바다에 가축분뇨를 버리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분뇨로 농사를 짓는 것이다. 그러면 바다는 적어도 가축분뇨 슬러지로 인해서는 오염되지 않으며 사람들은 적어도 돼지털 박힌 꽃게를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대신 사람들은 기생충알 붙은 배추로 담근 김치는 먹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사람들은 돼지털 박힌 꽃게도 먹고 싶어 하지 않고 기생충알 붙은 김치도 먹고 싶어 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자기들은 절대로 농사 짓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 끝없이 국내산 농산물만 찾는 그 심보란 도대체 어떤 심보란 말인가. 자기들은 어느 것 한 가지도 내놓으려 하지 않으면서 끝없이 죄 없는 농촌보고만 내놔라, 다 내놓고 너는 니 알아서 살아라, 하면, 어느 누가 농촌에서 살 수 있단 말인가.

농촌이 변했다고 한탄하는 자들을 보았다. 저희들은 변하고 변하고 하루에도 골백번은 더 변하면서 농촌은 그대로 있으라고, 어떻게 농촌 인심이 그러냐고, 어떻게 농촌풍경이 그러냐고 하는 자들. 자기들은 고추 한 그루 키워본 적 없으면서, 농촌에 놀러가 아무 밭에나 들어가 툭툭 고춧대 분질러가며 고추 따가는 사람들. 고추는 따가도 좋으나 고춧대는 분지르지 말라는 농부의 말에, 그가 그랬다. 농촌 인심 한번 고약하다고. 고약한 것이 누군데, 도리어 적반하장이다. 농촌은 그리하여 이 시대의 죄 없는 죄인이 되었다.

농촌은 운다. 도시는 농촌이 울거나 말거나 저 혼자 신이 났다. 살맛이 차고 넘쳐서 밤인지, 낮인지 분간도 할 수 없다. 우는 농촌을 위로하는 건 아이들뿐이다. 아이들은 쓴다. 촌에서 혼자 밥 먹는 아이들이. 혼자 밥 먹으면서 뻐꾹새 소리에 막 눈물이 나는 아이들이. 촌아 울지마, 라고.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촌아 울지마, 라고 해야 촌이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촌이 울고 있는데, 촌아이들이 우는 촌을 달래느라, 저희들도 울고 있는데, 지금 웃는 자 누구인가. 우는 촌을 더욱더 울리는 자 누구인가.

오늘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면, 지금 제 아무리 '국내산 농산물'을 포식했는데도 어쩐 일인지,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지금 촌이 울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아는가, 모르는가?

촌이 비어가고 촌이 적막강산이 되어서 촌이 울고 있는가? 그러나, 촌은 시끄럽다. 천지사방으로 뚫린 길들. 촌사람 좋으라고 뚫은 길이 아니라, 자동차 좋으라고 뚫어논 길이다. 논바닥 위에 거대하게 박힌 기둥들 위로 도로가 난다. 산 뚫는 건 일도 아니다. 한마을이던 것을 두 마을로 갈라놓는다. 아스팔트가 깔리고 자동차들이 씽씽 달린다. 그러면, 강아지가 깔려 죽는다. 사람이 다친다. 그래서 촌은 운다. 노동의 대가는 돌아오지 않고 촌사람들이 가꾼 것들은 갈수록 제값을 받지 못해서 촌은 운다. 촌은 그렇게 울면서 비어간다. 우리나라 모든 촌들은. 촌이 우는 한, 촌이 비어 있는 한, 우리 모두는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다! 자가용을 타고 경치 좋은 시골길을 아무리 신나게 달려간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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