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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보배'라고 칭송한 무산철광, 중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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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보배'라고 칭송한 무산철광, 중국으로…

[압록·두만에서 바라본 북한의 오늘]<11>

지난 8월 초순 한국의 북한전문가들이 8박9일 동안 압록강 서쪽 끝 단동(丹東)에서 두만강 동쪽 끝 방천(防川)까지 북·중 국경 1376.5㎞, 3000리가 넘는 거리를 답사하면서 강 건너 북한 땅의 사정을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답사는 북한 전문가들이 그 동안 문헌자료와 현장경험을 통해서 축적해온 지식과 눈앞의 현실을 대조하고 검증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답사단의 분석과 평가는 정보와 자료로서 가치가 적지 않습니다. <프레시안>은 답사단의 일원이었던 황재옥 박사가 이번 현장답사에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들을 정리한 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일곱째 날] 두만강 상류 :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충산(崇善)→난핑(南坪, 북한 무산)

야생화 곱게 핀 두만강의 발원, 웬츠(圓池)

남파, 북파로 백두산에 두 번이나 오르면서도 천지를 한 번밖에 보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장백고원을 넘어 북한의 무산(茂山)을 바라볼 수 있는 난핑(南坪)을 향해 떠났다. 굳이 산길을 택해 장백고원을 넘어가는 이유는 두만강 발원지(發源池)의 하나인 웬츠(圓池)를 보고, '김일성 낚시터'였다는 곳도 한 번 보기 위해서였다.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를 떠난 버스가 백두산 쪽으로 다시 올라가다가 옛 산문이 보이는 곳에서 왼쪽으로 접어들자 곧 백두산 원시림 사이로 난 비포장 길이 나왔다. 웬츠까지 가는 길은 야생화의 천국이었다. 차에서 내려 수수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야생화들이 주변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니 '천녀욕궁지(天女浴躬池)라는 표지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 파란 하늘의 구름과 나무들이 비치는 거울 같은 호수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웬츠(圓池)라는 이름에 걸맞게 호수는 동그랗게 생겼다. 직경이 250m나 되는 작지 않은 호수였다. 호수 주변은 발이 푹푹 빠지는 늪지대였다.

▲ 웬츠호수 ⓒ황재옥

웬츠가 북한 삼지연군에 있는 '소천지'보다 아름답다는 말도 있다. '소천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두 호수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웬츠(圓池)의 고요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은 일품이었다. 청(淸)나라 건국설화에 등장하는 세 천녀(天女)가 웬츠에서 목욕을 했다고 해서 청나라 때는 웬츠가 신성시되었다고 한다. '천녀욕궁지'라는 표지석도 그래서 세워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웬츠에서는 천지가 발하는 위엄이나 기운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다.

웬츠를 보고 나서 오른쪽으로 두만강 상류를 끼고 '김일성 낚시터'를 향했다. 길도 좁고 산 속인데도 군데군데 검문소가 있었다. 검문소마다 차를 세워놓고 중국 군인들이 올라와 차에 탄 사람들의 여권과 사진을 일일이 대조하였다. 분위기가 압록강 상류와는 사뭇 달랐다. 우리가 지나온 혜산시 주변의 경우, 강폭이 좁아 건너오기 쉽지만 지형 지세 때문에 바이산 서쪽으로 나가는 길목과 창바이 동쪽으로 나가는 길목만 막으면 탈북자들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두만강 쪽으로 접어든 후 경비가 삼엄해진 걸 보면서, 두만강 쪽은 북한에서 넘어온 뒤 압록강 쪽보다 출로가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에 경비가 삼엄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두만강 상류의 폭은 그냥 건너 뛸 만한 데도 많았고, 깊이가 무릎 아래 정도밖에 안 되는 곳도 많은 것 같다. 일행 중 한 분이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두만강 접경지역 접근이 자유로웠는데 요즘은 감시·검문이 강화되었다고 설명했다. 밀수와 탈북이 늘어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압록강 건너편보다 두만강 건너편의 사는 형편이 훨씬 열악하기 때문에 탈북자가 많을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탈북자 중에 함경북도 출신이 70% 인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김일성 낚시터

