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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히어로' 배트맨, 사실은 동성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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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히어로' 배트맨, 사실은 동성애자?! [마니아 서재] <순수의 유혹>, 배트맨을 저격하다
지난 호 '어둠의 기사 배트맨 연대기 ①'(☞바로 가기 : 배트맨, 원래는 냉혹한 살인자였다!) 마지막에서 만화 규제에 따른 배트맨의 변화를 언급하면서, 만화의 해악에 대해 설파한 프레드릭 웨덤의 책 <순수의 유혹>이 배트맨을 콕 집어 공격했음을 밝혔다.

어떻게 공격했을까? 배트맨이 범죄자들을 막는 과정이 폭력적이라고?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을 정당화한다고? 캣우먼 등 여성 캐릭터들이 선정적으로 등장한다고? 이런 부분들도 언급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웨덤이 콕 집은 건 "배트맨 이야기들은 심리적으로 동성애적이다(Batman stories are psychologically homosexual)."라는 것이었다.

▲ 프레드릭 웨덤 박사.
현재에도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사회에 상당한데, 웨덤이 배트맨을 동성애적이라고 지적한 1950년대에는 오죽 심했겠는가. 출판사는 웨덤의 지적에 당황했다. 웨덤의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가와는 별개로 그는 앞서 언급했듯 미국 사회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아 만화 출판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웨덤은 구체적으로 배트맨의 어떤 부분이 동성애적이라고 공격했을까? 독자들 중엔 이미 잘 알고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배트맨 이야기들은 심리적으로 동성애적"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지만 어떤 부분이 동성애적인지 충분히 짐작을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바로 배트맨의 동료…라기보다는 조수에 가까운 사이드킥(sidekick) 로빈과 배트맨의 관계 때문이다.

<순수의 유혹> 7장 "나는 섹스광이 되고 싶다(I Want to be a Sex Maniac)"에서 웨덤은 "몇 해 전부터 캘리포니아의 심리학자들은 배트맨 이야기가 심리학적으로 동성애적이라고 지적했으며 우리의 조사는 이 지적을 완전히 확인했"으며 "성인 배트맨과 그의 젊은 친구 로빈이 함께하는 모험에 동성애적인 분위기가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배트맨과 로빈이 악당들과 함께 싸우는 장면을 통해 '남성들은 제거되어야 할 악당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항상 딱 달라 붙어 다녀야 한다'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제시한다는 것이다.

▲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는 배트맨과 로빈.

웨덤은 배트맨이 부상당해서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로빈이 그 옆에서 간호하는 것이나 배트맨과 로빈이 집사 알프레드와 함께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한 호화로운 저택에서 사는 것도 문제 삼았다. 심지어 초대 로빈의 이름이 딕 그레이슨(Dick Grayson)이라는 것도 지적의 대상이었다. 딕(Dick)은 남자의 이름으로도 쓰이지만 속어로는 남자의 성기를 의미한다. 또 그레이슨의 그레이(Gray)는 게이(Gay)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로빈이 입은 원색 계열에 맨 다리를 드러낸 복장 역시 지적의 대상이었다. 웨덤과 <순수의 유혹>이 미국 만화계에 끼친 영향은 웨덤을 기리기 위한(?) 사이트 "순수의 유혹.org"(☞)에서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웨덤의 책 <순수의 유혹> 본문도 인터넷으로 볼 수 있다. (☞)

'동성애 공세'가 만들어낸 '배트맨 패밀리'

배트맨과 로빈의 관계를 굳이 이런 방향으로 적극 해석하자면 말이 아예 안 되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당시는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인 시절이었기에 DC 코믹스 측은 웨덤의 공격을 방어해야 했다. 배트맨과 로빈의 관계가 동성애와 관련 없다는 것을 해명하고 강조하기 위해 1956년, <디텍티브 코믹스> 233호에서 배트맨의 짝인 배트우먼(캐시 케인)을 선보였다. 배트맨과 성적 긴장감을 형성하던 이성 캐릭터로는 <배트맨> 1호(1940)부터 등장했던 캣우먼이 이미 존재했지만, 엄밀히 구분하자면 악당에 속하는 캐릭터였기에 DC 측은 더욱 확고한 배트맨의 연인을 마련한 것이다.

