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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을 '협력'으로 전환하는 히든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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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을 '협력'으로 전환하는 히든카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한반도포커스'] 남북관계 지름길 頂上서 찾아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발간하는 <한반도포커스> 6호(2010년 3~4월호)를 전재합니다.

<한반도포커스>는 극동문제연구소의 교수진과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한반도 문제 관련 정책소식지입니다. 이번 6호는 '남북정상회담, 가능성과 조건'을 주제로 6편의 글이 실렸습니다. 3월 첫째 주 동안 매일 1편씩 소개됩니다.

1972년 설립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는 북한·통일 문제에 관한 연구와 정책 제안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 최고의 민간 연구기관입니다. <편집자>


<전체 내려받기>











제6호(2010년 3~4월호) 남북정상회담, 가능성과 조건

역대 정부는 남북간 반목과 대립의 관계를 청산하여 화해·협력의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와 공동번영 그리고 민족통합을 이루는데 목표를 두고 대북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남북간에는 여러 분야에서의 대화와 교류·협력이 추진되었지만, 남북정상회담만큼 실효적이고 성과있는 결과를 도출한 것은 없다.

이러한 점을 감안, 역대 정부가 남북간의 근본문제 및 제반 현안의 해결을 위해 정상회담을 추진 해온 것이다. 과거 남북정상회담의 역사를 보면, 역대 정부 모두 회담 성사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끊이지 않은 정상회담 노력

박정희 정부는 1970년대 초반 미·중 정상회담 및 관계개선과 미·소 데탕트 분위기속에서 남북고위급접촉을 추진하여, 「7.4 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하였다. 그러나 정상회담 개최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88 서울 올림픽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과감한 선택을 하였다. 아웅산 폭탄테러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북한의 수해지원을 과감히 수용했고, 이 계기를 적십자회담과 경제회담으로 이어가는 가운데 정상회담 개최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한반도에서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데 남북이 공감대를 이루었으나, 통일방안 등에 대한 견해차이로 정상회담이 무산되었다.1)

노태우 정부에서는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되었다. 당시 정부는 공산권 국가들과의 적극적인 수교와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한반도 주변열강의 남북한 교차승인 등을 통해 남북한 평화공존을 추구하였다. 특히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채택될 기본합의문서에 남북한 정상이 만나 직접 서명하고 관계개선을 촉진시킬 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정상회담을 추진했지만, 통일방안 등에 대한 이견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2) 그 이후로도 정상회담 개최 문제가 논의 되었지만 실현되지 못하였다.

김영삼 정부는 북핵문제로 남북관계가 어려운 상황에서 카터 전 美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회담을 앞두고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여 정상회담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남북 '정치·외교 수요' 정상회담 이끌어

김대중 정부는 일관된 대북포용정책으로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당시 한반도는 1990년대 초 국제냉전 종식, 개방과 화해·협력의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 분단과 대결의 외부환경 소멸 등과 북한의 극심한 경제난 등으로 인한 체제 불안정으로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 하에 있었다. 이에 우리가 남북관계를 주도할 수밖에 없는 점을 감안, 대북전략으로서 '화해·협력정책'과 국제협력을 통한 '포괄적 접근방안'(1999.9 美 페리보고서 발표)을 적극 추진하였다.

