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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 수 없는 폭력의 상처, 유일한 해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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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 수 없는 폭력의 상처, 유일한 해법은… [철학자의 서재]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
나의 트라우마

나에게는 트라우마가 있다. 하지만 뭐 그리 특별할 건 없다. 왜냐하면 고통의 기억으로 새겨진 나의 트라우마는 군대를 경험한 남자에게서 쉽게 관찰되는 '군대 트라우마'이기 때문이다.

입대하기 전날 느꼈던 조급함과 불안감, 막막한 이등병 생활에서 느꼈던 좌절과 상처, 병장 시절 느꼈던 알 수 없는 짜증과 답답함이 고스란히 꿈에서 느껴져 벌떡벌떡 잠에서 깬 경험이나, 남들의 군대 얘기에 나도 모르게 흥분하는 경험 등을 살펴보면 나에게 이 '군대 트라우마'는 군 제대 후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치유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 같다.

트라우마는 쉽게 얘기해 '충격적 경험을 한 사람들이 보이는 다양한 심리적, 신체적 증상들의 총체'로 설명된다. 따라서 '군대 트라우마'는 '군대 생활에서 충격적 경험을 한 사람들이 보이는 다양한 심리적, 신체적 증상들의 총체'로서 규정될 수 있다. 다만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은 과거의 경험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공포와 슬픔에 빠져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이 '군대 트라우마'는 다른 트라우마와 조금은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치유되지 못한 '군대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나에게 주디스 허먼이 지은 <트라우마>(최현정 옮김, 플래닛 펴냄)는 그 속에 담긴 가슴 아픈 여러 사례들을 통해 내 고통의 왜소함을 반성케 해줬으며,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적 감수성을 환기시켜 주었다. 왜냐하면 허먼은 내가 겪었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폭력과 가정 폭력, 전쟁의 고통, 고문 등에 의한 트라우마에 자신의 주된 관심을 집중하고 있으며, 그러한 트라우마의 치유에 대한 방법으로서 사회적 지지와 연대의 감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의 메커니즘 : '공포', '단절', '속박'

▲ <트라우마>(주디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플래닛 펴냄). ⓒ플래닛
최근 들어 트라우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증가하면서 이 용어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하다못해 만화 제목으로까지 등장하는 트라우마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을까. 주디스 허먼이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트라우마를 이해하기 위해선,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사건들을 몇몇의 사례로 좁힐 필요가 있다. 허먼이 연구해온 트라우마는 성폭력과 가정 폭력 그리고 전쟁과 고문에 의한 트라우마에 집중된다.

허먼은 트라우마의 메커니즘을 '공포'-'단절'-'속박'이라는 단계적으로 연결된 단어들로 설명한다. 우선적으로 트라우마는 무력한 이들의 고통이자, 그들이 느끼는 고통에 대한 공포심의 표현이다.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사건은 사람들이 갖는 자기 자신의 통제감, 다른 이들과의 연결감, 그리고 사회 안에서의 일상적인 보살핌의 체계를 훼손한다. 따라서 "강렬한 두려움, 무력감, 통제 상실, 붕괴의 위협에 관한 느낌은 트라우마의 공통 분모이다."(70쪽)

허먼이 제시하는 트라우마의 메커니즘인 공포는, 또 다시 위험이 닥칠 것이라는 불안의 감정인 '과각성(hyperarousai)', 트라우마를 갖게 하는 사건의 고통이 지워지지 않은 채 피해자들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는 '침투(intrusion)', 그리고 그러한 사건을 회피하려는 피해자들의 의식적인 거부 반응인 '억제(constriction)' 등으로 표현된다.

두 번째로 트라우마는 우리가 맺는 기본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즉 트라우마는 "세상이 안전하고, 자기는 가치 있으며, 세계 질서에는 의미가 있다는, 피해자가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인 전제를 파괴한다."(97쪽) 이 기본적인 전제의 파괴는 곧 우리들이 갖는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 상실과 사회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따라서 트라우마를 겪는 환자들은 가족, 공동체, 종교와의 결합으로부터 소외감과 단절감을 느끼게 된다. 트라우마가 개인적인 통제력을 상실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연결을 부수고, 사회에 대한 신뢰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뢰의 훼손으로부터 발생하는 혼란, 수치심, 죄책감, 열등감, 사회적 생활 속에서의 불안감, 이 모든 것은 트라우마 환자를 그들이 맺는 사회적인 관계로부터 도망치게 만든다.

