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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일본의 전염병 식민지…최초 구제역이 19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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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일본의 전염병 식민지…최초 구제역이 1911년? [박상표 칼럼] 역사와 과학의 눈으로 보는 구제역 ③
일제의 강점과 함께 들어온 구제역 개념

일본에서 번역된 서양의 구제역 개념은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으로 수입되었다. 고종은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일본에 파견하여 서양의 근대 문명과 일본의 문물 제도를 배우려고 시도했다.

박정양은 일본 내무성과 농상무성의 사무와 규칙을 조사하여 보고했는데, 당시 일본에서도 '가축 전염병 예방 규칙'(1886년)이 제정되기 전이라 구제역 관련 정보는 수집하지 못하고 돌아온 것 같다. 조선 정부는 1885년부터 외국 선박에 대한 검역 규칙을 준비하여 1886년부터 인천, 부산, 원산 등 3개 항구에서 본격적으로 시행하였다. 하지만 가축의 검역에 대해서는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국내에 최초로 들어온 일본 수의사는 청일전쟁에 참전했던 일본군 1등 수의(獸醫) 구로미즈 무네치카(黑須宗近)로 추정된다. 1894년 6월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군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청나라에 진압을 요청하였다. 일본은 텐진 조약에 따라 조선에서의 청·일 양국의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자국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출병을 하였다.

외세에 의존한 조선 왕실의 출병 요청으로 1894년 7월부터 1895년 4월까지 한반도를 무대로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일본군은 구로미즈 무네치카와 그의 조수 데즈카 나카타로(手塚中太郞)를 평양과 압록강 하류에 파견하여 방역 업무를 맡도록 명령하였다. 그들은 병든 소를 발견하면 축사 내에서 살처분하고 축사와 함께 불태웠다고 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강요에 의해 조선은 1895년 갑오개혁을 단행했다. 이 때 농상공부의 농상국 농사과에서 수의((獸醫)와 제철공(蹄鐵工)을 관장하도록 했다.

▲ 한양으로 압송되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왼쪽), 1894년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군(오른쪽). ⓒ프레시안

일본 수의사들은 1896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1896년에 조선에 있던 수의사는 도축검사원 신카와(新川末次), 일본영사관 소속 스가누마(管沼寒洲), 한국군 마필검수원 다나베(田邊憲三) 등이 있었으며, 스가누마(管沼寒洲)는 1904년 서울의 욱정(북창동 근처)에 한국 최초의 동물 병원이라고 할 수 있는 한성가축병원을 개원하였다. 1905년 1월에는 서울 명치정((明治町, 현재의 명동)에 스가와 가메타로(素川龜太郞)가 소천가축병원을 개원하였으며, 인천엔 야노(矢野惣平)가 가축병원을 개원하였다. 1906년 들어 개업 수의사가 6명으로 늘어났으며, 1909년엔 개업 수의사가 8명에 이르렀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6년 농림학교에 1년제 수의속성과를 설치하여 20명의 조선 학생을 입학시켰다. 당시 학생들이 배웠던 교과서에 유행성 아구창이 소개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07년 농상공부 축산과장으로 하라시마 센지스케(原島善之助)가 임명되었는데, 그는 같은 해에 발표한 글에서 "한국에서 유행성 아구창도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대한제국 정부가 1900년에 수역 예방을 위한 검역 제도의 법제화를 실시하여 농상무성 고시 제4호로 수역 예방 지침이 공포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아직 그 원문을 확인하지 못했다. 이 수역 예방 지침 내용에 '유행성 아구창'이라는 번역어가 들어 있다면 국내 최초 사용 사례가 될 수 있다.

필자가 확인한 국내에 남아 있는 '유행성 아구창(流行性 鵝口瘡)'이라는 번역어가 최초로 국내에서 사용된 기록은 도키시게(時重初雄)가 1905년에 남긴 <한국 우역 기타 수역에 관한 사항 조사 복명서>라는 출장 보고서이다. 이 문서는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보관되어 있다.

도키시게는 보고서의 제1장에서 '한국 가축 질병 발생과 유행의 연혁 및 그 상황'을 정리하면서 '우역(牛疫)·탄저(炭疽)·기종저(氣腫疽)·유행성 아구창(流行性 鵝口瘡)·돈병(豚病)·광견병(狂犬病)·계역(鷄疫)' 등의 전염병 발생 상황을 정리했다. 그가 언급한 질병 중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유행성 아구창(流行性 鵝口瘡)'이라는 번역어가 들어 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한국의 각종 가축 전염병 상태 및 예방법‚ 축산물 수출과 관련한 각종 사항 등 축산업 전반을 망라하였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정확한 시기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부록 여정'편에서 소‚ 소뼈의 수출 수량과 가격 문제를 다루면서 1902년~1904년(메이지 35년~37년)의 상황을 도표로 정리한 점으로 미루어 1905년 무렵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도키시게는 수의학 박사 출신으로 일본 정부의 수의 관료 중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 있던 인물이다. 일본 농상무성 산하의 수역조사소 소장을 지냈으며, 통감부 시절 한국에 자주 들러 가축 질병에 관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는 1902년 한국 출장 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1902년도의 한반도 우역 조사>라는 문서를 일본 농상무성에 제출했으며, 일본에서 최초로 우역 예방을 위해서 면역혈청 사용을 고안하기도 했다.

