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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예술의 전당'에 꽃피운 한국 미술의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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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예술의 전당'에 꽃피운 한국 미술의 혼 김영길의 '남미리포트' <335> 아르헨서 개인박물관 연 김윤신 교수
한때 한국에서 잘나가던 미대 주임교수가 교수직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후 25년 만에 개인 박물관을 개관해 현지 예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남미 예술의 전당'이라는 아르헨티나에서 한국 미술의 혼을 불어넣고 있는 화제의 주인공은 김윤신 전 상명여대(현 상명대) 교수다. 김 교수는 아르헨티나의 예술 세계와 때 묻지 않은 주변 환경들에 반해 지난 1983년부터 현지에 정착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조각가로 잘 알려진 김 교수는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5년간 조각과 회화를 공부한 후 성신여대. 홍익대. 청주사대를 거쳐 상명대 조소과 주임교수를 끝으로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28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자신의 개인박물관을 개관한 김 교수는 아르헨티나에 정착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 ⓒ김영길

"내가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건 1983년 12월이었다. 그때는 학기말 시험 기간이라 주임교수였던 나는 짬을 낼 수 있었고 혹시 아르헨티나에서 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나를 타진하기 위해서였다.

말로만 듣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나는 전혀 새로운 세계에 온 것 같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내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접해보지 못한 예술 세계를 만났기 때문이다. 특히 남미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나무와 돌 등 조각 재료들은 나의 넋을 빼앗아 갔다. 한국에서는 고액의 돈을 지불하고도 구할 수 없는 귀한 재료들이었다. 더욱이 광활한 대지와 때 묻지 않은 자연 경관은 황홀했다.

아르헨티나의 예술 세계에 흠뻑 빠진 나는 아르헨티나 예술계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내 작품을 전시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당시 이복형 대사를 찾아가 나의 뜻을 전했다. 이 대사의 주선으로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 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있던 로베르또 델 비쟈노 교수를 알게 됐는데 그는 지난 25년간 나의 열렬한 후견인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비쟈노 관장은 부에노스아이레스 현대미술관 전시를 결정하기 전 내 작품을 먼저 보고 싶어 했다. 당시 나는 주머니사정이 여의치 않아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각 빈민촌에 조그만 작업실을 구해 겨우 작업을 시작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연약한 동양인 여자가 조각을 하는 것을 지켜보더니 커다란 목재 재료들을 들쳐 매고 오는가 하면 이를 자르는 것을 도와주는 등 적극적인 보조역할을 자원해주었다.

전시작품 작업 확인차 현장을 방문한 비쟈노 관장은 나와 주변 모습을 보고 혀를 차면서 '세상에 이렇게 가난한 예술가도 있는가'라고 탄식했다. 당시 나의 작업실에는 앉아 편하게 이야기를 나룰 의자는 물론 흔한 커피 한 잔 대접할 찻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내 작품 전시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게 됐고 든든한 후견인이 돼주었다.

얼마 후 비쟈노 관장은 '당신의 작품은 미술관 등 실내보다는 야외전시가 적격'이라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명소인 빨레르모 공원 중앙에 전시장을 마련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빨레르모 공원에서 야외전시가 시작됐는데 시민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동양의 조형예술을 감상하려는 시민들이 줄을 잇자 시 측은 전시일정을 2개월로 연장했고 현지 언론들은 내 작품전시의 성과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내 작품이 현지 언론들에 의해 소개되자 이때부터 각 지역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의 전시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아르헨티나에 정착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한국의 가족과 친지들은 내가 교수직을 벗어 던져버리고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오빠는 '남들은 돈뭉치를 싸 들고 다니면서 교수직을 따려고 애쓰는데 너는 대학 측이 특별한 배려를 하고 있는데도 그 자리를 포기하느냐'고 난리를 치기도 했다. 심지어는 가족들과 나를 아는 분들을 배반했다는 소리까지 나오기도 했다."

25년 이상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하면서 느낀 한국 미술계에 대한 평가가 궁금했다. 김 교수는 한국예술계는 우리 고유의 것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보다는 외국의 작품들을 모방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 예술계는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한 한국은 유행을 따르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는 반만년 이상 되는 유구한 문화와 예술을 이어왔는데 이걸 무시하고 남의 것만 받아들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 것을 소홀히 하고 외국 것만 모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내 작품의 세계는 현지 토착원주민들의 문화와 예술의 세계에 한국적인 감각을 접목시킨 것이다. 내가 현지에서 호평을 받는 건 모방이 아닌 한민족의 혼을 예술로 표현하는 것 때문이라고 믿는다."

지난 25년 동안 김 교수의 친구이자 후견인 역할을 한 비쟈노 교수는 "김 교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술에 대한 그의 혼신의 노력과 열정에 감탄을 해왔다"며 "김 교수의 작품에는 동양과 서양의 정신이 함께 어우러져 있으며 동양적인 섬세한 조각의 선은 우주에 대한 통찰력이 특별히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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