1939년 5월 김일성이 만주 창바이에서 함경북도 대홍단(지금은 량강도 소속)으로 건너와 낚시를 했다는 '조어대(釣魚臺)'에 잠시 들렀다. 강폭이 얼마나 좁던지 1m 남짓 되어 보였다. 마침 북한군 병사 한 명과 중국군 병사 세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북한군은 카키색의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키가 160cm도 안 되어 보였다. 북한주민의 신체규격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았다. 남북교류가 한창인 시절, 2000년대 초반 평양을 방문했을 때, 저렇게 키 작은 북한 남성은 본적이 없다. 그러나 북·중 접경지역에서 보는 북한 군인들은 정말 왜소하고 말라 있었다. 아마 먹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지금 군에 와 있는 나이라면 '고난의 행군' 시절(1995-1998)에 태어났거나 유년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다가 식량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지역의 출신이라면 뭘 제대로 먹고 자랐겠는가? 신체적으로 열세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한 무리의 관광객 일행이 멀리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병사는 쪼그리고 앉아 태평하게 중국 군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관광객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눈치였다. '조어대'가 나름 명소가 되어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것이 그들에게는 흔한 일인 듯싶었다.

중국군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옌지(延吉) 출신이라고 했다. 옌지에서 듣던 조선말이 들리니까 우리가 남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서 반갑다는 뜻으로 옌지 출신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북한군과 나눈 대화내용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일상적인 것들이다"라고 얼버무렸다. 중국 군인은 키도 훤칠하고 잘 생긴 외모를 하고 있었다. 병사들의 체격이나 외모 면에서 북·중간 차이가 크게 났다.

충산(崇善) 해관과 두만강 산천어

'조어대'를 떠난 후 광핑(廣坪)을 거쳐 충산(崇善)에 도착하기 전까지 3개의 검문소를 지났다. 무작위로 여권과 인물을 체크하는 중국 군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두만강 상류는 흐름도 완만하고 강폭도 물건을 던지면 서로 받을 수 있는 거리라서 그런지 밀수가 빈번하다고 한다. 그러니 중국 군인의 단속이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부터 충산은 물 좋고 산 좋아 경치가 아름다운 고장이라 했다. 옌벤조선족자치주 허룽(和龍)시 남부에 위치한 충산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량강도(兩江道) 대홍단군(大紅湍郡)과 마주하고 있는 오지다. 충산의 구청리(古城里)라는 작은 마을에 북한과의 무역과 국경 출입을 관리하는 커우안(口岸: 국경지대의 관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구청리(古城里) 커우안(口岸)은 두만강 상류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통상구일 뿐 아니라, 옌벤조선족자치주와 북한의 량강도를 직접 잇는 통로라고 한다. 해관(海關) 건물은 농촌마을의 일반가옥에 비해 어울리지 않게 컸다. 새로 지었는지 페인트칠도 아주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 충산의 철쭉꽃 ⓒ황재옥

북한의 대홍단군(大紅湍郡)은 감자 농사를 많이 하는 곳인데, 원래는 벌판에 붉게 핀 철쭉꽃들이 여울과 어우러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대홍단의 중국 쪽 건너편인 충산 지역에도 철쭉꽃 나무들이 많았다. 8월이라 철쭉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볼 수는 없었으나 철쭉나무들이 산 중턱에 많이 퍼져 있었다. 철쭉꽃이 피는 시절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경 철조망 넘어 5m도 안 떨어진 곳에서 북한 주민들이 제법 많이 모여 건물 건축공사를 하고 있었다.

도랑이나 냇물이라고 해도 될 만큼 좁은 두만강 건너 북한 마을을 바라보고 나서, 우리는 맑은 두만강 상류에서 잡은 자연산 산천어로 점심식사를 했다. 바이산에서도 산천어로 저녁식사를 했는데, 충산의 식당은 자연산임을 유독 강조하였다. 충산 다음에 잠시 들르게 될 난핑(南坪)을 통과하고 나면 무산철광에서 나오는 폐수 때문에 산천어를 구경할 수 없다고 하니, 이번 답사에서 산천어를 먹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서울에서 먹는 민물 매운탕과는 달리 덜 맵고 된장을 풀어 넣었는지 걸쭉하였다.