배트맨에게 배트우먼이라는 짝이 생긴 것처럼, 로빈에게도 또래의 이성 짝꿍이 생긴다. 1961년 출간된 <배트맨> 139호에서 배트우먼의 조카이자 사이드킥인 배트걸(베티 케인)을 등장시켜 로빈의 여자 친구로 삼았다. 이렇게 배트맨과 배트우먼은 각각 아빠와 엄마 역할을 하고 로빈과 배트걸은 둘의 자녀 역할을 하는, 이성애에 기반을 둔 (웨덤의 공격을 무마시킬 만한) "건전한" 유사가족이 탄생한 셈이다.

▲ 1961년의 배트맨 가족. 왼쪽부터 배트맨, 배트마이트, 로빈, 알프레드, 배트걸, 고든 국장, 배트우먼 그리고 배트하운드.

여기서 갑자기 질문. 국내 개봉한 배트맨 영화나 국내 번역 출간된 배트맨 코믹스에서 혹시 배트우먼 캐시 케인과 배트걸 베티 케인의 이름을 들어본 적 있으신지? 고백컨대 지금 이 글을 쓰는 이도 배트맨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이름이다. 글 쓰는 이가 알고 있는 배트걸은 고든 국장의 딸 바버라 고든으로 <배트맨 킬링 조크>(앨런 무어 지음, 브라이언 볼런드 그림, 박중서 옮김, 세미콜론 펴냄)에서 조커에게 총을 맞고 하반신이 마비되어, 이후 정보 조사와 해킹으로 배트맨을 돕는 '오라클'이 되는 인물이다. 요즘 독자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하지만 당시 DC 코믹스는 배트우먼과 배트걸을 통해 배트맨과 로빈 사이에 제기되는 동성애 의혹을 걷어내려 했다.

배트맨을 유사가족으로 재편하려는 시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유사 가족화의 정점을 찍는 캐릭터는 어린아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5차원에서 온 난쟁이, 배트마이트(Bat-Mite)다. 5차원에서 온 난쟁이라…. 국내 소개된 영화나 만화, 애니메이션을 돌이켜봐도 생소한 캐릭터다. <디텍티브 코믹스> 267호(1959년)에 첫 등장한 배트마이트는 배트맨을 존경하여 배트맨처럼 옷을 입고 초능력을 사용하여 배트맨을 돕는다. 하지만 천방지축인 성격 탓에 자기 딴에는 배트맨을 돕는다고 한 행동이 엉뚱한 결과를 불러 오기도 한다. 배트마이트의 등장으로 배트맨 가족은 성인(배트맨, 배트우먼), 청소년(로빈, 배트걸)에 이어 아동까지 그 구성원을 충실히 하게 된 셈이다.

▲ 배트하운드에 올라탄 배트마이트.
1950~60년대 배트맨 패밀리의 구성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화목한 미국 가정을 떠올려보면 개 한마리가 빠지지 않는다. 슈퍼맨에게 슈퍼 개 크립토가 있듯 배트맨 패밀리에는 복면 쓴 개 벨지안 셰퍼드 말리노이즈 에이스 더 배트하운드(Ace the Bat-Hound)가 1955년 합류한다. 배트우먼, 배트걸에 이어 배트마이트, 배트하운드 등으로 배트맨 패밀리는 비록 풍성해졌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시절의 배트맨은 최근 우리가 영화나 코믹스로 접하는 어둡고 성인 취향의 배트맨과는 사뭇 다른 수위와 재미를 추구했다.

만화가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인식으로 인해 범죄의 수위는 조커가 아이의 성적표나 훔치는 범죄의 수준으로 조정되었다. 흔히들 비하의 의미로 사용하는 '공상 과학적'인 요소들도 도입되어 배트맨의 현실성을 더욱 떨어뜨렸다. 다른 차원에서 온, 마법을 사용하는 난쟁이가 가족으로 합류하고 외계에서 온 악당들이 등장하고 배트맨은 거인이 되기도 하고 소인이 되기도 하고 투명인간, 미이라, 램프의 지니가 되던 시절이었다.

