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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천국' 스웨덴, 안정적이다 못해 죽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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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복지 천국' 스웨덴, 안정적이다 못해 죽은 나라? [정치경영연구소 유럽르포]<3> 스웨덴, 세계 경제위기에도 불안하지 않은 이유
'정치경영연구소의 유럽르포'는 우리 시민들로 하여금 유럽의 정치사회와 경제사회에 친밀감을 갖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연재물입니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이유 등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해방 후 지금까지 지나칠 정도로 미국 편향적인 모델을 지향해왔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는 시점에 즈음하여 우리 시민들도 이제 새로운 모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이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것이 그 증거입니다.

경쟁과 성장 그리고 효율성의 가치만을 강요해온 과거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연대와 분배 그리고 형평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들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는 우리 시민들이 이제 미국이 아닌 유럽사회를 유심히 관찰해보길 원합니다. 특히 유럽의 합의제 민주주의와 조정시장경제가 어떻게 그곳 시민들의 삶을 그토록 느긋하고 여유롭게 만들어주었는지 자세히 살펴보길 바랍니다.

'유럽르포'의 작성자들은 현재 유럽의 여러 대학원에 유학 중인 정치경영연구소의 객원 연구원들입니다. 투철한 문제의식으로 유럽을 배우러 간 한국의 젊은이들이 보고하는 생생한 현지의 일상 생활을 <프레시안>의 글을 통해 경험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유러피언 드림'을 같이 꾸길 염원합니다. 필자 주


엘리트가 금기시되는 사회, 스웨덴

1등부터 꼴등까지 순서대로 앉는 교실이라든지, 우열반과 특별반을 위한 시험이 있는 학교의 모습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학생이었던 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시스템에 불만이었지만 막상 시험 성적대로 자리를 배치하고 나면, 그 자리 배치 제도가 불만인 학생들도 한 자리 한 자리 1등 자리를 향해 바뀌는 희열을 느끼기도 하고 시험성적 자체에 대한 동기부여가 강력하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스웨덴에서 이런 이야기가 불거져 나온다면? 아마도 그 학교가 있는 지역사회와 부모 및 학생들이 들고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스웨덴 친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로컬 뉴스에 따르면 보수당 정권이 들어선 이래로 고등교육에 엘리트반을 편성하도록 점차 변화해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팽배한 여론은 평등한 교육을 해야 한다는 쪽에 있다.

평등주의가 강조되고, 부족한 학생들의 도태를 방지하는 것에 가장 중점을 둔 스웨덴 교육은 비단 교육이라는 범주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교육은 직업으로 연결되고 국민의 일자리는 곧 그 나라의 경제적, 사회적 기틀이 된다. 종종 가이드나 통역 일을 할 때, 세계대학 랭킹이 큰 의미가 있는 우리나라의 인식으로 웁살라 대학이 스웨덴에서 최고가 아니겠냐며 물어 오시는 한국 분들이 꽤 있었다. 그러나 막상 스웨덴에서 일류 대학, 가장 좋은 대학을 꼽으라면 스웨덴 사람들은 망설인다. 학문분야에 따라 또 그 세부 분야에 따라 답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하나의 답을 낼 수는 없단다. 오히려 그런 질문 자체를 던지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반면, 우리나라의 모든 수험생들은 일제히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름의 이유는 소위 말해 일명 엘리트 코스가 한국사회에 명실상부 존재하기 때문이며, 스웨덴에는 그런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 중앙도서관 전경 ⓒ정영은

한국은 여전히 대학이라는 꼬리표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한 보증 수표가 되고, 직장은 내 집 마련, 안정된 삶의 또 다른 보증 수표가 되어버린다. 결국 사회의 약자로 시작하여도 서열화 된 계단을 올라가면서부터는 한 발자국도 내려가지 않기 위해서 온 사회가 자유경쟁을 외친다. 그리고 뿌리 깊이 서열화 된 사회에서 또 다른 기득권과 보수층의 일원이 되거나 이를 열망한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에서 모두가 원하는 안정된 삶은 개개인의 경제와 바로 직결되고 이를 위해서 대학입학은 그야말로 치열한 전쟁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소득과 상관없이 안정된 삶을 국민 모두가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 온 스웨덴은 어떨까. 1930년대 집권당이었던 사민당은 국가가 국민 개개인의 순간의 실수와 한 번의 사업 실패, 뜻하지 않은 불운의 병으로 개인의 삶이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국가가 국민의 집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발전해온 사회에서 서열화 없이 모두에게 6세부터 대학원교육까지 무료로 열려 있는 교육 시스템은 스웨덴 평등주의의 현장이자 주춧돌인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부자도 거지도 없다