허먼이 제시하는 트라우마 메커니즘의 마지막 단계는 '속박'이다. 그에 따르면 단일한 트라우마 사건은 언제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반면에 만성적이고 반복적인 트라우마는 속박된 환경, 예컨대 "정치적 속박, 가정 안에서 여성과 아동이 당하는 속박, 종교 집단의 속박, 포로나 인질, 아동 학대, 계속된 성폭력 등에서 일어난다."(134쪽) 이러한 속박 속에서 피해자는 가해자와 끊임없이 만나게 되며, 그 결과 피해자의 일생에서 가해자는 가장 강력한 사람이 되며, 피해자의 심리 상태는 가해자의 행동과 신념에 따라 형성된다. 즉 "가해자의 목표는 피해자를 노예로 만드는 데 있다."(136쪽)

따라서 트라우마 메커니즘인 '속박'은 다른 말로 가해자들의 피해자들에 대한 심리적 지배를 의미한다. 허먼이 지적하는 것처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심리적 지배의 기법들은 놀랍게도 유사하다. 심리적 지배는 피해자에게 우선 공포와 무력감을 주입시키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회적 감정을 파괴시킨다. 반복적인 폭력을 통해 공포와 무력감을 겪도록 하는 가해자의 목적은 피해자로 하여금 가해자는 전지전능하고, 저항은 헛된 것이며, 전적인 순종을 통하여 자신의 인생이 가해자의 너그러움을 획득하는 데 달려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삶을 허용해 주었다는 감사함을 느끼게 하고, 나아가 역설적이게도 피해자는 가해자를 구세주처럼 느끼게 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그것과 동시에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변덕스러운 너그러움을 선사한다. 가정 폭력 가해자의 사과, 사랑한다는 표현, 변화하겠다는 약속, 충실과 열정의 호소를 통한 설득 등을 통해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두려움과 모욕감의 원천이면서도 위안의 원천이 된다.

심리적 지배의 마지막 단계는 완전한 속박의 단계이다. 피해자가 다른 누군가와 연결을 유지하는 한, 가해자의 힘은 제한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가해자들은 피해자 주위 사람을 떼놓는다거나, 상징적인 어떤 물건을 빼앗는다거나 해서 바깥 세계와의 연결감을 철저하게 훼손시킨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피해자는 생존이나 기본적인 신체적 욕구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서적 지지를 위해서 가해자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 피해자는 두려움이 커질수록, 오직 하나의 허용된 관계인 가해자와의 관계에 더욱 매달리게 된다. 그 결과 공포, 간헐적인 보상, 고립, 그리고 강요된 의존은 복종적이고 순종적인 포로를 완성시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속박의 메커니즘은 단순히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허먼이 말하고 있는 피해자의 심리가 완전히 통제당하고 마는 최종 단계에서는 피해자 스스로가 자신의 원칙을 위반하고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을 버리게 되는 것, 예커대 자기혐오와 스스로 다른 이를 희생시키는 데 동참하는 것, 가정 폭력 피해자가 가해자와 함께 자신의 아이들을 학대하는 행위를 수행하게 된다. 허먼이 보는 궁극적인 최종 단계는 이러한 트라우마가 피해자의 완전한 항복으로 나아가는 단계, 다시 말해 트라우마 환자가 "'완전하게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최후의 단계이다."(151쪽)

트라우마의 치유

허먼이 말하는 트라우마의 끔찍한 최종적인 단계를 극복할 가능성은 있을까. 트라우마 환자인 피해자들에게 제3자가 말하곤 하는 '잊어버려'라는 식의 충고는 트라우마에 대한 '망각이라는 해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트라우마의 치유가 아닌 트라우마로부터의 도피, 다시 말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도피에 불과하다.

이와는 달리 허먼이 말하는 트라우마 치유의 핵심은 피해자의 총체적인 '기억의 복구'이다. 즉 트라우마 극복의 가능성은 피해자의 안전과 그것에 대한 자각, 트라우마 사건의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재구성과 극복, 그리고 피해자와 공동체 사이의 끊어진 연결망의 복구에 있다. 그것의 목적은 피해자 자신의 잃어버린 세계를 되찾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개인의 기억과 신념, 그리고 타인과의 끊어진 연결망을 회복하여야만 한다.

우선 치유의 단계에선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을 적극적으로 대면하려는 시도와 선택이 필요하다. "회복 단계에서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피해로 인한 결과를 이해한다."(327쪽) 이것은 트라우마를 지배하고자 하는 피해자의 힘겨운 시도이며, 심리적인 안정을 이끌어 내려는 노력 그리고 잃어버린 '자기감(sense of self)'의 새로운 형성을 위한 도전이다. 트라우마를 가져다 준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직면과 도전은 가장 강도가 높은 마지막 단계를 마치고 나면, 분열된 자신의 '행동 체계'를 다시 구축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 생존자는 신체적인 반응과 정서적인 반응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확립하고, 자기 안의 힘을 긍정한다.