아시아 최대 노천철광 무산광산과 북·중 경제협력의 현주소

난핑(南坪)에서는 북한의 무산을 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었다. 두만강 건너 무산 쪽은 강에서 바로 들판으로 연결되는 데 반해서 난핑 쪽은 제법 높은 절벽 아래로 두만강이 흐르는 지형 지세였다. 지형 때문에 무산이 멀리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2008년 북한 통계에 따르면, 무산의 인구는 약 12만 정도라고 한다. 한편 우리가 지나온 신의주의 인구는 약 36만, 혜산은 19만 정도니까 무산이 국경도시 중에는 3번째쯤 되는 큰 도시인 셈이다.

▲ 무산시 전경 ⓒ황재옥

무산의 풍경은 지금까지 지나온 북한 마을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강 바로 건너에 있는 협동농장은 조용하였지만, 좀 떨어진 왼쪽 광산 쪽에서는 길게 연결된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장면이 보였다. 그리고 철광석으로 보이는 돌덩이들이 산 중턱으로 흘러내린 모습과 먼지가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광경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광산 근처에 가본 적이 없는 필자로서는 무산의 모습이 꽤 신기했다. 철광석을 실어 나르는 트럭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다리를 건너 중국 쪽으로 오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아도 무산에서는 활기가 느껴졌다.

매장량이 45억 톤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무산철광은 아시아 최대 노천철광이다. 일찍이 김일성은 "무산광산은 우리나라의 보배입니다"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그 '보배'가 보배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 철광석을 캐내 제철을 해서 그 강철로 기계나 건축자재를 만들어 수출을 해야 경제가 좋아질 텐데, 북한은 지금 '보석'이 될 수 있는 돌을 그냥 '원석'으로 중국에 팔고 있기 때문이다.

▲ 무산철광 ⓒ황재옥

남북한의 철강 산업이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남한의 포항제철은 국내 자재만으로는 부족해서 밖에서 고철과 철광석을 들여다가 제철을 해서 내수와 수출을 감당하면서 세계 최대 철강회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은 최고지도자가 '보배'라고 칭송한 아시아 최대 노천철광을 손안에 두고도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포 쪽의 목재와 광물자원, 김정숙군의 석영, 혜산의 동광에 이어 무산의 철광석마저도 모두 원자재 형태로 중국에 팔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북·중 경제협력이 최근 단순한 교역 차원을 넘어 장기적이고 대대적인 자원협력 차원으로 변화해 나가고 있음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중국의 난핑과 북한의 무산을 잇는 철도 연결 사업이다. 무산과 무산철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던 높은 찻길에서 옌벤 가는 방향으로 좀 내려오면 평지가 나온다. 지금 중국은 그곳에다 무산의 철광석을 중국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기반시설을 건설하고 있다. 기존 철도가 들어와 있는 허룽(和龍)의 도심에서 난핑까지 41.68km의 철도 연결공사도 진행 중이다. 무산-난핑 철도 중국 쪽 초입에는 대규모 물류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작년에 이 지역을 다녀갔던 한 분이 말하길, 작년과 비교할 때 공사가 많이 진척되었다고 했다.

▲ 무산~난핑 철도 공사 현장 ⓒ황재옥

중국은 2015년까지 100억 달러(약 11조원)가 넘는 자금을 이곳에 투입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러한 대규모 공사는 일차적으로 북한산 지하자원 수입과 낙후한 동북지역 개발의 경제적 목적을 가진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북한의 급변 사태 시 신속한 군 투입 경로 확보 등의 목적도 있는 것은 아닐까? 동북공정 때문에 걱정 반 우려 반으로 이 같은 생각도 하게 된다.