▲ 융희 3년(1909년) 2월 15일자 관보 제4301호. 1908년 평안북도에서 유행성 아구창(구제역)이 456두 발생했다는 통계가 실려 있다. 이것이 국내 최초의 구제역 발생 공식 기록이다. ⓒ프레시안

1905년 도키시게와 1907년 하라시마가 한국에서도 구제역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다. 1922년에 발간된 수의학 잡지에도 1865년(고종 2년)부터 1909년까지 우역 발생상황이 기록되어 있는데, 1904년(광무 8년)에 벽동군에서 우역과 함께 구제역이 유행하여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러나 정부의 공식 문서를 통해 국내 구제역 발생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시기는 1908년이다. 융희 3년(1909년) 2월 15일자 관보 제4301호를 보면, '산업' 항목에 '융희 2년(1908년) 중 수역 발생표'라는 통계가 실려 있다. 이 통계는 유행성 아구창(流行性 鵝口瘡)이 평안북도에서 456두 발생하여, 24두가 폐사(5.2%)하고, 432두가 쾌복되었다고 보고했다.

통감부의 일본인 전문가들이 주도한 대한제국 정부의 통계는 <한국중앙농회보>에 '한국 수역 발생도'라는 제목의 지도로 실리기도 했다. 이 지도에는 붉은 색깔로 1908년 한국의 가축 전염병 발생이 "우역 364두, 탄저 271두, 유행성 아구창 456두, 돈단독 308두, 돼지콜레라 66두, 광견병 13두, 원인불명 21두"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동안 정부나 언론의 통계 자료에서는 국내에서 최초로 구제역 발생이 보고된 때가 1911년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는 새로운 1차 자료의 발굴에 의해 오류로 드러났다. 조선총독부의 통계만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린 관료주의와 1차 자료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전문가들의 게으름으로 인하여 100년 가까이 구제역 첫 발생 기록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점이 놀랍기만 하다.

▲ 정부 통계에서는 1911년에 구제역 발생이 최초 보고되었다고 밝히고 있다(<구제역 백서>, 농림부·가축위생방역지원본부 펴냄, 2003년 2월). 그러나 대한제국 관보에 1908년 평안북도에서 구제역이 발생한 통계가 수록되어 있으므로 정부의 공식 통계를 수정해야 마땅하다. ⓒ프레시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전한 일제는 차츰차츰 한국의 국권을 침탈했으며, 경제적 수탈도 점점 더 심해졌다. 일제는 금광 채굴권이나 철도 부설권 같은 이권에만 눈독을 들인 것이 아니라, 일본 수출이라는 명목으로 쌀과 한우도 반출해갔다. 한우의 일본 수출 실적은 1897년 970두(1만5570엔), 1900년 5633두(15만701엔), 1907년 1만8265두(76만9818엔)로 10년 만에 2배로 증가했다. 소 마리당 수출 가격도 1897년 16엔, 1900년 26.8엔, 1907년 47.3엔으로 10년 만에 3배나 올랐다.

한우의 대일 수출 실적이 늘어감에 따라 일본은 통감부 주도 아래 자국 내 전염병 유입을 막기 위한 방역 대책을 세웠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09년(융희 3년) 7월 10일 순종의 재가 아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응 명의로 발표된 '수출우검역법'이다. 일본에 한우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우역, 탄저, 유행성 아구창' 같은 가축 전염병에 걸렸는지 확인하기 위한 검역을 거쳐야 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바로 유행성 아구창이라는 전염병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 1909년(융희 3년) 관보 수출입검역법. 가축 전염병 중 '유행성 아구창'이라는 명칭이 보인다. ⓒ프레시안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시작한 이후 구제역은 1911년부터 1927년까지 해마다 발생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4월 29일 제령 제1호로 수역예방령을 제정했는데, 제1조에서 유행성 아구창의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1910년대 후반의 구제역 방역 대책은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19년 2월 18일자 조선총독부의 통첩에는 1)수역을 신고하도록 널리 알릴 것 2)발생 위험 지역이나 주의 지역에서는 축우의 호별 검역 실시 3)발생지나 위험 지역에서는 임시수역위원회를 조직하여 방역 실시 4)건강한 소는 최소 10일 이상 격리시키고 교통 차단을 실시하며 발굽을 소독할 것 5)전염 의심이 있는 가축의 출입 금지 및 환축이 있는 집에 사람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할 것 6)소의 매매나 이동을 금지할 것 7) 방역원이나 축주, 취급인 등의 의복이나 소지품 혹은 야생 개나 쥐 등이 옮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주의해서 실시할 것 등을 당부하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1929년 "유행성 아구창에 걸려 그 증상이 심한 것은 바로 이를 죽이고 그 시체를 소각한다. 행성 아구창에 걸려 그 증상이 심하지 않은 것 혹은 이에 걸렸다고 의심이 가는 것은 이를 격리한다"는 내용으로 이출우 검역 규칙을 개정하여 구제역 살처분 정책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조선총독부의 살처분 정책은 일본 본국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1927년 가축전염병예방법이 개정되어 '유행성 아구창'이 '구제역'으로 바뀌었는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2년 넘도록 여전히 옛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불일치를 교정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는 1930년(소화 5년) 7월 조선가축전염병예방령을 개정하여 '유행성 아구창' 대신에 '구제역'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채택하였다. 드디어 식민지 조선에서도 '구제역'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매일신보> 1932년 7월 2일자. '유행성 아구창'에서 '구제역'으로 명칭이 공식적으로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옛 명칭이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프레시안

