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에게도 자기 재산을 사회에 내놓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 모두 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 이 소식은 평소 인병선 관장을 알아온 사람들에게는 별로 놀라운 게 아니다. 그가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일찌감치 감지됐다.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이었어요. 박물관 앞에 붙은 '사립'이라는 것 때문에 정부나 국민으로부터 개인 재산이라는 인식을 받아온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박물관 하는 사람들이 개인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안방에 두고 혼자 감상하지 뭐 하러 자기 돈 들여가며 박물관 문을 열어놓고 있겠습니까? 평생 걸려 어렵게 수집하고 보존해 온 귀한 문화재 아닙니까? 사립박물관을 돈 많은 이들의 여가선용거리로 보는 사회의 시각이 있습니다. 그게 늘 억울했지요. 물론 정책 당국자가 봤을 때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겠다 싶어요. 박물관 활동에 공익성이 있다고 인정해서 시설비 같은 것을 지원했는데 그 박물관이 어느 날 문을 닫아버리면 우리는 헛방이 아니냐 하는 염려가 들지 않겠어요? 그래서 국가 지원비는 사업비에 한정됩니다. 시설비는 절대 안 되지요."
▲ 인병선 짚풀생활사 박물관 관장. 그는 사립박물관이 정부나 국민으로부터 '개인재산'이라는 평가에 벗어나고 싶다면 형식에서도 공익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레시안 |
사립박물관이 정부나 국민으로부터 개인 재산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내용뿐만 아니라 점차 형식에서도 공익성을 띄는 쪽으로 가야한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재단법인화를 통해 박물관 경영의 투명성이 확립되기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더욱 신뢰받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는 설명도 인 관장은 빠트리지 않는다.
"내년이면 우리나라 박물관 역사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대한제국 시대에 생긴 최초의 박물관을 기준으로 한 것이지요. 그러나 본격적으로 사립박물관 등록이 시작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서였지요. 그때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지요. 그래도 지금 우리 실정은 일본의 10분의 1에 불과한, 그저 열악한 형편이에요."
인 관장은 그러나 사립박물관이 국·공립박물관의 기저가 되는 것은 확실하고 지적한다. 국·공립이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사립박물관이 맡아서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공립박물관에서 착안 할 수 없는 독특한 분야를 열수 있지요. 개인의 창의성이 돋보이는 내용이 가능하니까요. 우리 박물관의 경우만 해도 짚과 풀이라는 한 영역을 전문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아주 체계적으로 조사 연구하고 수집해온 것입니다. 종합박물관이 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지요. 특수전문 박물관이 많아져서 밑바탕을 이루면 국공립이 종합적으로 아우르는, 그렇게 역할을 맡아서 하는 게 우리나라 박물관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길입니다."
▲ "사립박물관의 유물들을 1세대 이후로도 이어가기 위해서 '재단 법인화'를 선택했다..." ⓒ프레시안 |
인 관장은 자신의 이번 결단이 어떤 면에서는 아주 개인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한다.
"이제 우리 같은 박물관 1세대들이 7, 80대로 접어들었어요. 인생의 한계, 죽음을 앞두고들 있지요. 그러면 그동안 해온 이 유물들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피할 수 없는 큰 문제에 봉착한 거거든요. 유물이란 게 공간을 많이 차지하잖아요. 박물관에 전시된 물건들은 전체 소장품의 절반에서 10분의 1에 불과한 것이에요. 그러니 그 공간적 비용이 상당하거든요. 열정을 가진 1세대는 그런 비용을 감당하지만, 남은 가족이 원하지 않는다면 굉장한 부담이 되는 거지요. 1세대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고 죽을 경우에, 자손 중에 누가 맡아하겠다면 그보다 다행스런 일은 없는 건데, 그게 아니면 포기해야지요. 국·공립에 기증하거나, 그냥 팔기도해요. 덩어리로 파는 게 아니라 장사꾼이 와서 좋은 물건만 골라 빼서 갈 경우 가장 안 좋은 거죠. 테마로 평생 수집한 것을 분리해 버리면 그 가치가 없어지는 건 당연한 것이고, 1세대의 공력이 완전히 무산되어버리는 것이지요. 더러 귀하게 일본 등지로 큰 뭉텅이로 팔려나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팔려가는 것이지요."
