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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질' 정치인? 기자·교수·판검사보다는 '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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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질' 정치인? 기자·교수·판검사보다는 '양질'! [정치의 몰락? 재발견!] 박상훈이 본 '정치 수다'
1.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낡은 정치가 무너지고 있지만 새로운 정치 또한 아직은 제대로 태동하고 있지 못함을 말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기성의 낡은 정치는 몰락하고 있다고 보는지, 그 근거를 따져보는 것은 흥미롭다. 동시에 민주적 가치나 규범에 상응하고 그러면서 오늘의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제대로 된 정치(가)의 세계를 구축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신선하다.

이 책에 대한 그간의 소개나 서평은 주로 전자, 즉 낡은 보수 시대의 정치가 몰락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 같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 사회에서 보수 정치의 기반이 왜 취약해졌나, 세대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강남이 정치적으로 주목받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박정희 패러다임의 붕괴와 안철수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지 등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의 전반부보다 후반부인 5장 이하가 더 재미있었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이 후반부의 주제, 즉 정치가 제대로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데 있는 게 아닌가 싶다.

2.

▲ <정치의 몰락>(박성민 지음, 강양구 인터뷰, 민음사 펴냄). ⓒ민음사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가 동의하기 어려운 갈등적 주제를 담고 있다. 막스 베버가 정치의 특징을 말하면서 "싸우고 있는 신들" 간의 해결 불가능한 투쟁을 말했듯이, 어쩌면 정치에서 불편부당함의 진리를 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아무리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숭상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신념의 불일치, 도덕적 이견을 해결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인간의 정치에서 그런 것들은 정의로운 민주 사회로의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사려 깊게 적응하고 조정해가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주어진 조건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가치 다원주의, 즉 정치적 논의에 있어서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판단해볼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정치에 대한 이해를 깊고 넓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가 하는 차원에 있다고 하겠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그런 기준에 잘 부합하는 내용과 튼튼한 논리를 담고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고,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많은 사실들과 지식,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의 분석과 주장을 모두 내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싶은 주제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장과 그것의 근거들에 나 나름의 생각과 판단을 견줘볼 수 있었기에, 나로서는 좋은 독서 경험이 되었다. 사실 중요한 정치 현상이라면 어떤 것이든 어떤 한 관점에서만 충분히 이해되고 조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능한 많은 관점과 이견이 상호 교환되는 것이 좋고 그래서 공론장의 내용이 풍부해지면, 민주주의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정치적 식견을 갖춘 시민성'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 될지 모른다. 정치에 대해 대화 가능한 이야기가 많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3.

정치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정치학을 전공했고 정치에 관해 글을 쓰고 강의를 하지만, 늘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일반 대중 앞에서 이야기해야 할 때가 더욱 어렵다. 아마도 내가 천체물리학이나 의학, 화학, 경제학을 전공하고 그와 관련한 대중 강의를 한다면 이야기는 다를 것이다. 그런 분야는 어느 정도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의 지식의 차이가 확실히 있고 따라서 전문 지식을 활용해 다소 우월한 심리 상태에서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는 누구나 전문가이다. 누구나 말할 수 있고 또 말을 한다. 일반 대중들이 개진하는 정치에 대한 판단이 때로 더 정확할 때가 있고 현명하고 지혜로울 때는 더 많다. 그런 점에서 정치는 가장 민중적이고 민주적인 분야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정치를 권력과 영향력을 교환하는 부패하고 부정한 세계로 보고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정치에 가까이 다가가거나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정치에 관심 갖는 것을 좌절시키는 데, 상대를 향해 '정치적'이라거나 '권력 지향적'이라는 편견을 동원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나는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전공을 정치학으로 바꿨는데, 그러면서 내가 정치를 하는 데 뜻이 있는 게 아니고 권력 지향적인 취향과도 거리가 멀다는 인상을 주기위해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괜한 걱정이 아닐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국회의원 보좌관이 되는 일과 같이 민주 정치를 경험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한 것이 못내 아쉽다.