한국에 잠시 살다 온 스웨덴 친구가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에서는 거리나 지하철에 구걸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마음이 안타까운 적이 많았다는 말을 해왔다. 스웨덴은 그에 비해 그렇게 잘 사는 부자도 그렇게 굶어 죽는 거지도 많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나는 2008년 스웨덴에서 한 학기 동안 살다가 다시 2011년 스웨덴에 돌아왔을 때, 고작 3년 만에 눈에 띄게 길거리 부랑자가 많아졌다고 느꼈다. 스웨덴도 변하고 있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 통계에 의하면 일정 거주지가 없는 사람의 수가 1만8000명에서 3만4000명으로 두 배가량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스웨덴에 왜 이런 변화가 생겨나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스웨덴은 빈부격차가 적은 나라로 꼽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많이 언급되는 것이 지니계수라는 것인데,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0에 가까울수록 소득격차가 적고 1에 가까울수록 격차가 크다는 것을 나타낸다. 스웨덴은 2012년 0.24로 한국의 0.32, 미국의 0.38, OECD 평균 0.31보다 훨씬 낮은 수치를 보여서 국민 간의 소득수준이 보다 균형 있게 분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누구든 어떤 교육을 받든지 어떤 가정환경에서 태어나든지 국민의 소득은 결과적으로 별반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간에 그 결과로 얻는 경제적 수입 자체는 어느 정도 수준에서 수렴되도록 사회가 합의하고 있다는 것. 어떻게 그런 합의가 각기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각기 다른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능한 것일까. 처음에 나는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회적 합의'는 스웨덴의 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개념으로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곳에 살츠회바덴(Saltzshöbaden)조약이 있다. 살츠회바덴에서 경영자 협회(사용자 조직)과 스웨덴 노조가 대 타협을 통해 그간의 파업을 마무리 짓고 노동시장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는 후에 대기업의 임금은 동결하고 중소기업의 임금은 끌어올리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이에 따라 올라간 임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중소기업은 정리되었고 동결된 임금으로 더 많은 투자를 대기업이 할 수 있었기에 탄탄한 기업들만이 남아 비약적인 스웨덴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노동자-사용자의 연대, 중소기업과 대기업 노조의 연대, 사민당과 농민당(현 중앙당)의 연대를 유지하는 상생과 통합이라는 스웨덴의 '문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크게 대두되었던 '대통합'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말에서 그치지 않고 스웨덴의 역사처럼 현실로 보여준다면 어떠한 결과들을 기적처럼 가지고 올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스웨덴의 30년대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나으면 나았지 못하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길거리에 늘어난 부랑자는 최근 들어 스웨덴으로 망명을 신청하는 난민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 해만 해도 2011년보다 50%가량 증가한 2만9000명이 스웨덴으로 난민 신청을 하였다. 이민자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우익 보수당과 일부 여론도 당연히 있지만, 아직도 대세인 여론은 국제 사회의 문제에 스웨덴이 외면할 수는 없으며 더 적극적이고 우호적인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쪽에 있다. 국가의 경제적 이익이나 민족의 차원을 떠나서 많이 가진 자가 약자에게 더 많이 배려하고 많이 내려놓아야 한다는, 당연해 보이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생각이 국민의 생각과 가치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스웨덴 노동자 조합, 경영자 조직이 이룬 대타협과 그로부터 계속 지켜져 온 연대임금제도, 스웨덴의 재벌기업인 발렌베리를 평범한 뉴스거리이자 역사로 체험한 사람들에게 화학과 통합을 위한 노력은 생고한 일이 아닐 것이다.