또한 남북관계를 평화공존을 위한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통일 보다는 공존에 무게를 둔 가운데 정치·경제·사회·문화 교류와 협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금강산 관광(1998.11)을 비롯하여 각종 남북교류·협력 사업 등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베를린선언'(2000.3)을 통해 4대 실천과제를 천명하는 등 대북 포용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1998년 김정일 체제 출범 이후 북한의 일관된 대외 정책목표인 동시에 최대의 관심사는 경제난 지속 등으로 인한 체제위기를 극복하고 체제안전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북한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북·미관계를 비롯한 대외관계 개선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 및 일본과의 수교를 비롯한 대외관계 개선을 위해서 남북간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남측으로부터의 경제지원과 협력이 긴요하다는 현실적인 수요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남북 쌍방의 이러한 수요들이 감안되어 분단 반세기만에 최초로 제1차 남북정상회담(2000.6)이 열리게 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시부터 제2차 북핵위기 발생과 한미동맹 재조정 문제 등이 남북관계에 그대로 연계되어 대북정책 추진환경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제2차 북핵 위기는 남북관계가 정부 출범부터 시련을 겪게 만든 직접적 요인이 되었다. 북핵 상황의 악화로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더욱 강경해짐에 따라 남북관계 추진 속도가 조절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북핵 문제를 이유로 남북관계가 중단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북핵 상황의 악화를 해결하기 위해 남북관계를 꾸준히 추진해온 토대를 바탕으로 국면을 돌파하기 위한 노력을 다했다. 또한 부시 행정부를 적극 설득하여 대북협상에 나서도록 지속적으로 촉구하였다. 2005년 6월에는 통일부장관과 김정일 위원장간의 '6.17 면담'을 통해 남북관계 복원 및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적극 설득하였다. 3개월 뒤 6자회담을 통해 「9.19 공동성명」이 도출되는 등 북핵문제 해결의 일정한 진전을 가져왔다. 당시 정부는 북핵문제 해결의 진전이 전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정상회담 개최가 현실적인 제약을 지닐 수밖에 없으며, 개최되어도 의미있는 합의를 도출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정상회담이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유용하다는 인식 아래 계기마다 정상회담을 꾸준히 추진해 오고 있었다.

「9.19 공동성명」(2005.9) 이후 핵문제 진전으로 정상회담 개최문제가 논의되었으나,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 발생으로 「9.19 공동성명」 이행이 지연 되면서 무산 되었다. 더욱이 북한이 미사일 발사(2006.7) 및 제1차 핵실험(2006.10)을 실시함으로써 6자회담 중단과 대북제재 조치가 취해짐에 따라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가 경색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악화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북·미접촉(2007.1, 베를린)이 재개되어 사실상 출구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6자회담이 재개되어 「2.13 합의」(2007.2)가 도출되는 등 「9.19 공동성명」이 본격 실천·이행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BDA문제도 해결(2007.6)되었다. 남북정상회담의 개최 분위기 및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그 결과 2007 남북정상회담 개최(2007.8.28-8.30)가 합의되었다.(북한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수해로 인해 10월 3일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로써 남북정상이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발전문제를 포괄적으로 협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또한 정부는 당시 한반도와 동북아 차원의 안보·경제질서 재편과정에서 남북정상이 직접 만나 한반도 평화정착 문제를 비롯한 제반 핵심현안을 협의함으로써 남북이 주도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다는 입장에서 정상회담을 추진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임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북핵 상황을 비롯한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과 제약 속에서 남북관계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고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정상회담을 선택했던 것이다.

북·미관계, 정상회담 '중심변수'

제2차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그동안 일관성 있는 남북관계 추진과 핵문제 및 북·미관계 진전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91년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으로 남북관계 진전이 고조되었으나, 1차 핵위기 발생으로 논의방향이 북·미관계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1994년 제네바합의 타결을 전후로 북·미관계가 활발히 전개된 데 비해 남북관계는 경색국면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2007년 「2.13 합의」 시에는 북·미관계 돌파구 마련을 위해 남북관계 개선이 적극 추진되었다. 과거와 달리 현실적인 수요에 따라 병행기조가 유지되었다. 북한은 2007년의 정세국면 전환(핵실험 → 베를린합의 → 「2.13 합의」 → BDA 해결 → 남북정상회담 및 「10.3 합의」 → 6자회담 진전으로 핵 불능화,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및 「적성국교역법」 지정 해제 등)을 계기로 2008년부터 대남·대외 경제협력의 본격 추진을 통해 '성장동력'을 마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경제정상화 모색과 2012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 목표 달성을 위한 대내·외 역량 집중의 일환으로 남북관계 진전이 긴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정상회담은 남북간 여러 요건들이 부합되어야 이루어지겠지만, 핵문제 대두 이후에는 특히 북·미관계 개선 및 핵문제 해결의 진전 등 국제환경의 개선이 성사 배경의 중요한 일부였다.