평생 수집해온 유물을 온 국민이 함께 뜻 모아 관리하는 체제로 가게 하는 게 바로 재단법인화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인 관장은 그래서 자신이 '머리를 썼다'고 표현한다. 자신의 평생 공력을 영구화시키기 위해서는 박물관 재단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인 관장의 결정은 사립박물관 쪽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어쩔까 고민하는 박물관 1세대들의 과감한 결단이 이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 인병선 짚풀생활사 박물관장과 권은정 전문인터뷰어(왼쪽). 뒤로 짚풀 생활사의 유물들이 보인다. ⓒ프레시안 |
인 관장은 등기이전을 하면서 건물 두 채를 통째로 '짚풀문화재단'에 넘겼다. 감정가 40억 원 되는 덩어리다 (강북이라 얼마 안 나간다는 설명이다). 그중 5층짜리 건물은 그에게는 특히 애틋하다. 그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삼남매를 키우고 학교를 보낼 수 있었다. 그 건물은 그의 인생에서 큰 기둥이었다.
"30년 전에 혼자 되고나서 10년 만에 매입한 건데, 그때 친정어머니 유산하고 제가 가진 것을 몽땅 털어서 샀던 것이지요. 얼굴이 퉁퉁 붓도록 출판사 번역 일을 하면서 봉급을 받아 모은 돈이 그 안에 있었어요."
그는 박물관 재단 법인화에 자녀들이 기꺼이 동의해준 점에 대해 특히 고마워한다. 재산이라는 문제는 미묘한 감정이 오가는 문제 아닌가. 어머니의 뜻과 명예를 가장 우선순위에 둘줄 아는 그들이 자랑스러울 것이다. 그는 남편에게도 물어보았을까? 인 관장의 남편은 시인 신동엽이다. '금강',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의 그 신동엽이다. 인 관장이 아직 서른 몇이었을 때 어린 삼남매를 아내에게 맡기고 세상을 떠난 야속한 남편이다.
"하하하… 그 양반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겠어요?"
▲ "신동엽 그 양반,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있겠어요." 인병선 관장의 남편은 고 신동엽 시인이다. ⓒ프레시안 |
짚풀생활사 박물관도 어쩌면 남편의 정신을 아내가 자신의 방식으로 구현한 게 아닌가 짐작된다. 박물관에 전시된 짚으로 만든 민구들이며 농기구들을 보노라면 신동엽 시인의 음성이 어디선가 분명히 들리는 것 같으니 말이다. '껍데기는 가라. /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시인은 농민에 대한 애정이 컸던 사람이지요. 짚풀 문화를 키워오는데 그 양반의 영향이 분명히 있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리고 인 관장에게 영향을 끼친 남성이 또 있다. 그의 친정 아버지다. 부친은 일제시대 유명한 농촌경제학자인 인정식 선생이다. 지금 인 관장의 서재에는 부친의 농촌경제 이론서적들이 가지런히 꽂혀있다. 그의 짚풀 문화사랑은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안남도 용강에서 대지주였던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나눠주었던 친정 부친을 통해 이 땅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진작부터 알았다. 농사짓는 이들이 곁에 두었던 짚이나 풀은 본질적인 그 무엇이었다.
▲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에서 남아남는 것이 없던 박정희 정권 시절, 누군가 한 사람은 허망하게 사라지지 않도록 붙들어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프레시안 |
올해로 인관장이 박물관을 운영해온 지 16년이 된다. 그가 처음부터 박물관을 염두에 둔 것은 물론 아니다. 그의 짚풀 이야기는 한 문화 답사팀에 속해 다니다가 우연히 햇 볏짚으로 갈아입은 초가집을 보면서 시작되었다.
"그때가 30년 전이지요. 박정희 정권이 새마을 운동으로 밀어붙이면서 농촌에서는 남아 남는 없었어요. 초가지붕은 전부 슬레이트로 바꾸고 길을 넓히느라 집들은 순식간에 없어지고.... 모든 게 썰물처럼 빠져나갔지요. 그때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지게 해서는 안되겠다, 누군가 한사람은 이걸 붙들어 남겨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리고 자신이 그 '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한 연민과 사명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사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지성인 인병선은 삶의 본질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평생 시인으로 살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시집을 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시인은 내가 아니라도 이 땅에 수천 명인데, 짚풀 문화를 하려는 이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결심했다. 그 다짐을 하면서 그는 엄청난 금맥을 하나를 잡은 듯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다니면 다닐수록, 캐내면 캐낼수록 우리 농촌에 묻혀있던 문화적 재산이 무한정으로 나오니까 기가 막히더라는 말이었다. 매일 감탄하면서 다녔단다. 그때 지고 다녔던 무거운 카메라와 녹음기 때문에 인관장은 지금도 다리가 아프다.
