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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서평가의 '고단한' 혹은 '은밀한'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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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서평가의 '고단한' 혹은 '은밀한' 고백 [2011 이렇게 읽었다] 장정일이 읽은 책은?
나에겐 독후감과 서평을 나누는 기준이 있다. 우선 독후감이란, 책을 요약·정리하는 작업을 뜻한다. 그 작업 중이나 끝에, 나의 시각이나 의견이 살짝 끼어들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독후감의 본령이 아니다. 사람들은 책을 읽고 나면 항상, 자신만의 감상이나 비평을 가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는데, 독후감은 그런 강박을 면제해 준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런 독후감을 만만하게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곧 설명될 서평이 전문가의 영역인 반면, 독후감은 그보다 단계가 낮은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의 것으로 치부하곤 한다. 하지만, 책을 요령 있게 요약·정리하는 일이야말로 신기의 솜씨가 없으면 못한다.

독후감이 내게 맡겨진 책을 읽는 일이라면, 서평은 맡겨진 책 이상을 읽는 일이다. 서평은 해당된 책을, 그 책을 쓴 사람이 이루어놓은 그 동안의 작업 속에, 또 그 책이 다룬 주제를 다른 지은이의 입장이나 그들이 성취한 수준과 비교할 줄 알아야 한다. 때문에 서평은 한 분야에서 오래 훈련받은 사람이나 그 주제에 정통한 사람이 잘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이다. 정리하자면, 독후감은 문리가 트인 사람이면 분야와 상관없이 쓸 수 있는 글이고, 서평은 한 분야의 전문가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내 한해를 돌아보니, 올해도 많은 책을 읽었지만, 그것이 모두 서평이 되지는 못했고, 대부분 독후감에 낙착했다. 굳이 전공을 따지라면, 나의 전공은 문학이다. 그러니까 내게도 서평을 잘 쓸 수 있는 '나와바리'가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오래 전부터 한사코, 내 전공 구역을 버리고자 했다. 그렇다고 해서 문리가 트인 것도 아니면서, 광역 지역을 뛰어 다니며 독후감을 쓰고자 했다. 이 글은 올해 나온 책을 대상으로 내가 썼던 독후감을 뒤돌아보는 극히 개인적인 기록이지, 여기에 언급되는 책들이 올해의 추천서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힌다.

책에 대한 연재를 맡은 이들이 늘 당면하는 것이지만,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글을 쓰는 일이 아니라, 책을 고르는 일이다. 이 사람들은 글을 쓰는 게 직업인지라, 임무만 떨어지면 글을 쓰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보다는 어떤 책을 고르느냐가 더 어렵다. 나의 경우 여러 지면에 글을 연재하면서, ① 올해의 신간(경우에 따라 작년의 책까지 포함) ② 비문학(문학 작품이 아닐 것) ③ 작은 출판사(대형 출판사 기피), 라는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 위의 세 원칙을 통과하고 나면, 그 책의 주제가, 현재의 사회적 관심사나 공시적 맥락과 맞아 떨어져야 했다. ①, ②, ③도 까다롭지만, 마지막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화룡점정하는 일이나 같다.

올 초에는 지난 해 연말에 이어, 이명박 정부 들어 더욱 열악해진 인권과 도시 빈민 문제에 대한 해답을 책 속에서 찾아보고자 했다. 강현수의 <도시에 대한 권리>(책세상 펴냄), 서보혁의 <코리아 인권>(책세상 펴냄), 마이크 데이비스가 엮은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유강은 옮김, 아카이브 펴냄)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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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전을 멈춰라>(히로세 다카시 지음, 김원식 옮김, 이음 펴냄). ⓒ이음
그러다가 일본 동북부를 덮친 지진 해일(쓰나미)의 여파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생긴 3월부터는 원자력에 관한 책을 집중 소개했다. 히로시 다카시의 <원전을 멈춰라>(김원식 옮김, 이음 펴냄)·<체르노빌의 아이들>(육후연 옮김, 프로메테우스출판사 펴냄), 정욱식의 <글로벌 아마겟돈>(책세상 펴냄), 헬렌 칼디코트의 <원자력은 아니다>(이영수 옮김, 양문 펴냄), 강양구의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사이언스북스 펴냄)가 그런 책이다. 원자력에 대한 책을 읽는 가운데 히로시 다카시라는 걸출한 '1인 언론'의 존재를 알게 되어, 연이어 그의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위정훈 옮김, 프로메테우스출판사 펴냄)와 <제1권력>(이규원 옮김, 프로메테우스출판사 펴냄)을 읽고, 그를 알리고자 했다.

위의 책들은 모두 '사회적 독서'와 관련 되는데, 차례대로 이은용의 <미디어 카르텔>(마티 펴냄), 클라이드 바로우의 <대학과 자본주의 국가>(박거용 옮김, 문화과학사 펴냄), 서보명의 <대학의 몰락>(동연 펴냄), 제니퍼 워시번의 <대학 주식회사>(김주연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존 티한의 <신의 이름으로>(박희태 옮김, 이음 펴냄), 에단 와터스의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김한영 옮김, 아카이브 펴냄), 데이비드 프리드먼의<거짓말을 파는 스페셜리스트>(안종희 옮김, 지식갤러리 펴냄), 빌 코바치·톰 로젠스틸의 <텍스트 읽기 혁명>(김원옥 옮김, 다산초당 펴냄), 에이미 굿맨·데이비드 굿맨의 <미친 세상에서 저항하기>(노시내 옮김, 마티 펴냄), 미키 맥기의 <자기 계발의 덫>(김상화 옮김, 모요사 펴냄) 등도 여기 속한다.