상식이 통하는 나라

스웨덴에 살면서 나는 때때로 스웨덴 사람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국민성이나 시민의식,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스웨덴 정책 사이에서 어느 것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 일까 닭이 먼저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보편적 복지정책이 화두가 되는 한국 사회에서 더 많은 복지를 위해 당연히 높은 세금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높은 세금을 내는 것은 반대하는 아이러니한 우리 국민의 심정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달걀과 닭 중 무엇이 먼저인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느 쪽이든지 먼저 굴러가기 용이한 쪽부터 시작하면 되는 것이 '달걀-닭 시스템'이 아닐까. 세금의 운용을 신뢰하지 못하는 국민에게 무작정 더 많이 세금을 내야 된다는 말은 더 큰 불신만을 안겨줄 것이고 그런 불신 가득한 국민을 지금 달랠 수 없다면 국가가 불신을 주지 않는 사회로 먼저 거듭나면 되는 것이다. 스웨덴은 이미 가장 높은 세금을 내는 나라로 유명하지만 세금을 더 높이겠다고 해도 국민들은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세금이 그대로 다양한 분야의 복지를 통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 세대에 걸쳐, 국가를 통해 보고 겪어왔으며, 이를 통해 국민은 이미 세금과 정치에 대해 두터운 신뢰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 스웨덴 국회의사장 전경 ⓒ정영은

이미 한국에서도 여러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방송되었듯이 스웨던에서 공무원과 국회의원은 우리나라만큼 스웨덴에서 그렇게 선호되는 직업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특권도 없고 누구보다 더 모범적이고 솔선해야 하는 직무이기 때문에 어느 직종의 종사자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공직자의 모습과 투명한 정책결정과정과 운용은 정치를 신뢰하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국민성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 대선 후보였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전 원장이 한 프로그램에 나와 정치적 성향을 묻는 질문에 자신은 굳이 말한다면 '상식파'에 속한다고 한 적이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 보수-진보 정치세력은 '그럼, 우리가 상식적이지 않다는 언급이냐'며 여기에 발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비단 안철수 전 원장뿐만이 아니라 평범한 나를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이 한국 정치에 불신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국회의 몸싸움이 담긴 사진이 여러 나라에 뉴스를 통해 퍼졌다는 사실은 우리의 얼굴을 불그락 거리게 한다. 공부할 필요 없이 돈만 많이 벌면 되는 거라고 배웠다는 열두 살 초등학생이 내게 던진 씁쓸한 말이 무수히 쏟아지는 정치인 비자금과 친인척 비리 뉴스와 무관할까.

스웨덴에서 사업을 하는 한 친구가 한국과 스웨덴과 사업할 때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 기업과 비즈니스를 시작하면 무조건 첫 단계부터 마지막 단계까지 해야 하는 것이 '접대'라고 했다. 반대로 스웨덴에서 이 관습대로 돈을 찔러주었다가는 절대 비즈니스가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탄탄대로인 한국과 비즈니스하기가 편하다고 귀띔해주었다. 이게 무슨 황당한 칭찬인가. 법도 정치도 신뢰하지 않고 돈을 신뢰하는 사회에서 상식이 통할 리 없다.

반면, 한국사회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스웨덴은 답답하리만큼 상식적인 구석이 있다. 아주 친한 스웨덴 친구가 일하는 펍에 길게 줄이 늘어져 있었는데 자신 먼저 좀 들여보내 달라고 했더니 얼굴을 정색하고 차갑게 거절해서 놀랐다는 한국인의 이야기나, 스웨덴 남자친구와 밥을 먹었는데 자신의 음식 값만을 잔돈까지 정확하게 테이블에 올려놓았다는 이야기는 아주 처음 스웨덴에 왔을 때 나를 놀라게 했던 이야기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의사가 한 환자를 진료하는 평균 시간이 30분이 넘는 게 당연하다는 것, 스웨덴 국회의원이 비행기 비즈니스석을 타고 공무수행을 했다는 사실이 뉴스에 보도되어 엄청난 비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들은 나중에 사회로부터 당연한 것처럼 인식하던 많은 일들이 상식적인 수준을 벗어난 것을 깨닫는 놀라움 이상의 것이었다.


안정되다 못해 죽은 나라?

