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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쿼터 축소와 FTA, 그리고 〈할리우드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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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쿼터 축소와 FTA, 그리고 〈할리우드 엔딩〉 〈시론〉 "영화는 오늘날 우리 문화의 운명"
삼성의 휴대전화는 경쟁력이 있는가? 있다. 기준은 세계시장에서의 점유율이다.

그렇다면 우리 영화의 경쟁력은? '같은 기준'을 놓고 보았을 때 그 대답은 너무도 분명해진다.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논리는 이로써 그 기초가 출발부터 여지없이 붕괴된다.

우리 영화 시장에서 미국 할리우드 영화가 개봉되는 양과, 미국에서 우리 영화가 개봉되는 수를 따져보자면 이건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게 된다. 경쟁력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영화계에 아전인수를 위한 이중 기준을 적용하고 있거나, 또는 대중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무엇이 '경쟁력'이길래?**

정부와 대기업의 논리, 그리고 이에 충직한 언론들은 다른 모든 경쟁력의 기준을 '세계 수준'에서 찾으면서, 유독 영화만은 '국내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내세우고 있다. 그 경쟁력이라는 것도 스크린쿼터가 음으로 양으로 보장해준 대목은 계산하지 않는다.

국내에서 삼성 휴대전화가 아무리 잘 팔린다고 해도 밖에서 별 볼 일이 없다면, 아직 우물 안 개구리끼리의 교신(交信)일 뿐이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이미 우물 밖으로 나온, 뱀도 무서워하는 황소개구리 내지는 손 귀한 집 아들자식 같은 눈도 부리부리한 떡두꺼비다.

그건 잘 된 일이다. 그러나 어디 그냥 되었겠는가? 당사자들의 노력이야 마땅했겠고, 노동자들의 저 오랜 희생,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부의 IT산업 집중 지원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구리가 자기 올챙이 때를 모르면, 자기 잘나 그런 줄로만 안다. 그럴 때 우린, 못 볼 꼴 보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국익론'은 그 잘난 자리에 펄럭이는 깃발이다. 기묘한 것은 여기에 성조기가 나부끼듯 겹쳐 보이는 점이다.

이 깃발을 "앞으로 돌격!" 자세로 꽤나 공세적으로 들고 있는 이들은 영화산업에 대한 스크린쿼터는, 대기업에 대한 정부의 IT 지원정책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충성하는 언론들도 다르지 않다. 언론이 아니라 홍보요원이다. 입만 열면 FTA가 가져다 줄 꿈같은 세상을 선전하기에 바쁜 정부 관료들도 어쩌면 그리도 판박이인가?

***아직도 험난한 저 세계영화시장의 항로**

저 광활한 세계영화시장에서의 항로는 아직 험난하고 멀었다. 바람 부는 날이면 진전속도가 다소간 빨라지는 범선을 이제 겨우 건조했을 뿐이다. 그것도 항해 중에 예상치 못한 풍랑이 일면 그 운명이 어찌 될지 모른다. 모든 것이 여전히 불안한 형편이다.

대형 항공모함과 범선의 경주, 그 결과는 뻔하다. 범선이 동남아시아로 가는 남해상의 해로를 방금 막 벗어났는데, 난데없이 진로를 태평양으로 바꾸어 망망대해에서 목표지점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일대회전을 치르라는 것이다. 배의 규모가 작은 것은 고사하고 식량도 부족하다. 아무런 사전 조처도 취해주지 않고서는, 등만 냅다 떠다밀고 있다.

배를 몰고 있는 선장과 선원들은 기어코 아니라는데, 종이 위에 그려진 해도(海圖)만 보고 지령을 내리는 이들은 막무가내다. 현장의 사정을 살피지 않는 무모한 독선이다.

스크린쿼터 축소에 대한 일방적 발표는 미국과의 FTA 협상을 위해서 필요한 성의표시라고 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TV 토론에 나와, 그야말로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밝힌다. 그러면 미국은 우리에게 그에 준하는 어떤 성의표시를 했는지 왜 아무도 반격해서 묻지 않았는지 답답했다.

