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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제주도를 美의 총알받이로 만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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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제주도를 美의 총알받이로 만드나!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제주도, 비극의 멍에
제주도 서귀포 강정 마을에 해군 기지가 들어서는 것을 놓고 현지 주민이 강하게 반발하는 등 갈등이 4년째 이어지고 있다. 주민의 반대에도 정부는 해군 기지 건설을 강행하고 있어서 앞으로 더 심각한 갈등이 예상된다. 이런 상황을 놓고 작가회의 소속 작가들이 <프레시안>에 약 8회에 걸쳐서 글을 연재한다.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많이 들었던 물음이 있다.

"너희 제주도 사람들은 결혼하면 신혼여행을 어디로 가니?"

사람들 대부분이 신혼여행이라면 당연히 제주도를 떠올렸던 1990년의 일이다. 해외여행 기회가 거의 막혀있는 상황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혹자는 이런 질문도 했더랬다.

"제주도에 가려면 목포에서 출발하는 게 가깝니, 부산에서 출발하는 게 가깝니?"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대한민국 지도를 한번만 들여다봐도 뻔히 알 수 있는 사실 아닌가. 역사적으로 보자면, 제주도는 바로 그 지정학적인 가치 때문에 참혹한 일을 여러 번 겪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해군 기지 건설 논란도 이와 무관치 않으니 대표적인 사건 두 가지만 더듬어 보도록 하겠다.

원(元)·명(明) 교체기 탐라/제주의 비극

'탐라(耽羅)'가 현재의 '제주(濟州)'로 명칭이 바뀐 시기는 고려 고종 10년, 그러니까 1223년이다. 제(濟)가 큰물을 건넌다는 뜻이고 주(州)가 큰 고을이라는 뜻이니 탐라에서 제주로 명칭이 바뀌었다는 말은 이 섬이 결국 고려의 행정 구역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삼별초 항쟁이 끝난 후 1273년 즈음부터 이 섬은 다시 탐라라는 이름을 회복할 수 있었다. 대륙 북쪽에서 발원한 원(元)이 섬의 지정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고려와의 관계를 지우고, 그 자리에 자신들을 끼워 넣으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약 100여 년 동안 탐라/제주는 남송, 일본, 고려를 견제하는 원의 발판으로 활용되었다.

탐라/제주의 비극은 명(明)에 의해 원이 멸망하면서 시작되었다. 탐라/제주가 원의 직할령이었으므로 명은 제주의 소유권을 주장하였고, 고려는 이를 넘어설 필요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 공민왕은 원으로부터 수모를 받을 만큼 받았었고, 탐라/제주에는 원을 지지하는 세력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공민왕은 최영에게 명하여 2만5600여 명의 정예군을 314척의 전함에 나눠 태우고 탐라/제주 토벌에 나섰다(훗날 명을 치러 가던 요동 정벌군은 3만88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최영의 토벌은 성공하였다. 이영권은 <제주 역사 기행>(한겨레신문사 펴냄)에서 당시 새별오름 일대는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가 땅을 가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삼별초 전투가 단지 3일에 끝났던 데 반해 토벌전이 한 달을 끌었으니 그럴 만도 하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일제 말기 화순항에 가해진 미군의 폭탄 세례

시간이 흘러 섬의 지정학적 가치에 새삼 주목한 것은 일제였다. 중국 본토를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 탐라/제주, 그 가운데서도 특히 중국과 가까운 대정 지역에 군사 시설을 구축해 나갔던 것이다. 대표적인 장소가 '알뜨르 비행장'이다. 1926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30년대 중반 완성된 이곳은 중국 본토를 비행기로 폭격하는 장소에 맞춤하였다.

당시 폭격기가 주유할 수 있었던 연료의 양은 한정되어 있었는데, 알뜨르 비행장을 활용한다면 상하이나 난징까지 건너가서 작전을 수행하는 데 유효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는 그 일대의 항구 또한 해군 기지로 이용하였다. 예컨대 화순항은 일제의 군사 물자가 들어오고, 관동군이 입항하는 주요한 통로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이 섬은 그러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는 데에는 그만한 희생이 요구되었다. 예컨대 미군은 1944년 즈음부터 화순항에 B29 폭격을 가했다. 일제의 군사 활동을 제약하는 데 화순항이 중요한 목표물로 부각되었던 셈이다. 정확하게 조사하지 못했으나, 나는 화순항에 쏟아진 폭탄의 양이 제주항에 쏟아진 폭탄의 양보다 적지는 않았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군사적인 요충지를 두들기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효과적인 수순이었을 테니 말이다. 덧붙이자면, 제17방면 일본군과 제58사령부는 1945년 4월 23일 제주도민의 조선 본토 이전을 진지하게 논의한 바 있다. 일제는 제주도 전역을 불바다로 만드는 상황까지 고려하면서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일제는 그러한 작전을 수행하기 이전에 원자폭탄을 맞고 패망하였다.

ⓒ뉴시스

원(元)=일제=미제, 그렇다면 우리는?

제주에 해군 기지를 만들겠다고 한다. 나는 반대한다. 전쟁을 반대하기 때문이고, 전쟁의 가능성을 미연에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실 제주도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은 미국의 욕심 때문이 아닌가. 미국은 제주도의 지정학적인 가치를 진작부터 가늠하고 있었다. 일제와 맞서면서 이를 깊이 실감했을 터이다. 일본이 중국을 제압하기 위해 일찌감치 알뜨르 비행장 건설에 나섰던 것처럼,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써 제주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제주도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라고 종용해왔다. 1988년 송악산 부근에 군사 기지를 건설하려던 시도도 이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의 성장세가 두드러지자 미국의 요구는 더욱 집요해졌다. 노무현 정부 시절 미군 부대의 평택 이동이 그 일환이었으며, 지금은 그 과녁이 제주로 돌려진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시도가 관철된다면 이 섬은 원(元)·명(明) 교체기의 탐라/제주, 일제 말기의 제주가 겪었던 비극의 가능성을 고스란히 끌어안아야 한다. 그 비극적인 길을 우리가 굳이 따라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제주가 평화의 섬으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에서 배우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인간을 굳이 짐승보다 우월하다고 판단할 근거가 사라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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