무산철광의 철광석을 수입하는 중국의 톈츠(天池)공업무역은 지난 2005년 중국 국영 철강회사인 퉁화(通化)강철, 북한의 흑색금속수출입사와 3자 합작 방식으로 무산철광에 대한 50년 개발권을 확보했다. 톈츠(天池)라고 쓰인 빨간색 트럭들이 도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톈츠(天池)공업무역은 옌벤지역의 민간무역회사로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무산에서 생산된 철광석을 중국 시장에 내다 파는 통로 역할을 해 온 북한의 오랜 파트너 회사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귀국한 후 2012년 10월 현재 북·중간 철광 합작개발 조건을 둘러싼 줄다리기 때문에 철광석 수출입이 당분간 중지되었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무산 근처를 흐르는 두만강 물빛이 지금까지 보아 온 압록강이나 두만강물의 색깔과는 달리 회색을 띠고 있었다. 무산철광에서 흘러나오는 철광 때문에 강물의 색깔이 탁했다. 철광분 채취 작업이 붐을 이루면서 두만강 수질만 오염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철 성분을 추출하고 난 후 버려진 모래더미가 바람에 날려 강 주변의 식생과 농사에 영향을 주는 등 자연생태환경이 피해를 입고 있었다. 수질개선을 위한 오염처리 및 오염방지 계획을 중국이 추진하고 있으나 북한과 협조가 잘 안 되는 바람에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두만강 유역의 오염이 걱정 되었다.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 허룽-룽징-옌지

무산-난핑 철도와 난핑 물류기지를 보고 난 우리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허룽(和龍)과 룽징(龍井)을 거쳐 옌지(延吉)로 향했다. 허룽에는 조선족이 17만이나 산다고 한다. 허룽에서 룽징으로 가는 길에 잠깐 차를 세우고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비암산과 일송정을 바라보았다. 룽징이 지금은 중국 땅이 되어 룽징이라 불리지만, 원래는 1880년경 조선에서 건너와 살던 사람이 우물을 하나 발견하고 그 우물을 용정(龍井)이라고 부른 데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용정 우물 주변은 공원으로 꾸며져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었다. 룽징 도심 한가운데에는 일제강점기 3·13만세운동 현장이었던 용정중앙소학교가 있다.

▲ 용정우물 ⓒ황재옥

우리는 룽징에서 20km 떨어진 옌지(延吉)에 도착하였다. 자동차가 얼마나 많은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다웠다. 9월이면 1952년 옌벤이 조선족자치주가 된 지 60주년이 된다고 한다. 이를 알리는 입간판이 공항을 비롯하여 도시 곳곳에 세워져 있었고, 시내 여러 군데에서 토건공사가 한창이었다.

1992년까지 옌벤조선족자치주의 행정 수반인 주장(州長)은 물론 공공기관 간부 40% 이상이 조선족이었다. 중국의 56개 민족 가운데 고유의 언어를 가진 민족은 한족(漢族)과 티베트족, 위구르족, 몽골족, 조선족 5개뿐이라고 한다. 한때 중국에서 전국 도시 중에 두 개의 '옌'이 뜨고 있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중국 공산당의 혁명성지 옌안(延安)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개방과 한중수교 이후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옌지(延吉)이다.

옌지는 조선족 특유의 근면성과 한중수교 덕택으로 특수(特需)가 겹치면서, 중국에서 인구비례로 따져 영업용 택시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반면 성장과 호황의 후유증도 있다. 조선족들이 돈을 벌기 위해 중국의 대도시와 한국으로 떠나면서 1952년 옌벤 전체 인구의 74%에 이르던 조선족 비율은 2010년 36.7%로 떨어졌다. 이는 이 기간에 조선족 인구증가율이 둔화되기도 했지만 중국인의 연변 유입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소수민족이 자치주를 유지하려면 소수민족 인구가 지역 전체의 30% 이상이 돼야 하는데 2020년이 되면 조선족 비율이 10%대에 그칠 것이라고 한다. 조선족들이 풍요로운 삶을 위해 고향을 떠나는 것을 말릴 수는 없지만, 역사적으로 한민족에게 의미가 큰 간도(間島) 지역에서 조선족의 위상이 내려가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인구가 줄면서 각급 조선족 학교의 80%가 이미 문을 닫았다고 한다.

한편 옌지는 북한과의 교류도 많은 지역인데, 요즘 옌지에서 평양을 오가는 비행기가 하루에 2번 뜬다고 한다. 4700위안의 비용으로 5박 6일의 관광 상품이 등장하였고, 3박 4일 상품도 있다고 한다. 옌지에 사는 조선족들은 북한에 있는 친지 방문이 자유롭고, 북한관광도 자유롭게 하는 편이라고 한다. 북한이 관광사업을 통해 얼마나 많은 돈을 벌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북한의 개방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으리라는 점에서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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