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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개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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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개념'을 잃었다 [이철희 칼럼] 반공보수의 재등장, 박근혜에겐 독이다
한 사람에게 주목해야 한다. 박근혜 의원이다. 그가 보여주는 두 가지에도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지독한 경직성(rigidity)이다. 다른 하나는 무기력한 피동성(passivity)이다. 박근혜는 누가 뭐래도 이번 대선의 최강자다. 압도적 지지율에 보수와 영남이란 양대 기반을 4년 동안 누수 없이 잘 유지하고 있다. 문자 그대로 대권이 눈앞이다. 그러나 경직성과 피동성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그의 대망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경직성은 새누리당이 사실상 1인 지배체제로 전락한 것을 말한다. 당 대표, 최고위원, 원내대표, 사무총장 등 당의 의사결정 라인에 있는 모든 자리가 친박계 인사에 의해 점령당했다. 가히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독식이다. 총선에서 확인된 것이 박근혜의 힘이라면, 약점도 드러났다. 그것은 2% 부족, 즉 수도권과 2030세대의 마음을 충분히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는 4월 총선을 캐릭터로 치렀다. 그 이전에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나아가고자 했던 개혁보수의 변신이 거의 완벽하게 사라졌다. 총선에서 보인 박근혜의 모습은 2007년 대선, 아니 2004년 총선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새롭고 변화된, 더 구체적으로는 중도를 잡기 위한 외연 확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김종인 전 비대위원 등이 힘들게 돌파해 놓은 경제민주화 등의 아젠다(agenda)를 사실상 배제해버렸다. 마치 연화(軟化) 노선을 버리고 경화(硬化) 노선으로 돌아선 듯하다.

그 모습을 원칙으로 포장하든 민생으로 포장하든 낡은 보수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이번 총선에서 박근혜가 얻은 것이 승리라면, 잃은 것은 변화 컨셉트(개념)다. 총선에서의 선택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추론할 수도 있다. 그런데 총선 후 국면에도 변화는커녕 일체의 움직임을 정쟁으로 몰아버리면서 변화를 봉쇄하고 있다. 게다가 인사마저 다른 목소리가 나올 수 없도록 일사불란한 복종 시스템으로 구축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지지기반의 확장을 이뤄내는 포지티브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는 것과, 경쟁을 통해 역동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총선과 그 이후 박근혜가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이 두 가지 모두 어려워 보인다. 부족한 2%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채울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확장을 도모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무기력한 야권의 '꼬락서니'를 보면서 잘 지키기만 해도 승산이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듯 싶다. 사실 야권의 형편을 보면 이런 판단이 아주 착각인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위험한 선택이다. 의사결정 과정에 이견이 자유롭게 제출되고 토론되지 못하게 막아버리면 치명적인 허점이 생긴다. 하나의 의견만 인정되고 나머지는 일체 부정되면 합리적인 판단이 어렵다. 이른바 동조(conformity) 현상이 일어나고, 급기야는 '레밍효과'(집단자살)마저 생겨난다. 망하는 길이다.

밀(J. S. Mill)이 말한 바대로, 스스로 옳다고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독자적인 판단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되면 될수록, 세상의 무오류라는 것에 맹목적인 신뢰감을 갖고 의지하려는 것이 보통이다." 박근혜는 밀의 이 충고를 아프게 새겨들어야 한다. 친박이나 당의 구성원들이 이른바 '박심'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도록 해야 자신감을 갖고 대선에 임할 수 있다. '아바타 친박'으로는 이길 수 없다.

민주주의가 온전하게 힘을 발휘하려면 차이와 다름이 정당한 절차나 과정 속에서 충분히 경쟁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관건이다. 절차나 과정을 요식적인 행위로 전락시키면 민주주의는 형해화된다. 박근혜가 강한 후보로 진화하려면 새누리당 내부에 견제와 균형이 가능하도록 이견을 조장·육성해야 한다. 이견은 발전의 동력이다. 그것 없이 박제화 된다면 지금의 우위는 슬금슬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성을 쌓은 쪽보다 길을 내는 쪽이 언제나 이기기 마련이다. 내부의 경직성은 박근혜의 미래를 위협하는 강력한 독소로 작용할 것이다.

