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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여, 우리는 한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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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여, 우리는 한편이다! [황새울에 평화를! 릴레이 기고] 함순례 '대추리를 위한 탄원'
2006년 4월 29일. 마을로 들어갔다. 군경이 들어와 군사경계선 철조망을 치기로 한 5일 전. 12주간의 대추리 현장예술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마지막 행사일이었다. 행사시간은 오후였지만 일찍 대전에서 평택까지 어떤 비장함을 몰고 간 나는 동창리, 내리 마을을 지나 미군기지 철조망을 휘돌아 대추리에 닿았을 때 일순 편안해졌다. 가장 안쪽 야트막한 동산처럼 자리잡은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을까. 피어나는 봄꽃들의 눈부심이었을까. 투명한 햇살이 주는 여유로움이었을까.

오랜 동안 촛불 집회를 가졌던 비닐하우스 천막과 마을 어르신들의 초상화가 그려진 대추분교 창문들, 운동장 구석에서 뒷마당에서 까칠한 차림새로 힘겨운 싸움을 꾸려가는 들사람들을 빼놓고는 너무도 평화로웠다. 곳곳에 써놓은 벽시와 그림들조차 축제를 준비하는 깃발처럼 아름다웠다. 평화예술동산에서 내려다본 너른 들은 영원히 흘러갈 강물처럼 바다처럼 시원했다. 들판 한가운데 우뚝 솟은 문무인상은 들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위엄이 있었다. 작은 마을 전체가 서정시 한 편이었다.

마음이 탁 놓였다. 누군들 이 좋은 땅과 풍경을 쉽사리 까뭉갤 수 있겠느냐. 천천히 골목골목을 걸었다. 푸성귀를 씻다가, 채마전 풀을 뽑다가, 담장 안을 기웃거리는 낯선 방문객의 인사를 받으신 어르신들은 한결같이 온화한 표정이셨다. 말 한 마디도 따뜻했다. 평생 갯벌을 경작하며 살아온 억척 뒤에 숨겨진 농사꾼들의 바탕이었다. 일편단심 일구고 씨 뿌리고 가꾸지 않았으면 그 짠 소금기를 거두어낼 수 있었겠는가. 그들의 구부러진 허리가 그을린 피부가 갈라지고 거칠어진 손발이 그대로 땅이었다. 누구라도 넘겨볼 수 없는 옥토였다.
▲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 반대에 참가한 대추리 주민 ⓒ 프레시안

뭉실뭉실 흘러가는 구름도 건듯 불어오는 바람도 앞산의 짙은 어둠도 온통 경작해야 할 대상이었던 아버지가 물큰 생각났다. 물려받은 땅 한 바닥도 없었지만 육덕 좋은 몸집과 뱃심 하나로 전답을 불려나간 농투성이 아버지였다. 산비알 돌밭이 텃밭이 되고 일꾼으로 모를 심던 논을 한 마지기 두 마지기 사들일 때마다 특유의 구레나룻을 훑어 내리곤 했던 아버지였다. 고물고물한 우리를 번차로 안아 올려 발그레한 볼에 그 까끌한 수염을 부비곤 해서 우리는 자지러지고 어머니는 말리고 아버지는 너털웃음으로 공중 비행기를 태워주시거나 무등을 태워주셨더랬다.

올백으로 빗어 넘긴 머리, 우렁우렁한 목소리, 평생을 고집하던 중의적삼 자락, 발자국 소리도 유난스레 컸던 아버지는 요즘식으로 치면 동네의 홍반장이었다. 누구네 수저 젓가락이 몇 개인지도 다 아는 마을의 대소사 궂은일들이 그의 손과 발품을 거쳐 꼴을 갖추기도 하고 흥얼거림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누구네 가장이 병치레를 하고 있다면 그 집의 김을 내고 모를 심는 일, 땔거리를 부엌바닥에 부려놓는 일, 하다못해 군불 때는 일까지 상관을 했다. 묘 자리 봐주는 일은 드문 일이고, 신년이면 마을 사람들의 토정비결을 봐주는 일은 재미 삼아 일 삼아 해마다 이어지곤 했다.