김영삼 정부의 정상회담은 1994.6월 1차 핵위기 문제 해결을 위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이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정상회담 성사에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기본 토대로 한 '페리 프로세스' 추진을 위한 1999.5월 페리 전 美 국방장관 방북 및 페리보고서 발표(1999.9) 등 북·미 관계개선 및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대북정책이 긍정적 역할을 하였다. 제2차 정상회담 성사에는 핵문제 해결의 일정한 진전과 보다 발전된 핵문제 해결방안 협의를 위한 2007년 6월 힐 전 美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 등이 영향을 미쳤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밀접히 연관되어 상호 보완적으로 상승작용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1994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 당시 핵위기에 대한 돌파구를 모색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까지 추진했다. 이 사례는 정상회담의 중심변수가 북미관계임을 입증한다. ⓒ연합뉴스

정상회담, 남북관계 진전 '돌파구'

분단국에서의 정상회담의 유효성은 매우 크다. 동서독 간에는 통일 이전에 7차례의 공식회담과 6차례의 비공식 정상간 만남이 있었다.3) 남북예멘의 통합과정에서는 10차례 정상회담이 있었다. 그 밖에도 중동 평화회담, 미·중 관계정상화(1972.2) 등 적대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정상회담이 있었다. 정상회담이 분단국 통일이나 적대국간 관계개선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2차례 정상회담이 있었지만 남북관계 발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남북관계가 오랫동안 적대적 반목과 대결관계가 지속되어 상호간에 신뢰가 없고 공존에 대한 제도화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남북정상회담은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다. 과거 1990년대 초반까지 남북한은 상호 적대적 상황에서 실무회담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기도 어려웠으며, 합의가 되더라도 그 이행은 쉽지 않았다. 오히려 불신과 대립만 더 심화되었다. 그래서 과거 역대 정부 모두가 비정상적인 남북관계를 해소하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평화정착과 발전된 남북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정상회담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분단 반세기만에 이루어진 제1차 남북정상회담(2000.6)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남북관계를 '불신과 대결'에서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전환하고 실천을 통해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남북정상이 합의한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합의에 따라 남북관계는 다방면의 대화와 교류·협력에 비중을 두고 발전되어 왔다. 특히, 남북경협에 있어 새로운 변화와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질적·양적으로 남북관계의 발전을 가져왔다.

남북간의 상호신뢰가 제고되고 실질적 협력관계가 확대되어 평화공존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이러한 변화의 확산은 성과도 컸지만 추진방법에 있어 갈등을 낳기도 하였다. 동시에 보완·발전시키고 극복해야 할 과제들도 생겨났다. 정치·군사 분야가 상대적으로 뒤쳐져 있던 것을 균형있게 바로 잡아야 했고, 보다 발전된 경제협력 방식과 제도화의 진전이 당면 과제로 제기되었다. 특히,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실질적인 보장조치 마련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남북관계를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발전시킬 수 없었다.

2007 정상회담은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남북간의 경제발전을 통한 공동번영으로 남북관계가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에 역점을 두고 추진되었다. 특히 남북 주도로 평화체제의 논의와 군사적 신뢰구축과 긴장완화를 위한 협력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로 한 것은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또한 평화와 경제를 결합하여 선순환 시키는 구조를 통해 군사적 긴장이 높은 지역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군사적 대결에서 경제협력으로 관점을 전환'하고 남북간 군사적 긴장완화를 촉진하는 조치들을 마련한 것은 의미있는 진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매우 주목되는 것으로 경제협력을 통해 평화를 가져오고 평화가 다시 경제협력을 촉진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제협력을 한 단계 더 높이는 도약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2007 정상회담을 통해 정치·경제·군사 분야를 비롯 많은 분야에서 합의사항들이 도출되었지만 이행되지는 않았다. 정권 임기를 불과 4개월여 남겨놓고 회담이 개최(2007.10)됨으로써 합의사항에 대한 구체적 이행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당시 남북관계 상황은 북핵상황의 진전과 연계되지 않을 수 없는 국면에 있었으며, 핵문제 등에 대한 일정한 진전 등이 있은 후에야 정상회담이 본격 추진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제약이 있었다.