***정부의 막무가내와 영화인들의 1인 시위**

막무가내는 또 있다. FTA 협상 공식 발표 하루 전, 아니 그것도 몇 시간 전에 구색 맞추기로 공청회를 열다가 된통 죽을 쑤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FTA 협상 관계자는, 공청회에 항의한 농민단체가 '무조건'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무조건? 그 동안 이들의 그 절절한 주장에 대해 귀를 틀어막아 온 결과다. '참여정부'가 '봉쇄정부'가 되고 있는가 보다.

영화인들의 광화문 1인 시위는 이 막무가내에 대한 저항이다. 이들은 결연히 진실의 푯대를 든다. "문화는 교역대상이 아닌 교류대상입니다, 우리도 국민입니다. 스크린쿼터는 국익입니다,"

안성기는 국민배우의 경륜을 가진 이답게 역시 쉽게 격분하지 않지만 그 진지함은 거스를 수 없는 장중한 신뢰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박중훈은 어느새 장년이 되어 그 소년 같은 미소에 짧지 않은 세월로 익은 연륜을 담고 있다. 그리고 명확하다. 스크린쿼터가 국익이라고 당당히 외치는 박중훈과 과연 누가 맞짱을 뜰 수 있을까? 장동건은 아마도 '태풍'을 몰고 올 것이다.

이어지는 1인 시위는 이로써 점차 군중이 될 것이며, 그러다가 행렬이 될 것이며, 그러다가 대열이 되고 그러다가 현실이 될 것이며, 그러다가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역사가 될 것이다. 우린 지금 그런 격동의 현장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민심은 방향을 정확하게 잡아나갈 것이다. 진상을 알아가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면서 그대로 침묵하고 있을 관객은 이 땅에 없다. 더군다나, 영화인들에게 이토록 좌절감을 안겨다 주면서 좋은 영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관객으로서도 최소한의 도리가 그야말로 아니다.

영화는 오늘날 우리 문화의 운명이다. "너는 내 운명"인 것이다. 운명을 외면하는 자, 운명의 여신과 화해하는데 무척 힘이 들 것이다.

영화계 내부의 문제가 스크린쿼터 축소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 또한 아니다. 그건 다른 공식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비' 공연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비' 공연은, 그가 마이클 잭슨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높은 벽이 있는지 실감하게 했다. 기특하면서도 안타까웠다. "낡은 MTV의 재판"이라는 〈뉴욕타임스〉의 평은 실로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우리가 어떤 지점에 서 있는지를 냉혹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대부분의 관객은, 아쉽게도 백색 미국인이 아니었다.

젊고 재능 있는 연예인의 해외 공연에 대한 뜨거운 격려는 좋지만, 호들갑 떨 일이 아니었다. 분명 현장은 우물 밖인데 잘못하면 현실은 우물 안에서 부르는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의 동요가 될 판이다. 우리들만의 잔치로는, 해외 동포 위로공연으로 끝난다. 애초에 그렇게 기획했다면 모르겠거니와, 이건 '비'의 장래를 위해서도 좋지 않다. 이런 때, 참으로 솔직하고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 '비'가 제대로 큰다.

우리의 환호와 갈채를 받은 〈웰컴 투 동막골〉과 〈왕의 남자〉가 뉴욕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 상영되기까지, 그리고 〈뉴욕타임스〉의 영화 평단에 놀라움을 안겨주기까지, 우리 영화의 보편적 문법과 인문학적 치열함, 그리고 국제경쟁력은 스크린쿼터의 방어망을 좀 더 요구한다.

체력이 길러지기 전에 섣부르게 나섰다가 한번 강력한 타격을 받게 되면 치명적일 수 있다. 그 피해를 복구하는 작업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공든 탑 무너지는 도로아미타불이 따로 없다.

친선경기라면 해볼 만하다. 그러나 이건 엄연히 친선경기가 아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러다가 아예 무대조차 잃을 수 있다는 점이다. 유통이 장악당하면 제작은 결국 무망해진다. 관객의 선택의 자유는 자칫 원천적으로 막혀버린다는 점을 우리사회는 무섭게 절감하지 못하고 있다.