"어천만사(일천만사) 이 손 아니면 풀리는 일이 없어!"
아버지는 내게 그렇게 '어천만사'로 다가왔다.
주렁주렁 딸려 나오는 감자알을 높이 쳐들고는 "이놈들 봐라, 햇덩이만큼 크쟈!" 때마침 넘어가는 저녁 해를 가리키며 내 손에 호미를 쥐어주셨다. 그때 나는 여섯 살이었다. 밭이랑 타넘으며 흙장난이나 하고 있던 나는 묵직한 호미질 몇 번에 뒤로 나동그라졌지만, 감자알들을 붉히던 노을은 지금까지 선연하다. 늦가을 바람에 씨얼씨얼 울어대는 수숫대를 바라보면서는 "저게 다 씨알이 영그는 소리다이." 낮게 중얼거리시던 말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다. 어천만사. 들로 나갔다. 황새울, 보리원, 홍농계, 봄이쌈원…! 힘 모아 갯벌을 일구기 위해 부은 삼십년 계가 그대로 들 이름이 되었다니! 마을 어르신들께서 들려주신 들 이름들을 하나하나 불러보았다. 한창 물 대고 모 내기를 준비해야 할 철인데도 소박맞은 여자처럼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엎드려 있던 논바닥에서 무언가 꿈틀꿈틀 올라올 것만 같았다.

"지금 아무도 떠나지 않고 천년 무논을 갈아야겠다!"
▲ 최평곤 씨의 설치작품 <문무인상>. ⓒ들사람들

들이 말하고 있었다. 마을에선 느낄 수 없던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잘 닦여진 농로를 따라 걸으며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물을 댄 논이 있었다. 아마도 이장님의 논일 거라고 누군가 귀띔했다. 이장님에게 닷새 후의 일은 닷새 후의 일일 뿐이었다. 오늘 할 일을 하고 계신 것이었다. 그는 천상 농사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그랬다.

일의 순서와 마음이 잡히면 꼭두새벽부터 몰아쳤다. 좀체 일을 미루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는 물론 우리들조차 아버지의 성화에 밀려 들로 나가야 했는데 대개 모내기 할 때나 가을 타작 할 경우에 그랬다. 한번은 못줄을 놓쳤다고 얼마나 호되게 호통을 치시던지, 일부러 놓친 것도 아닌데 불같이 성을 내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들밥도 먹지 않고 못줄을 잡고 있던 기억이 있다. 또 한번은 오늘엘랑 타작일손을 거들라 명하시는 것을 몰래 담을 넘어 학교에 갔다가 두려워 집에도 못 들어간 적도 있다. 칠남매 중 유난히 공부탐이 많았던 나는 그런 아버지를 수시로 거역하며 미꾸라지처럼 빠져 다녔다. 공부하겠다는 자식을 야단치는 무식한 아버지쯤으로 치부하곤 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기적이고 철없던 어린시절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운명이 바뀌는 사건이 터지고야 만다. 중학교 1학년 여름, 인근 마을 주민 50여 명이 산사태에 묻히고 마을 전체가 송두리째 사라지고 소 돼지 등 가축들의 죽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나마 집이 떠내려가지 않은 것만도 감사해야 하는 대홍수, 아수라장의 2박 3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아예 끼니도 잊은 채 한참 벼가 패기 시작한 논에서 사셨는데 급기야 물꼬를 살피던 그대로 삽시간 밀어닥친 황톳물에 쓸려가시고 말았다. "아버지, 아버지!" 나의 외마디 소리는 우박처럼 퍼붓는 빗소리에 파묻혀 들릴 리 만무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구사일생 뿌리째 떠내려 온 나무 둥치를 붙잡고 헤엄쳐 오신 아버지는 그러나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휑하니 비워버린 눈, 이빨을 부딪치며 어찌나 심하게 떠시던지 두 다리를 잡아드린 내 손조차 덜덜 떨리고 있었다. 좀 누우라 일러도 이불을 씌워드려도 걷어낸 채 아버지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이미 시뻘건 황톳물에 쓸려나간 논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셨다.

새로 농지 정리를 해야 할 만큼 크고 작은 돌들로 꽉 차 버린 논. 아버지의 하루는 논에서 시작하고 논에서 끝났다. 학교 파하면 모두 논으로 나가 돌을 골라내야 했다. 아버지는 일이 서툰 우릴 예전처럼 닦달하지 않으셨다. 무섭게 일만 하셨다. 말수도 부쩍 줄어들었다. 대신 과음을 하기 시작하셨다. 해를 거듭할수록 논은 다시 제 꼴을 갖춰갔지만,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도는 이미 깊어진 후였다. 그렇게 삼 년. 술에 절여진 아버지는 어느 날 홀연히 돌아올 수 없는 강물을 건너가셨다.

