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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밭 가는 길에 산나리꽃 화들짝 피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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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밭 가는 길에 산나리꽃 화들짝 피는 소리' 창비 주간논평 <17> 박완서 소설과 '재미없는' 글들
중국 기차가 티베트의 수도 라싸까지 연결되어 지난 7월에 개통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봤다. 이제 티베트 사람들은 철도가 없던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 틀림없다. 사람들의 삶의 변화는 언제나 새로운 길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까. 기자는 티베트의 철도개통이 외지인들에 의한 티베트의 사회·경제적 지배의 심화를 가져올지 아니면 티베트인들 스스로의 현대화된 삶으로 이어질지는 두고볼 일이라고 썼다.

그런데 철도개통이 계기가 되어 현대화된 삶을 살게 됐다고 해서 티베트인들이 진정으로 행복할 것인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고향의 들판을 가로질러 남해고속도로가 났다. 고속도로가 개통되던 날, 전교생과 인근 마을주민들이 모두 고속도로로 나와 우리나라도 이제 부자가 되었다고 개통테이프를 끊은 차들을 향해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그뿐. 고속도로가 마을사람들에게 준 이득이나 행복은 아무 것도 없었다. 고속도로가 생긴 뒤 고향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속도로 주변의 들에서 일하다가 씽씽 달려가는 차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거나, 바라보면서 왠지모를 얄궂은 느낌에 사로잡히거나,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듣지 못했던, 차가 전속력으로 달려가며 내는 소름끼치는 소음을 듣는 일, 그뿐이었다.

90년대 초반에는 고향마을 앞 신작로가 '확포장'되었다. 그전에는 구불구불한 흙길이었다. 차라고는 하루에 몇번 완행버스가 다니고 면소재지의 술도가집 '구루마'가 지나가고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길이었다. 길가에는 미루나무가 울창했다. 그 길에서는 걷기를 위협하는 것이 없었다. 나는 그 길을 걸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논둑길과 산길과 신작로. 그 길을 걷던 시절 나는 행복했던 것 같다. 아니, 행복했다고 하기가 뭐하다면 그냥 재미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가난했지만 무섭지 않고 불안하지 않았다.

강운구의 사진집 《마을 삼부작》을 보면 수분리와 황대리의 30년이 나온다. 변해버린 수분리와 황대리. 수분리와 황대리가 '변해버린' 가장 큰 요인은 길이다. 30년 전 구불구불하고 포근포근했던 오솔길이 지금은 반듯하고 딱딱하고 넓은 길이 된 것. 반듯하고 딱딱한 길이란 차 다니기에만 좋은 길이다. 반듯하고 딱딱해진 길 위로 자동차들이 씽씽 달린다. 그래서 수분리와 황대리 사람들은 지금 행복할까. 지금 내 고향마을은 수분리와 황대리처럼, 이 나라 어느 '고향'이나 한가지로 온갖 길이란 길로 다 포위되어 있다. 고속도로, 신작로가 아닌 국도, 지방도, 농로, 임도, 소방도로…. 그래서 그 길을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으로 밤이고 낮이고 고요할 틈이 없다. 이젠 시골마을에도 가로등이 설치되어 밤에도 훤하다. 이제 이 나라에서 도시고 시골이고 '고요한 어둠'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어려서 '투명한 고요' 속에서 한없이 수런거리는 자연의 소리를 들었다. 학교 갔다 와서 산밭에 감자를 캐러 가다가 산나리꽃이 화들짝 피어나는 소리를 들었다. 어떤 때는 산나리꽃이 바람이 저를 간질인다고 까르르 웃는 소리도 들었다. 산꿩새끼가 막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소리, 온갖 산에 사는 것들이 내는 어떤 기척, 은밀한 기미, 신비한 기운들. 그리하여 자연의 부산한 기운들로 수런거리는 내 주변을 나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가득차서 경이롭게 바라보곤 하였던 것이다. 깊고 깊은 어둠 속에 휩싸인 밤에 내 눈은 '어둠 속에서만 빛나는 별'처럼 밝아졌다. 그런 밤에 나는 길게 꼬리를 끌며 떨어지는 별똥별, 은하수, 싸리빗자루 모양을 하고 일렁일렁 산 너머로 사라지는 혼불을 보았다. 그럴 때 나는 아득한 슬픔과 알 수 없는 설렘에 동시에 잠겨들었다.

80년대 후반에는 서울 구로동에서 살았다. 그걸 어떤 주택이라고 해야 하나. 기와를 얹은 납작납작한 블록집들. 두 사람이 겨우 비껴갈 수 있는 골목 양쪽에 그런 집들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문을 열면 막바로 부엌이자 현관 그리고 한칸씩의 방. 그래서 그 골목 사람들은 한겨울만 빼놓고는 골목에서도 살림을 '살았다'. 특히 프라이팬에 뭔가를 부치거나 고기를 구워 먹을 때는 언제나 골목에서 부치고 굽고 지졌다. 그래서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 입에도 한점씩 그 음식들이 들어가곤 했다. 부부싸움을 해도 꼭 골목에 나와 싸우고 애들이 소꿉놀이를 해도 꼭 골목에 나와서 하고. 나는 구로동에서의 한때가 가난하지만 딴에는 즐겁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십몇년 만에 다시 그곳을 가보니 동네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예전 납작납작한 집들은 전부 '원룸'이라는 다세대 주택으로 바뀌었다. 그전에 여기 살던 사람들은 지금 새로 지은 저 원룸에 들어가 살고 있을까. 이제 골목에 나와서 살림 안해도 되고 '쪽팔리는' 부부싸움도 밖에 나와 하지 않아도 되고 집 안에서는 놀 데 없어 골목에 나와서 놀아야 했던 그때보다, 집 안에서 얼마든지 놀 수 있는 지금이 더 행복할까, 그래서 구로동은 십여년 전보다 지금 더 좋아진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 살던 그 많던 노동자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지금 어딘가에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가난하지만 딴에는 즐겁기도 한 삶을 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엊그저께 한 문예지의 작품공모 심사를 보았다. 요근래 들어와서만 그런 것일까. 아니면 언제나 그랬을까. 응모한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정말 요즈음 문예지에 투고되거나 응모되는 작품들이 재미가 없다. 모든 글들이 하나같이 '쓸데없이' 심각하다. 진중하게 재미있는 작품이 씨가 말랐다. 왜 그런 것일까. 엉뚱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혹시, 세상이 너무나 재미없어서이지 않을까. 말하자면, 사람들이 이제 더이상은 산밭 가는 길에 산나리꽃 피어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박완서 선생의 6.25를 다룬 작품들을 읽으면서 나는 전쟁상황에서도 이렇게 삶이 신날(?) 수도 있구나를 느낀다. 전쟁통에서도 신날 수 있는 삶, 산나리꽃 피어나는 소리가 있어 가난해도 즐거울 수 있는 삶, 이제 그런 삶을 이 시대 사람들은,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시대 사람들은 영영 누리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어 나는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해도 딴에는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 나는 가장 두렵다. 그 두려움의 한가운데 한미FTA가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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