***안전위주로 가겠다는데…그러면?**

"잘 만들면 되잖아. 우리 관객을 우습게 보지마" 하고 일부에서 반박하고 있지만, 초반에 분명 덤핑으로 대거 들어올 수입영화로 버는 돈이 더 쏠쏠하다고 여기는 시장의 풍토가 만들어지면 사태는 관객의 순진한 기대대로 굴러가지 않게 된다. 이미 검증된 작품으로 안전위주로 가겠다는데, 불확실한 위험부담을 안고 누가 제작에 선뜻 나설까? 이런 식이 되면, 논란이 되고 있는 스태프들의 처우는 제작비 위축으로 더욱 악화될 것이다.

〈영웅본색〉의 저 전설적 홍콩배우 주윤발이 그만 무대를 잃고 할리우드로 가서 〈와호장룡〉을 빼놓고는, 나오는 작품마다 거의 3류 액션배우로 전락해버린 것은 물론 스크린쿼터 때문은 아니었다 해도, 문화의 사회적 주도권이 받쳐주지 않은 결과 자기 무대가 사라진 영화와 연기자의 비극을 보여준다. 민망하고 처참하다.

이 나라의 영화계를 누가 거머쥐게 되는가의 문제를 이토록 쉽게 결정해버리는 정부의 문화의식은 그래서 야만적이다.

"대기업의 이익은 곧 국가의 이익이닷" 하고 이들은 합창하듯이 힘주어 호령한다. 아니, 호령하듯이 합창한다. "짐은 곧 국가다"라고 했던 저 프랑스 절대왕정의 루이 14세의 표정을 닮았다.

사정을 잘 모르는 백성들은 먹고 사는 일이 위협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어쩔 줄 몰라 한다. 이런 때에, 입 잘못 벌리면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진 '비국민(非國民)'이 된다. 국체를 내세우는 일제시대의 시국연설은 끝나지 않았고, 총독의 출신국가만 달라진 모양이다.

농민과 노동자와 문화인들은 모두 자칫 FTA 앞에서, 이 비국민이 될 위기에 처해 있다. FTA의 문제를 제기하는 지식인들이, 세계화의 현실적 대세를 거부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낭인(浪人)으로 찍히는 것은 별반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고 있다.

***사실 다급한 것은 미국**

그러나 인류의 역사에서, 전망 있는 자신의 산업을 보호하지 않고 성장한 강국은 어디에도 없다. 자유무역협정이 그토록 오랜 시간의 치밀하고도 냉혹한 외교 협상을 요구하는 까닭은 달리 있지 않다.

중국과 일본이 미국의 막대한 시장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FTA를 서두르지 않는 이유는, 미국을 상대로 할 자신의 체력을 최대한 강화시키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남미가 미국의 FTA 요구에 쉽사리 응하지 않는 것도, 중남미 자신의 지역 경제력을 극대화시킨 토대 위에서 강력한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것은 그리하여 미국이다. 아쉬워지고 있는 것도 미국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짜여질 아시아 경제지도에서 이러다간 밀려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한국을 미국의 아시아 시장 석권의 최대 교두보로 만들어나가는 전략을 세우게 한 것이다. 이른바 '포괄동맹'의 진상이다. 〈아세안 플러스 3〉의 협력 체제에서도 미국은 국외자다.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결합은 미국의 패권적 위상에 전격적인 충격이다. 이걸 막기 위해 우리의 시장과 정치와 군사가 미국의 요구에 의해 재편되는 것이 절실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스크린쿼터 축소를 협상 전 성의표시용으로 진상한 한국의 협상력은 이미 기선이 제압된 상태다. 여기서부터 알아서, 그리고 기어서 허물어지고 있는데, 무얼 기대할 수 있을까?

