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EU 정상들이 특별회의를 열어 재정위기에 빠진 그리스를 지원하는 데 합의했지만, 구체적인 방안이 빠진 정치적인 선언에 그치자 EU와 유로존의 모순이 드러났다는 실망감이 유럽 금융시장에 퍼졌다.
그리스 사태로 국가별 경제력과 재정건전성이 천차만별인 EU 회원국들과 단일통화로 묶인 유로존의 취약점이 부각된 것이다.
▲ 지난 11일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 특별회의 참가국들의 국기가 늘어서 있다.. 이 회의에서는 그리스 지원 문제가 논의됐으나 선언적인 수준의 합의에 그쳤다. ⓒ로이터=뉴시스 |
'비온 뒤에 땅이 굳듯' 이번 사태가 각국 재정정책에 대한 EU의 통제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지난해 12월 리스본조약 발효 이후 '유럽합중국(USE)'로 가는 통합의 발판이 강화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유럽 단일통화 실험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며 '분열의 씨앗'으로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그리스 사태가 포르투갈과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로존의 약한 고리로 번지면서 독일이 주도적으로 창설했던 유로화의 안정성이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뉴욕타임스(NYT)의 분석이 대표적이다.
EU와 유로존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할 독일도 '제 코가 석자'라는 말이 나올 만큼 재정적자가 심각한 탓에 그리스 지원에 적극 나설 처지가 아니다.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 등 독일의 유력 언론들은 '재정 부실 회원국'은 강력한 구조조정이나 퇴출 대상이지 통합을 위해 억지로 끌고 갈 수 없다는 원칙론을 거론하며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 사태를 둘러싸고 유럽 내부의 파열음이 커지자, 일각에서는 유럽 통합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이번 사태의 배경이 아니냐는 음모론도 나오고 있다.
EU 회원국들은 재정적자와 국가채무 비율이 각각 국내총생산(GDP)의 3%와 60% 이내로 규제되고 있는데, 어떻게 GDP 대비 재정적자가 10%가 넘고, 국가채무가 GDP 대비 100%가 넘도록 방만하게 재정을 운영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월스트리트가 그리스 사태 등 유럽 금융위기 악화시켜"
이에 대해 14일 <뉴욕타임스(NYT)>는 월스트리트가 이번 사태와 관계가 있다고 분석해 주목된다. 월스트리트가 유럽의 부채 문제를 직접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미국발 금융위기를 부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비슷한 방법으로 그리스 등의 재정 문제를 조장했다는 것이다.
'Wall St. Helped Greece to Mask Debt Fueling Europe's Crisis'라는 분석기사(☞)에서 <뉴욕타임스>는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촉진한 것과 비슷한 월가의 수법이 유럽 정부들이 늘어나는 부채를 은폐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리스를 뒤흔들고 유로 통화체제를 흔든 금융위기를 악화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리스의 경우 10여년 전부터 유럽의 부채 제한 규정을 피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대표적인 사례는 골드만삭스와의 거래를 통해 유럽연합(EU)의 예산 감시를 피해 수십 억 달러를 부채에서 제외한 것이다.
그리스의 부채 위기가 수면 위에 떠오르기 3개월 전인 지난해 11월 초까지도 부채의 실상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당시 골드만삭스의 최고운영책임자(COO) 개리 콘 등이 그리스를 방문해 의료보험기금의 부채를 훨씬 미래의 시점에 잡히도록 하는 금융설계 방안을 제안했다.
이런 수법은 부채 상환이 어려운 주택 소유자가 추가 담보대출을 받아 신용카드 빚을 갚도록 한 방식과 흡사하다.
예전에는 이런 수법이 통했다. 2001년 그리스는 유로존에 가입한 직후 골드만삭스와 대출을 통화교환처럼 처리하는 거래를 함으로써 유럽의 부채 제한규정에 맞추면서도 능력을 벗어나는 자금을 계속 조달할 수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골드만삭스, JP모건체이스, 그리고 다른 많은 은행들은 그리스, 이탈리아 등의 정치인들이 추가 대출을 은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폭로했다.
여러 가지 거래를 통해 은행들은 나중에 생길 돈을 가져갈 권리를 대가로 회계장부에 대출로 잡히지 않는 자금을 빌려주었다. 그리스의 경우 이런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공항이나 복권 등에서 생기는 수입을 가져갈 권리를 팔아 넘겼다.
그리스의 3000억 달러 부채의 비결
회계장부에 이런 자금은 대출로 잡히지 않기 때문에 한 나라의 부채가 실제로 어느 정도나 되는지 투자자나 감독당국이 알기 힘들다.
그리스는 전세계에 무려 3000억 달러(약 360조 원)나 되는 부채를 지고 있다. 대형은행들이 이런 부채 대부분의 자금을 제공했다. <뉴욕타임스>는 "그리스는 이른바 금융업체로 치자면 망하게 내버려둘 수 없을 만큼 큰 이른바 '대마불사'급"이라면서 "부도가 나면 전세계에 큰 타격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리스가 '거대한 부실기업'처럼 막대한 자금을 월가로부터 빌릴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월가의 금융업체들은 그리스 등 여러 나라들이 상환 능력을 넘는 규모를 완전히 합법적으로 빌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국가가 국방비와 의료복지 등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규제하는 법적 장치는 거의 없다. 국가채무 시장, 월가에서는 정부 대출로 부르는 이 시장은 규제가 없는 만큼 엄청난 규모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월가의 금융업체들은 흥청망청 돈을 쓰는 정부들과 짭잘한 수익을 내는 공생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글로벌 자본시장의 취약성을 감시를 담당하는 캘리 시내시는 "정부가 속이려들면 속일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를 일으킨 정부들은 세수를 늘리거나 지출을 줄이기보다는 파생상품을 이용해 부채가 줄어든 것처럼 보이는 방식을 썼다.
그리스에서는 이른바 국유 재산에 대한 대대적인 세일을 했다. 공항과 고속도로 등을 담보로 돈을 끌어다쓴 것이다. 예를 들어 향후 들어올 공항 입국 수수료를 준다는 조건으로 돈을 미리 당겨 쓰는 것이다. 이런 거래는 회계장부에 부채가 아니라 판매로 잡혔다.
2002년 유럽연합은 이런 거래를 판매가 아니라 부채로 수정할 것을 요구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런 회계기법들은 단기적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오르그 알로고스푸피스 전 재무장관은 자신이 취임하기 전에 이뤄진 골드만삭스와의 거래에 대해 "이 거래로 2019년까지 골드만삭스에 엄청난 지불을 하게 됐다"고 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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