대추리를 한 바퀴 돌고 나서는 처음 도착했을 때의 편안함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서수찬 시인에게 먹물을 받아들고도 나는 한동안 먹먹했다. 저 들이 전해오는 말들을 어떻게 받아 적어야 하나.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대물림으로 쫓겨나야 하는 대추리 농민들의 피눈물을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겠는가. 돌아가시고 십 년 후에야 아버지와 화해를 한 나. 사선을 넘어 살아오셨을 때, 이미 정신적인 구멍이 뚫린 것이라는 것을. 농사꾼에게 땅은 목숨이었다는 것을. 여러 가지 일에 휘둘리며 나 역시 농부의 딸임을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했던 나.
▲ 함순례 시인의 벽시 <대추리 한바퀴> ⓒ 들사람들

그러나 말해야 했다. 어눌한 한 마디라도 붓을 들어야 했다. "내일도 와 줘유. 함께 해줘유." 말씀하시는 마을 어르신들의 간곡한 눈빛이, 미명의 새벽 마루 끝에 쓰러져 있던 아버지의 차디찬 주검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아무것도 갈아엎지 않고 내리 내리 깃들고 싶다"

부끄럽다. 선배님들의 빼어난 벽시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그러나 한 자 한 자 통곡하듯 썼다. 기운을 불어넣으며 온힘으로 썼다. 그러고도 내일도 함께 하지 못했고 모레도 함께 하지 못한 나는 뉴스와 방송을 통해 5월 4일을 맞았다. 절규와 피눈물로 얼룩진 뉴스들을 대하며 그때의 아버지처럼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끝내, 기어코 그 아름다운 땅에 철조망을 내렸구나. 분노와 서글픔이 한꺼번에 주르르 흘러내렸다.

묻고 싶다. 우리 정부는 방법이 그것 밖에 없었는지. 일본 오키나와 현 나고시 헤노코 지역 주민들은 지난 1996년부터 산호초가 아름다운 바다 위에 새 미군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에 맞서 싸우고 있다. 그런데 일본 정부와 미군은 잇따라 타협안을 내놓는 등 주민들의 끈질긴 투쟁이 구체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평택 대추리와 너무도 흡사하지만 그 해결책은 너무도 달랐다.

대추리가 아니고도 나는 여러 번 궁금하고 궁금했다. 우리의 누이가 미군에게 폭행을 당해 반병신이 되어도,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죽음을 맞는 통곡 앞에서도, 길을 비켜 달라 요구했다는 이유로 우리의 선량한 농부가 미군에게 총구를 받는 위협 앞에서도, 미국과 연계된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정부는 항상 미국의 대변인이 되어 억울함을 호소하는 우리에게 방패를 들이밀고 막는 데만 급급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보호를 받아야 하는 국민인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나만의 의구심인가. 묻고 싶다. 나는 정말이지 궁금하다.

생업을 핑계로 광화문 촛불 집회에도 올라가지 못하던 차 내가 기획하고 있는 애지시선의 시집 100권을 기증해 달라는 공문이 날아왔다. 6월 7일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와 한미 FTA 반대 문화한마당> 무료 사인회에 쓸 책이었다. 잘 되었다 싶었다. 손세실리아 시집 『기차를 놓치다』와 김수열 시집 『바람의 목례』를 그날 당장 택배로 부치고 담당자 류외향 시인과도 통화를 했다. 류외향 시인은 성큼 후원을 결정해 주어 고맙다고, 나는 출판사를 하고 있으니 이런 일도 할 수 있구나, 도울 일이 생겼으니 오히려 고맙다고, 서로 따뜻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대추리 주민들이, 문단의 선후배들이, 들사람들이 피 말리는 싸움을 하고 있는데도 뒷소식이나 챙기고 먼발치서 몸조심하고 힘내라, 안부만 챙기는 처지에 책 몇 권 보탠 일이 무에 대수겠는가. 언감생심 여전히 죄스럽다.

부디 오늘의 싸움이 일본의 오키나와 현의 사례처럼 대추리 주민들에게 성과를 내는 싸움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정부여! 제발 잊지 말아다오. 우리는 한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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