얼마 전 스웨덴을 다녀오셨다는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스웨덴은 죽은 사회라고. 가보았더니 사람들이 참 흥이 없더란다. 사실 통틀어 두 해를 꼬박 스웨덴에서 살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스웨덴을 죽은 사회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하지만 한국과 비교하자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후 5시 무렵 퇴근해서 회식문화 없이 집으로 들어가고, 길거리에는 몇 레스토랑이나 펍을 제외하고는 7시면 문을 걸어 잠근다. 특별히 도움을 요청하러 누가 다가가지 않으면 웬만해서는 먼저 다가오지 않는 스웨덴 사람들의 특유의 차가움과 거리감이라든지, 앞서 말했듯이 자칫 융통성 없이 보이는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의 모습이라든지, 만취한 사람들이 길을 누비지 않는 밤거리의 분위기라든지 하는 것은 때때로 이 도시에 아무도 살지 않는가 하는 상상마저 들게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 겉으로 썰렁해 보이는 사회 속 가정을 들여다보면 어떤 느낌일까.

▲ 스웨덴 가정집 ⓒ정영은

한국에서 밤 열한시가 넘어 카카오톡 메시지가 날아올 때가 있다. 아직도 야근 중이라고. 그래 이게 한국이지 싶다가도 잠시 후 회식 중이라며 또 다른 메시지가 들어올 때 왠지 모를 짠함이 밀려 들어오고 만다. 그 친구는 충분히 이 젊은 날의 흥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스웨덴에서 교육청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와 일반 전기 관련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 병원에서 일하는 친구 모두 모여 저녁을 먹던 평일 저녁 6시. 평범해 보이는 저녁식사가 한국에서도 가능할지 잠시 의문이 들었다. 스웨덴에서는 집에서의 시간, 가족과의 시간이 일하는 시간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는 정책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인식으로 뿌리 깊이 그렇게 박혀있다. 가족과 매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종종 손님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 아주 평범한 직장인 가족의 일상이다. 주당 40시간 근무, 초과근무 연 200시간 이내, 야간 근무 제한이 명시된 스웨덴의 노동시간 법은 자그마치 80년간 큰 변동 없이 하나의 노동 문화로, 사회 문화로, 가정 문화로 지켜져 왔다. 몇 해 전 총리직 유력후보였던 뉘그렌이 사퇴한 이유는 현재 자신의 자녀가 초등학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사회가 너무나 당연하게 용인하였고 '이해'하였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이 아닌 모두에게 오는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굉장히 평범하고 이상적인 삶을 당연하듯 모두가 누리는 스웨덴 사회가 우리에게는 가끔 지나치게 안정되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 같다.

죽은 듯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이 보이는 스웨덴이 나는 사실 상식의 힘이 가져온 안정된 사회의 모습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한 기사에서 미국과 스웨덴 기업이 어떤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매우 다른 모습이 관찰된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미국 기업은 그 프로젝트에 맞는 최고의 전문가들을 각 방면에서 섭외해 바로 투입한 뒤 진행 과정 중에 문제가 생기면 그 때 그 때 풀어나가며 프로젝트를 완성한다고 한다. 그러나 스웨덴 기업은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1년 넘는 기간 동안 이 프로젝트에 대해 계획하고서야 실행에 옮기는데 이후 실행 과정 중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은 이미 1년 동안 다 예상하고 계획한 범위 내에 있는 일이기 때문에 '문제'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도 미국과 비슷하게 일단 일을 밀어붙이고 나서 생기는 문제를 감당하다 사업이 무너지기도 하고 정책이 실패로 끝나기도 하는 반면, 빠른 성과를 보여주는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웨덴은 모든 정책 결정이 컨센서스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정책결정에 영향을 주고받을 모든 집단의 소속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절충안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스웨덴 정책통과는 평균적으로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렇기 때문에 통계나 리포트가 많이 보고되지 않는 나라 중에 하나라고 하는데 겉으로 보면 꼭 멈춰버린 나라 같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 수많은 이익 집단의 합의와 절충, 충분한 문제 예상과 검토는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상식의 답안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자 결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와도, 많은 난민이 이주를 해 온다 해도, 스웨덴은 쉽게 불안하지도 쉽게 무너지지도 않을 것이다. 탄탄한 공든 탑 위에 또 다른 합의점과 또 다른 장기적인 대책을 공들여 쌓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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