피동성은 전체 보수가 반공보수의 강한 드라이브에 끌려가는 것이다. MB정부에서 득세했던 시장보수는 경제위기, 양극화 등으로 인해 선도역할을 맡기엔 명분이 딸린다. 한반도의 평화 정착 등으로 퇴조하던 반공보수가 MB정부에서 기력을 회복하더니 마침내 다시 보수의 전위로 나서고 있다. 사정당국이 통합진보당 사태에 적극 개입하는 것이 바로 반공보수의 드라이브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반공보수에게 종북 좌파 또는 주체사상은 절대적 빌미다. 반공·반북의 핵심 명제는 공산주의와 북한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반대 담론(anti-thesis)이 작동하려면 부정의 대상이 실체로 존재해야 하고, 구체적인 활동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른바 '경기동부연합'이란 정파가 보여주는 모습은 호불호를 떠나 반공보수에게는 정말 반갑고 고마운 것이다. 이들의 존재와 활동 때문에 반공보수가 전면 재등장의 명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반공보수에게 종북좌파 또는 주체사상은 절대적 빌미다." ⓒ연합뉴스

반공보수가 득세할 수 있는 다른 이유는 정치적 효과다. 즉, 반공·반북을 내세워 야권의 무기인 야권 연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총선에서 여야 또는 보혁 간에 호각세를 보였기 때문에 보수가 야권의 약한 고리를 잡고 파고들 것은 익히 예상되는 바였다. 그런 전략을 가진 그들에게 경기동부연합의 구태와 이념성은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호박인 셈이다. 판세에 영향을 미칠 요인이 있고, 그 요인을 반공보수가 잡아채고 있기 때문에 보수 전체가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반공보수의 강한 드라이브로 인해 개혁보수의 입지가 현저하게 좁아들었다. 중도로의 작은 이동조차 좌클릭이라며 못마땅해 했으나 나설 분위기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그룹이 반공·반북보수다. 이번에 이들이 보수 내에서 헤게모니를 다시 잡을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이다. 이 흐름을 방치하면, 다시 말해 박근혜가 이 흐름에 수동적으로 대응하게 되면 개혁보수는 숨을 쉬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박근혜가 내걸었던 복지, 경제 민주화, 양극화 해소 등의 아젠더가 조직적으로 배제되는 것을 뜻한다.

박근혜는 강자다. 심리적으로 강인하고, 정치적으로도 제법 영악하다. 그러나 그에겐 큰 약점이 있다. 바로 시대정신 또는 시대흐름과의 일정한 엇박자(mismatch)다. 2012년에 왜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 박근혜의 대한민국이 과연 보통사람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등이 아직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도 그 점을 인식했기에 복지를 내걸고, 양극화의 문제를 지적했다. "우리가 성장을 하고 활기찬 시장경제를 발전시켜가야 하는 것도 궁극적으로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까지 성장의 열매를 골고루 나누면서 모두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2009년 그의 말이다.

박근혜의 외연 확장 전략은 이번에 강하게 정착된 반공·반북 프레임에 의해 좌절될 우려가 크다. 진보의 힘이 약해지고, 그럼으로써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커질수록 시장보수가 수용할 수 있는 양보의 폭이 줄어들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반공보수가 주도하는 최근의 드라이브는 시장보수의 지지와 성원 속에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안 그대로 반북성향이 강한 종교보수까지 동참해 한 목소리를 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보수는 수구로 옹색해지고, 새누리당은 '도로 한나라당' 아니 '도로 민정당'이 된다. 그 속에서 박근혜의 복지비전은 질식당할 것이다. 김종인 흐름을 잃으면 대통령 박근혜는 없다. 설사 박근혜가 이번 대선에서 이기더라도 이런 구도에서라면 그는 MB보다 못한 대통령이 될 것이다. 따라서 박근혜는 반공보수의 최근 공세에 편승하기보다 적극 제어하고, 직접 나서서 막아야 한다. MB가 촛불항쟁에서 민의를 보지 못하고, 당장 급하다고 아스팔트 보수의 품에 안겼다가 집권 내내 얼마나 이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는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통합진보당의 경선부정은 진보 내에서 퇴출시켜야 할 극단의 분파를 노출시키는 한편 보수 내에서도 반공·반북을 앞세운 꼴보수 분파를 드러내고 있다. 양 진영 모두 이들을 여하히 제압하고 털어내느냐에 따라 대선의 성패, 나아가 그 이후의 서민 삶이 달라질 것이다. 선수를 취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쪽이 이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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