마감은 코앞인데, 아직 책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 북 칼럼니스트는 가벼운 공황에 빠진다. 신간이 흔전만전인데도 불구하고, 자주 이런 사태를 겪게 되는 까닭은 뻔하다. 공공연하지만, 여전히 대외비(對外秘)로 남아 있어야 할 사항으로, '이 책은 지은이와 말싸움을 벌인 적이 있거나, 그냥 밉거나, 잘 나가는 게 배 아파서', '저 책은 출판사가 마뜩찮거나, 보태 주기 싫어서', 또 '이 책은 분명 훌륭할 것이지만, 너무 두껍거나 주제가 만만치 않아, 독후감이나 서평, 어느 쪽도 자신이 없어서' 쓰지 않거나, 쓰지 못한다. 신간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읽고 쓸 책만 변변찮아지는 게 아니라,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시간마저 동나 버린 것을 알게 된다.

그때마다 북 칼럼니스트를 구해주는 것은 평전·역사서·문화(풍속) 연구다. 이 분야의 책들은, 그저 잡기만 하면 독후감이나 서평 어느 형식으로든 흉내를 낼 수 있다. 황재문의 <안중근 평전>(한겨레출판 펴냄), 류시현의 <최남선 평전>(한겨레출판 펴냄), 김윤희의 <이완용 평전>(한겨레출판 펴냄), 김원의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현실문화 펴냄), 백승종의 <정조와 불량 선비 강이천>(푸른역사 펴냄), 전인권·정선태·이승원의 <1898, 문명의 전환>(이학사 펴냄), 전우용의 <현대인의 탄생>(이순 펴냄), 패트릭 스미스의 <다른 누군가의 세기>(노시내 옮김, 마티 펴냄), 나이토 치즈코의 <암살이라는 스캔들>(고영란 옮김, 역사비평서 펴냄) 등은, 나를 공황에서 구해준 고마운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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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르마늄 라디오>(하나무라 만게츠 지음, 양억관 옮김, 이상북스 펴냄). ⓒ이상북스
소설은 읽더라도 컴퓨터에만 내장해 놓고 독후감을 발표하지 않는 게 내 원칙인데, 어쩌다 예외가 생기기도 한다. 하나무라 만게츠의 <게르마늄 라디오>(양억관 옮김, 이상북스 펴냄)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작품은 단행본 뒤에 내가 꽤 긴 발문을 썼던 작품인데,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청소년 판매 금지' 처분을 내렸다.

(이런 반헌법적인 반관(半官) 단체가 버젓이 연명하고 있는 것도 납득 되지 않지만, 이런 단체의 위촉을 받아 '이 달의 책'을 선정하는 위원으로 활약하시는 소위 '지식인'이라는 작자들은 더 우습다. 그들은 책을 금지시킬 수 있는 간행물윤리위원회 고유의 잘못을 '세탁'해 주는 똑같은 반헌법 범죄자들이 아닌가?)

내가 발문을 쓴 작품이 법적인 곤욕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도 아무 손을 쓰지 않는다면, 내 발문이 '주례사'에 불과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다. 그래서 그 작품을 옹호하는 글을 따로 써서, 한 주간지에 실었다.

똑같은 문학이지만, 소설과 달리 희곡은 될수록 지면에 소개하고자 노력한다. 최창근의 <봄날은 간다>(이매진 펴냄)와 김은성의 <시동라사>(지안 펴냄)가 그런 경우다. 소설은 서평의 대상이 되지만 희곡집은 외면 받는 게 우리나라 실정인데, 이론서의 경우도 사정은 같다. 미술이나 영화 관련 평론서나 이론서가 자주 서평에 오르내리는 반면, 연극 평론서나 이론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새해에는 올해 끝내 쓰지 못했던 안치운의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독백과 운문의 귀향>(문학과지성사 펴냄)과, 한무의 <아르토와 잔혹 연극>(지만지 펴냄)을 꼭 쓸 작정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난장이 펴냄)·<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이현우·김희진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허경 옮김, 인간사랑 펴냄),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이민아 옮김, 궁리 펴냄),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이은정 옮김, 동녘 펴냄), 랍 벨의 <사랑이 이긴다>(양혜원 옮김, 포이에마 펴냄) 같은 책은, 지은이들의 철학이나 주장 가운데서, 현재의 사회적 관심사나 공시적 맥락을 금방 포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 책들이다. 내용 자체가 시사적이고 평이한데다가 얇기까지 한 이런 책은, 북 칼럼니스트들의 'SOS 비품'이다.

모두들 알다시피, 북 칼럼니스트가 글을 싣는 지면은 학술 전문지도 아니고 대학원의 학보도 아니다. 이를테면, 북 칼럼니스트는 자신이 읽고 소개하고 싶은 책이나 주제를, 어느 특정한 독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위한 '읽을거리'로 변용하는 일을 한다. 올해 나를 가장 애먹였던 미셀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오르트망 옮김, 난장 펴냄)와 이현우의 <애도와 우울증 :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무의식>(그린비 펴냄)은, 불특정 다수와 책을 잇는 '어댑터(adaptor)'의 능력을 시험하는 책이다. 읽을거리를 만들거나 중계자의 자질을 갖추고 나서야, 서평이나 독후감을 가지고, 정치 투쟁을 하거나, 진지전을 벌일 수 있다.

사족 : 이 글에 나오는 책들은, 내가 2011년 동안 종이 지면에 소개한 책들의 일부며, '프레시안 books'에 연재했던 것들은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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