그러나 변화는 단시간에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1932년 7월의 <매일신보>의 기사를 보더라도 '유행성 아구창(일명 구질)'이라는 부제목이 눈에 띈다. 이 기사에서 구제역을 설명하는 내용을 보자.

이것은 급성발진에 속하는 전염병이다. 그 전염독은 고성(固性)과 휘발성이니 혹은 직전(直傳)하고 혹은 매개물에 의하야 전염한다. 전염독의 본체는 아직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수포액 궤양의 분비액 타액 유즙 분뇨 호흡병제배설물 중에 존재하다. 제질(蹄疾)의 경우에는 제관의 수포, 염증파행을 주요한 징후로 잡는다. (…) 차의 예방법으로는 병축을 격리하고 악성발진성에는 섭식에 주의하야 맥분에 청수(淸水)를 급(給)하고 거소를 청결케하고 (…) 예방적 접종은 전혀 무익하다. 그리고 본병은 1회차에 걸릴지라도 결코 면역성을 얻는 것이 아니다. 1년간에 수회 발생하는 일도 있으니 예방접종의 효력 없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구제역의 병원체가 바이러스인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여전히 전염독의 본체를 알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예방 접종은 전혀 무익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제 시대 구제역 발생은 1934년 이후로 보고되지 않았으며, 해방 이후에도 2000년에 발생할 때까지 66년간 발생 기록이 없었다. 국내에서는 2000년 이후 2002년, 2010년 1월, 4월, 11월 5차례에 걸쳐 구제역이 발생했다.

식민지 시대 일본을 통해 들어온 구제역 개념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악의 꽃을 피운 셈이다.

① 이시영(2010), 한국수의학사, 국립수의과학검역원, 323쪽.
② 관보 제20호, 개국 504년(1895년) 4월 22일, 농상공부 분과 규정.
③ 이시영(2010), 전게서, 248~249쪽.
④ 原島善之,助(1907), 韓國의 畜産과 獸疫, 韓國中央農會報, 제1-3~6호, 2-1호.
⑤ 조선총독부(1912), 獸疫豫防ニ關スル執務規定, 조선총독부 훈령 갑 제28호 제8조(신동원(2004), 한국마의학사, 한국마사회박물관, 17쪽 각주 183에서 재인용)
⑥ 時重初雄(1905), 韓國牛疫其他獸疫ニ關スル事項調査復命書, 奎 20289.
⑦ 정경희, 韓國牛疫其他獸疫ニ關スル事項調査復命書 해제, 서울대 규장각. (☞
)
⑧ 이시영(2010), 전게서, 343쪽.
⑨ 중앙수의회잡지(1922), 148쪽 : 평안북도 우역지 중 151~153쪽 '일조 합방이전의 연혁'.
⑩ 대한제국관보 제4301호, 융희 3년(1909년) 2월 15일, 융희 2년 중 수역 발생표.
⑪ 한국중앙농회보 제3권 제2호(1909년), 융희2년 한국수역발생도.
⑫ 대한제국관보 제4426호, 융희 3년(1909년) 7월 12일, 법률 제21호 수출우검역법.
⑬ 조선총독부 관보 제819호, 대정 4년(1915년) 4월 29일, 수역예방령.
⑭ 조선총독부 관보 제1957호, 대정 8년(1919년) 2월 17일, 관통첩 제20호 유행성 아구창 예방에 관한 건.
⑮ 조선총독부령 제79호, 1929년 8월 14일, 이출우 검역 규칙의 개정.
⑯ 조선총독부 관보 1050호, 소화 5년 7월 4일, 조선가축전염병예방령.
⑰ 農家副業과 養豚의 要旨 21: 疾病과 治療法 豚의 流行性鵝口瘡 (一名蹄疾), <매일신보>, 1933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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