이러한 과정이 지나면 피해자들은 왜곡된 사회적 시선을 벗어나 타인과의 새로운 관계망을 재구성할 힘을 얻게 된다. "생존자는 현재에도 자신을 피해자의 역할 속에 가둬두려는 지속적인 사회적 압력의 원천을 확인하게 된다."(332쪽) 이 단계에서 피해자들은 다른 이들과 주체적으로 대면하고자 한다.

자신을 학대하는 가족 사이에서 성장한 피해자는 침묵이라는 규칙에 협조하기를 거부하고 수치심, 죄책감,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 이 단계에서 피해자는 자기의 주인이 자기 자신임은 확고히 한다. 또한 자신의 시간 중 가장 가치 있었던 자신의 측면을 이끌어내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인 새로운 자기를 창조한다. "회복 단계를 거치면서 생존자는 새로운 자부심을 느낀다."(339쪽)

트라우마 치유의 마지막 단계에서 피해자는 더 넓은 세계에 참여하여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 개인적인 비극에 담긴 의미를 전환시킨다. "사회적인 활동은 생존자의 주도성, 활력, 자원에 힘을 실어 주고, 개인의 능력을 능가할 만큼 그 힘을 증폭시킨다."(344쪽) 생존자는 트라우마의 극복이라는 목적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동맹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특정 시간과 공간에만 소속된 자기 한계를 초월한다.

이제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생존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말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활동은 스스로 치유되기 위한 활동이기도 하다. 이 단계에서 생존자는 가해자를 향한 개인적인 원망을 초월한 원칙의 문제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가해자에게 보상 또는 복수가 아닌 범죄의 책임을 묻는 것이 공동체를 위해 중요한 일임을 깨닫는다.

우리의 트라우마

과연 허먼이 제시하는 것처럼 트라우마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치유될 수 있을까 하는 반문이 생긴다. 이 책 앞부분에서 허먼은 트라우마 연구의 어려움에 대해 호소한다. "은폐와 침묵이야말로 가해자의 첫 번째 방어책이다"(26쪽)란 말처럼 가해자들의 은폐와 침묵, 혹은 그들이 행하는 피해자들에 대한 신뢰성 공격에 의해, 우리들은 사건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피해자들에 대한 무감각적 시선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시선 속에서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계속 커져만 간다. 따라서 허먼이 은연중에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우리들의 연대적 감수성이 필요하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허먼이 이 책에서 주되게 강조하는 것은 트라우마의 극복을 위한 사회적 지지의 필요성이다. 가족, 동료, 친지, 주위 사람이 보여주는 적대적이거나 부정적인 반응은 트라우마를 더욱 심화시키는 반면, 그들이 보여주는 이해와 사랑은 트라우마의 영향력을 완화시킨다.

그렇다면, 허먼이 제시하는 트라우마의 메커니즘과 치유의 기본적 방법론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우리에게는 해결해야 할 트라우마가 남아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깊은 트라우마를 만들어내는 다양한 사건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 그렇고, 4·3이 그렇고, 5·18 등이 그러하다.

트라우마의 메커니즘인 '공포'와 '단절'은 5·18 당시 광주 시민이 느꼈을 '공포'와 '단절감'과 유사하게 설명될 수 있다. 동료와 친지가 죽어나가는 시간은 남겨진 이들에게 커다란 공포였으며, 광주를 제외한 사회적 무관심은 그들에게 깊은 단절감을 안겨다 주었을 것이다. 또 수십 년의 기간 동안 보여줬던 정부의 반성과 설득, 변화의 약속과 애도심 표현 등은 당시 광주 시민들의 트라우마를 고착화시키는 '속박'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공포', '단절', '속박'이라는 트라우마의 메커니즘 속에서, 광주 시민은 광주 시민대로 그 밖의 사람들은 그 밖의 사람대로 또는 연구자는 연구자대로 각기 고립되고 분열되면서 동시에 광주 시민의 트라우마는 커져만 갔다.

허먼의 지적처럼 트라우마 경험과 고통을 다른 이들과 적극적으로 나누는 것은 트라우마 회복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반대로 우리도 또한 5·18 당시 느꼈을 광주 시민의 경험과 고통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이해하며, 우리의 가슴으로 느끼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에 대한 연대적 감수성'과 함께 그들의 단절감과 소외감을 채워주어야 한다.

허먼의 말처럼 공동체의 반응은 트라우마의 궁극적인 해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리에겐 역사적 사건이 가해자가 되어 발생된 사회적 트라우마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사회적으로 인정해야 하며, 나아가 우리는 반드시 당시 사건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지금은 '고통에 대한 연대적 감수성'이 더욱더 필요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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