입법과 정책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익과 영향력의 흐름이 어떻게 정치의 세계에 투입되는지, 국가를 둘러싼 그 수많은 제도와 절차들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정치 과정의 내부로부터 참여 관찰할 기회가 없었기에, 중요 정치 사안이 제기될 때마다 분명한 판단을 하기가 어렵다. 그러다보니 외부 관찰자로서만 분석하고 비판적 논평을 한다는 것이 과연 얼마나 균형감을 갖춘 것인지, 스스로 늘 불안해한다. 권위주의 때라면 몰라도 일단 민주화가 된 이후이라면 실제 정치를 경험하는 것만큼 민주주의를 더 잘 이해할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설령 정치학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원을 간다 해도 학부 졸업 후 바로 진학하기보다 국회의원 보좌관이나 지방의원 보좌관을 짧게라도 해보길 권하고 싶다. 경험의 기반 없이 책과 학교 교육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누가 정치를 부정시하고 야유하나? 과거에는 군부가 그랬다. 민간인에게 정치를 맡겼더니 사회 혼란과 부정부패만 낳았다며, 자신들이 "국가 안보"에 그치지 않고 "사회 안보"를 책임지는 역할을 해야겠다는 논리를 앞세워 쿠데타를 정당화했다. 민주화 이후에는 재벌과 관료들이 그 역할을 이어갔다. 재벌들은 정치는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낭비적 요인이라 주장하고 정치 대신 시장 원리의 우월함을 강변해왔다. 관료들은 국회나 지방의회에서의 질의나 감사, 자료 요청 때마다 정치인들 때문에 일을 못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주류 지식인과 주류 언론들 역시 다르지 않다. 이들은 선출된 인민의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을 우습게 알고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를 은근히 과시하는 데 열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의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겠지만, 솔직히 나는 우리 사회 엘리트 가운데 정치인이 가장 낫다고 생각한다. 지식인이나 언론 엘리트, 고위 관료나 법률 엘리트 가운데 정말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볼 때가 많다. 민주적 규범이나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행태를 서슴없이 드러내는 일도 많다. 사실 국회 인사 청문회에서 부정부패, 투기, 위장전입 등 가장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여주는 대부분의 엘리트들 역시 이들이다. 그에 비해 정치인이 낫다는 것은 타고난 그들의 인격이 낫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들의 세계에는 법을 준수해야 하고 도덕적이어야 하고 책임감을 보여야 하는 외적 제약이 훨씬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를 기준으로 그간 민주적 규범에 가장 빨리 적응한 엘리트 집단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정치인을 말하겠다.

물론 정치가 지금보다 좋아져야 하고 정치인들의 자질이나 행태에도 아직 개선될 점이 많겠지만, 적어도 정치나 정치인을 무작정 야유하고 대책 없이 공격하는 일은 자칫 지배 이데올로기에 굴복하는 것일 때가 많다. 그런 사람들이 자주 동원하는 것은 "정치 논리가 개입하면 안 된다"는 데 있다. 시장 원리와 관료적 합리성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그 이면 논리라 할 수 있는데, 그건 결국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제아무리 공적 권력이라도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과거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형성된 기존 질서의 무변화를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해 한진 중공업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을 때 기업 측과 보수파들은 노사 간 자율 해결을 강조했던 반면 노동 운동 진영과 진보파들은 국회의 정치적 개입을 요구했다. 사적 영역에서 자율적 해결을 주장하는 것은 강자 집단들이다. 그들은 공적 개입이 부재한 상황에서 언제나 승자이기 때문이다. 누가 갈등을 사회적으로 확대하고자 하고 이를 공적 논쟁의 중심으로 가져가고자 하는가? 약자들이다. 사회의 중대 이슈를 공적 영역으로 끌고 와 다투고 논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제대로 된 민주 정치가 하는 일이다.

한진 재벌의 총수가 국회 청문회 앞에서가 아니었다면, 그처럼 왜소하고 초라한 인격을 드러내는 일은 있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을 굴복시킨 힘 가운데 하나는 분명 민주 정치가 가진 위력에 있었고, 그 위력을 좀 더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만 있다면 비정규직 문제에서부터 시작해 우리 사회의 비극적 노동 문제나 잘못된 경제 체제를 개선해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뚫고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을 민주화하는 일 혹은 정치 이야기를 보통 사람들의 자유로운 놀이로 만드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 책에 대해 내가 가장 크게 평가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과 환경 분야 전문 기자가 오랜 기간 정치 컨설턴트로 역할을 한 저자와 나눈 이야기를 책으로 묶었다는 사실도 그랬지만, 그 이전에 정치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흥미로웠다. 책으로 330쪽이나 되는 분량인데, 나는 이틀에 걸쳐 읽었다.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나 역시 실제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해본 적이 별로 없다. 정치에 대해 어느 정도 이성적 기반을 갖고 말을 주고받는 일은, 앞서도 말했지만 정말이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이 책은 정치 이야기를 민주화하는 일, 정치를 일반 대중의 이야기로 만드는 일에 크게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4.

책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은 적어도 이 책에 한해서는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정한 해설이 필요할 만큼 어려운 내용도 아니고 그야말로 관심과 열의만 있다면 일반 시민 누구나 읽고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이견이 있는 것에 대해서만 내 생각을 말해보겠다. 그것은 중대선거구제에 대한 것이다.