어떻든 제1·2차 정상회담은 남북관계 진전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동시에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제1차 회담은 대립과 반목의 남북관계를 화해협력하고 상호 존중하는 관계로 전환시키고, 다방면에서 '대화와 교류'의 장을 열었다. 제2차 회담은 화해협력과 상호존중을 토대로 남북이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포괄적 합의와 다양한 영역에서의 구체적 협력방안을 마련하였다.

현안 일괄·포괄 타결의 지름길

정상회담은 적대관계 및 분쟁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쌍방의 현안문제를 일시에 일괄적·포괄적으로 해결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안 중의 하나이다. 아무리 어렵고 고질적인 문제라 하더라도 정상회담을 통해서 상호 신뢰조성과 문제해결의 전환적 계기를 마련한 사례는 많다.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와 달리 정상회담이 가지는 의의와 성과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북한은 '수령-당-대중'으로 이어지는 사회구조를 갖춘 유일지배체제를 구축·운영하고 있다. 최고책임자는 모든 정책의 결정과 집행에서 최상위를 점하고 있으며, 나머지 정치적 기제들은 지도자의 결정과 집행을 뒷받침하는 역할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이러한 체제적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남북정상이 만나 현안을 논의하고 해결하는 것은 매우 효율적인 것이다. 북한은 체제 특성상 담당 부서장이나 해당 실무그룹에서 본질적인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한 접점을 마련한다는 것은 사실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상회담에서는 핵문제, 남북관계 확대발전 및 한반도 평화정착 방안, 통일문제, 한반도 미래 등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틀'과 관련된 내용들이 주요 의제가 되어왔다. 이러한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 등에 대한 해법의 선택과 결정은 최고책임자들만이 할 수 있다. 큰 틀에서 물꼬가 트이지 않으면 실무적 차원에서의 대화와 협상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남북관계의 현실적 특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격과 특성을 감안해 본다면, 남북정상회담의 정례화는 매우 필요한 사안이며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정착, 더 나아가 통일달성의 점진적·단계적 추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남북정상회담이 정례적으로 개최된다면 통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정상간 만남, 근본문제 해결에 주력해야

남북정상회담의 효과를 감안하면 북한의 대내·외 사정, 국제환경, 남북관계 상황 등 제반요소를 고려하여 치밀하고 포괄적인 전략을 수립하여야 한다. 현안문제 해결만이 아니라 근본문제 해결을 병행해야 한다. 현안문제의 근원적 해결은 그 문제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근본문제가 함께 해결되어야 가능하다. 현안문제와는 달리 근본문제는 그것이 미칠 광범위한 영향을 고려할 때, 확고한 원칙에 입각하여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근본문제는 성격상 정치·경제·군사적 제반요소가 상호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포괄적 접근에 의한 일괄타결이 관건이다. 최고 정상의 결단만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인 것이다.

남북관계의 진전과 변화는 외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남북관계는 우리의 노력에 의해 진전되어 왔다. 북한은 남북관계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지 않다. 남북관계의 큰 물줄기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수 밖에 없다. 독일 및 예멘의 통일과정에서 보듯이 현실적인 상황과 여건을 감안하여 과거와 미래를 차분히 아우르면서 꾸준히, 그리고 정치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미래를 위해 발전적으로 노력한다면 성과가 있을 것이다. 남북관계가 한 단계 더 발전될 수 있는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기대해 본다.

NOTES

1) 『월간 조선』, 9월호 (1998) 참조.
2) 임동원, 『피스메이커』, (서울: 중앙북스, 2008), p. 201.
3) 김영윤·양현모 편, 『독일, 통일에서 통합으로』 (서울: 통일부, 2009), p. 9.

* 원제 :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의미·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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