최근 무너진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 합의는 주한미군의 동북아 지역군 전환에 우리의 땅을 군사기지로 내준 결정이다. 미국의 전략 여하에 따라 이 땅은 누군가에 의한 폭격대상이 될 수 있다. 이미 평택에서 땅이 징발당하고 있으며, 그 땅의 농민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뿌리 뽑힌 유랑자가 되고 있다. 대량살상무기억제전략이라는 PSI 참여는, 한반도 평화에 중대한 자충수가 되는 사태다. 그 어느 것 하나, 국민적 의사를 묻거나 사회적 합의에 근거를 둔 것이 없다.

***21세기 미국판 내선일체인가?**

FTA는 이러한 현실의 전개과정에서 펼쳐지는 연장선 위에 있다. 우리는 지금 미국의 새로운 식민지로 확정, 완결되는 지경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이 땅에 강요될, 21세기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미국판이다.

미국의 자치령이면서 반(半)식민지인 푸에르토리코의 운명은 남의 일이 아니게 되고 있다. 스크린쿼터 지키기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그저 영화인들만의 일이 아님이 뚜렷해진다. 또한 영화인들 역시 이 문제가 영화산업의 장래에만 관련이 있지 않음을 직시하는 데까지 가야 할 것이다.

영화는 다만 영화 시장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요, 일상의 의식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이며, 경제행위를 무의식적으로 규정하는 자본의 논리이기도 하다. 스크린쿼터가 소멸되어가는 지점에서 이루어질 할리우드 영화의 대대적인 습격은 결국에는 우리의 문화적 무장해제를 가져온다.

우디 알랜이 주연한 영화 〈할리우드 엔딩(Hollywood Ending)〉은 자본의 논리로만 영화를 대하는 할리우드를 비웃는다. 눈이 멀어버린, 왕년의 명성 높은 감독이 만든 영화를 모두가 외면할 때 프랑스는 천재의 작품이라고 치켜세운다. 역설이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 영화계에 대한 통렬한 조롱이자, 영화 속에서 문화의 가치를 읽어내려는 어눌한 듯하지만 문명사의 맥락에 서 있는 우디 알랜의 철학이다. 그는 다시 눈을 뜨게 되고, 잃어버린 아내도 되찾는다. 할리우드 자본의 논리에 매몰되어 있을 때에는 알아보지 못한 세상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이다. 퇴물이라고 업신여김 받았던 늙은 감독에게 사랑과 열정이 다시 샘솟는다.

〈할리우드 엔딩〉은 거대한 자본이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영화를 이겨내기 위한 선택을 촉구한다.

***〈할리우드 엔딩〉과 스크린쿼터**

우리에게는 바로 이 거대한 할리우드 자본과 마주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한 시간과 환경이 절실하다. 스크린 쿼터는 적어도 현재의 단계로서는, 바로 그 시간과 환경의 기본이다.

아메리카 제국주의가 이 땅에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 식민지의 발판을 더더욱 굳히기 위해 지금 '스크린쿼터 축소'라는 문을 빠금히 열고 들어서려 하고 있다. '비자 면제'라는 카드를 줄 듯 말 듯 멀리서 흔들면서 FTA의 환상을 부추긴다. 사회적 양극화의 환경을 더더욱 심화시킬 수 있는 FTA의 위험성을 간과하도록 기만의 수사(修辭)가 난무하고 있다. '제국의 방송'을 자기 목소리인 양 되풀이 틀어대는 권력과 자본과 언론의, 알아듣기 힘든 전문용어를 여기저기 섞은 설법에 대중들은 최면이 걸리고 있다.

바로 이 때, 스크린쿼터 사수를 절규하는 영화인들의 목소리는 그 주문에서 우리를 깨어나게 하는 빛나는 육성이다.

영화는 이 시대의 영혼이다. 그 영혼의 찬란한 군무(群舞)를 추게 하는 이들이 다름 아닌 영화인들이다. 이들은 오늘의 '사제(司祭)'들이다. 이 사제들이 신탁처럼 내리는 그 영혼의 소리가 광장의 우렁찬 함성이 되기를 갈망한다.

이들을 좌절하게 할 수는 없다. 사제가 절망하는 시대는 별빛이 사라진 밤하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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