이 책은 선거 제도 개혁과 관련해 독일식 정당명부제나 중대선거구제가 우리 정치를 좋게 만드는 데 필요한 좋은 선거 제도라 말한다. 오늘날 대표적인 비례대표제 가운데 하나인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좋다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중대선거구제인데, 이 책은 승자 독식의 부정적 효과를 갖는 소선거구제로는 낮은 대표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동시에 갈등과 통합, 경쟁과 승복의 정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취지에 동감한다 해도 중대선거구제를 도임한다고 해서 좋아질 것이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선거 제도 연구의 최고 권위자의 한 사람인 아렌트 레이프하트가 강조하듯이 비례대표제에서는 선거구 크기를 늘릴수록 비례성이 높아지는 반면, 단순다수제에서 선거구 크기를 늘리면 비례성은 낮아진다. 당선의 문턱(threshold)은 현재의 40퍼센트 안팎에서 훨씬 낮아질 것이고 그래서 사표는 줄겠지만 묘하게도 비례성은 낮아진다는 사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비밀은 큰 정당이 제도 효과의 이점을 독점하는 데 있다. 샤츠슈나이더가 말했듯, 소선거구제에서는 제2당이 이득을 가장 많이 본다. 반면 선거구 크기를 늘리면 그에 비례해 제1당의 이득이 커진다. 그래서 소선거구제에서는 양당제가 발달하기 쉽고 정권 교체가 용이한 반면 중대선거구제에서는 1당 우위체제가 나타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과거 일본의 이른바 '55년 체제' 하에서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으며, 1990년대 후반 소선거구제로 바뀌고 나서야 비로소 야당의 집권이 가능해졌다.

선거 제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단순다수제 하에서 중대선거구제를 하는 것을 최악의 선거 제도라고 말한다. 단순다수제를 한다면 소선거구제를 해야 한다. 승자독식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집권당의 과대대표를 막고 제1야당에 제도 효과를 몰아줘 장기 집권을 제어하는 효과도 있다. 과거 우리의 경우도 유신체제와 5공화국에서 집권당이 확실한 다수당이 되기 위해 소선구거제를 중선거구제로 바꾼 바 있고, 그래서 야당은 소선거구제 복원을 민주화의 과제로 삼았다. 1987년 당시 우리에게 민주화란 대통령 직선제와 소선거구제 복원이었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봐도, 단순다수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들은 거의 모두 소선거구제를 한다. 결국 문제는 소선거구제냐 중대선거구제냐가 아니라, 큰 정당들이 득표에 비해 더 많은 의석을 가져가는 단순다수제를 바꿀 것이냐 말 것이냐에 있다.

한국 정치에서 필요한 선거 제도 개혁은 비례성을 높이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과 같이 사회 갈등과 조응하지 않는 대표 체제가 지속되어서는 한국 정치가 좋아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례대표제를 한다면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것은 김대중 정부 시절 민주당의 당론이었고 게다가 현행 소선거구제와 결합도 비교적 용이하다는 점에서 제도 변화의 충격도 그리 크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 혹자는 지역 구도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면서 중대선거구제를 이야기하는데, 지역 구도를 완화의 측면만 놓고 봐도 비례대표제를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요즘은 지역 구도 완화에 도움이 된다며 석패율제를 여야가 주장하고 있는데, 역시 그보다도 훨씬 효과적인 것이 독일식 정당명부제이다. 나아가 중대선거구제를 할 경우, 특정 지역에 강한 기반을 가진 인물이나 세력에게 정당 진입이 용이해진다. 그럴 경우 지금과는 다른 진짜 지역 정당이 등장할 가능성 또한 높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제도에 대한 이야기는 정답이 있기 어렵다. 그 점에서 나의 생각도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유보적 조건을 전제한다 해도, 중대선거구제를 둘러싼 나의 이견에 대해 이 책의 저자들이 어떤 의견을 갖는지는 더 들어보고 싶다.

5.

정치의 현장에서, 경험과 실천을 통해 형성된 지식의 발전을 볼 때마다 놀랍다. 정치학자들보다 더 큰 사유와 성찰을 보여주는 사람이나 더 나은 지적 작업의 성과를 만날 때는, 기분이 몹시 좋다. 노동운동가 손낙구가 민주노동당 국회 보좌관으로 있으면서 정리해 낸 내용을 <부동산 계급 사회>와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라는 두 책으로 출간하게 되었을 때 출판을 담당한 사람으로서 보람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여론조사 분야에서 꾸준히 실력을 쌓아온 성과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한귀영의 책 <진보 대통령 vs 보수 대통령>을 낼 때도 그랬고, 오랫동안 민주당의 정치 참모로서 일해 온 유창오의 책 <진보 세대가 지배한다>를 낼 때도 같은 생각을 했다.

'사회적 지식인' 혹은 '현장 지식인'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민주 정치의 이상을 밝게 만든다. 이 책 <정치의 몰락-보수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권력의 탄생>을 읽으면서 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정치학자들의 정치학 논문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정치 실천가 내지 적극적 시민이 말하는 정치 담론이 갖는 매력을 이 책은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보여주는 정치 이야기의 향연에 독자 여러분도 참여해보시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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