▲ "짚이나 풀이 우리 시대에는 어떤 가치를 갖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있나 되살리고 발전시키는게 중요하다 싶었다." ⓒ프레시안 |
농촌 사람들조차 '이까짓 거'하면서 내다버리는 농기구나 민구들을 정성스레 수집해 보관하면서 갈 데 없어 유랑하던 농촌의 정신이 그의 집안에 들어찼다. 쌓여가는 귀한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보여주며 가르쳐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박물관이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짚풀생활사 박물관은 초등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이다. 특히 방학 때가 되면 체험 학습으로 온 아이들로 박물관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짚을 손에 잡고 계란 꾸러미며 재밌는 동물 모양을 만들어 내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란다. 짚풀에 대한 일반인들의 애정이 커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그에게 큰 보람이 있을까.
"박물관을 세우면서 처음엔 우리조상은 짚과 풀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나 하는 것을 보여주면 되겠다 싶었는데 그것만큼이나 짚과 풀이 현재 우리시대에는 어떤 가치를 갖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 되살리고 발전시키는 게 중요하다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과의 소통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요."
인 관장은 박물관의 역할이란 게 단순히 보여주는 것 이상의 사회적, 교육적 기능이 있어야한다고 강조한다. 외연을 확대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자신이 수집한 수천 점의 짚풀 관련 자료를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큰일도 해내면서 농촌 교육 현장에서 사용될 공예기법을 담은 CD 제작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박물관의 현대적 기능에 대한 인식은 뛰어나다. 올 한 해 동안 짚풀박물관이 보여준 각종 프로그램은 그가 얼마나 시대를 읽는 탁월한 시각을 가진, 다이내믹한 박물관장인지를 보여준다. 몇년 전부터 진행해온 장애인과 치매노인들 대상 짚풀공예 놀이 사업은 획기적이기까지 하다. 또 결혼 이주여성들에게 짚풀 문화를 소개해 주면서 서로 이해하는 길을 터준 것도 아주 뜻 깊은 일이다. 또 있다. 지난 한가위쯤에 서울시내 거주 노인들에게 짚풀 축제 멍석을 깔아 드린 일이었다. 마당에서 지푸라기로 노인들은 새끼도 꼬고 짚신도 만들고 둥구미도 만들었다. 그전까지 분명히 농부였을 노인 분들은 짚멍석 위에 둘러 앉아 오랜만에 속 깊은 향수를 만끽할 수 있었다.
인 관장은 짚과 풀에 관한한 우리 안에 정신적 DNA가 있다고 믿는다.
"아이들이 쌀밥을 먹으면서도 벼를 모르지 않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볏짚을 좋아해요. 여름에는 짚냄새가 나는데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게 아니거든요. 볏 짚단을 물에 축여놓으면 짚 냄새 좋다, 하면서 몰입해서 만드는 거예요. 치매노인 분들이나 장애인들도 아주 좋아해요. 불가사의한 어떤 끌림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 인 관장은 짚과 풀에 관한한 우리 안에 정신적 DNA가 있다고 믿는다. ⓒ프레시안 |
우리는 원래 농사를 지으며 짚이엉을 이고 살았던 민족이다. 인 관장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짚과 풀의 혼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그 혼, 그 정신이 바로 짚풀 문화를 확장시키고 뿌리 내리게 한 힘의 원천이다.
거칠고 가치 없다고 홀대받는 짚풀을 만지며 뚜벅뚜벅 걸어온 인 관장이다. 그 길이 분명 외롭고 고단했을 텐데 단 한 번도 탄식하지 않고 안달하지 않으며 할 일을 해왔다. '짚풀문화'라는 말을 우리 앞에 던져준 사람. 사립박물관 재단법인화는 이 시대 문화의 빈 들녘에 던지는 인병선의 풍성한 짚단더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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