▲ 배트맨의 다양한 변신 모음.
사회의 압력에 따른 규제와 연령 면에서 넓어진 독자층에 따라 조정된 이 시절의 배트맨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지만 갈수록 유치해진다는 이유로 배트맨으로부터 멀어지는 독자들도 생겼다. 이런 추세에 맞추어 DC 코믹스는 1964년, 퇴색해가는 배트맨을 부활시키기 위해 편집자 줄리어스 슈워츠(Julius Schwartz, 1915~2004)에게 배트맨 시리즈를 일임했다.

이 임무를 맡은 슈워츠는 1964년 5월 출간된 <디텍티브 코믹스> 327호에서 배트하운드와 배트마이트, 배트우먼, 배트걸을 배트맨 패밀리에서 제거하는 것으로 개혁을 시작했다. 이 개혁을 "뉴 룩(New Look)" 배트맨이라고 부른다. 슈워츠의 "뉴 룩" 배트맨은 SF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보다 현실적인 본연의 탐정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이렇게 만화에서 "뉴 룩" 배트맨 개혁이 시작되고 2년 뒤인 1966년, 문제의 TV 시리즈 <배트맨>이 방영을 시작한다.

'보이 원더' 로빈 연대기

TV 시리즈 <배트맨>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배트맨 패밀리 중 핵심인 로빈에 대해 정리해보자. 줄리어스 슈워츠에 의해 재정비되었지만 배트맨의 사이드킥인 로빈은 당연히 살아남았다. 보이 원더(Boy Wonder)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로빈은 (비록 배트맨의 동성 애인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청소년과 아동 독자들이 감정을 이입할 만한 캐릭터로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이다. 1940년에 첫 등장하여 70여년의 세월동안 배트맨과 함께 다이내믹 듀오로 활동한 로빈. 하지만 배트맨이 첫 등장부터 지금까지 쭉 '브루스 웨인'으로 유지된 반면, 로빈의 경우는 수차례 바뀌어 지금까지 총 다섯 명의 로빈이 존재해왔다.

1940년에 첫 등장한 초대 로빈 딕 그레이슨은 서커스에서 공중곡예를 하는 그레이슨 가족의 막내로, 첫 등장 시 여덟 살이었다. 부모님이 갱단의 음모에 의해 살해되자 브루스 웨인이 그 음모를 파헤치면서 딕을 자신의 보호 하에 둔다.

▲ <배트맨 : 다크 빅토리>(제프 로브 지음, 팀 세일 그림, 박중서 옮김,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딕 그레이슨이 브루스 웨인과 만나 로빈으로 거듭나는 내용은 미국에서 2000년에 출간된 <배트맨 : 다크 빅토리>(제프 로브 지음, 팀 세일 그림, 박중서 옮김, 그레고리 라이트, 세미콜론 펴냄)에서 반복된다. 이후 브루스 웨인은 딕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딕을 로빈으로 훈련시켜 함께 활동하게 된다. 영화 <배트맨 포에버>(1995)와 <배트맨과 로빈>(1997)에서 크리스 오도넬이 연기했던 로빈이 바로 초대 로빈인 딕 그레이슨이다.

딕 그레이슨은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를 겪게 된다. 소년에서 청년이 되면서, 결정적으로는 1964년에 출간된 <더 브레이브 앤드 더 볼드> 54호에서 저스티스 리그의 청소년 버전인 틴 타이탄즈(Teen Titans)가 시작되면서부터 딕 그레이슨은 점점 배트맨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쿠아맨의 사이드킥인 아쿠아래드, 플래시의 사이드킥인 키드 플래시, 그린 애로우의 사이드킥인 스피디, 원더우먼의 사이드킥인 원더걸 등으로 구성된 틴 타이탄즈를 딕 그레이슨이 리더가 되어 이끌면서 배트맨과는 별도의 활약을 펼치게 된다.



▲ <배트맨 : 패밀리의 죽음>(짐 스탈린 지음, 짐 아파르 그림, 최세민 옮김,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1984년에는 이제 장성하여 성인이 된 딕 그레이슨이 로빈 역할을 포기하고 나이트 윙(Nightwing)이라는 캐릭터로 독립한다. 1983년, <배트맨> 357호에 등장한 소년 캐릭터 제이슨 토드가 딕 그레이슨의 뒤를 이어 1985년에 로빈의 자리를 이어받는다. 제이슨 토드 역시 서커스 곡예사 부부의 아들로 부모가 범죄자에게 살해당하자 브루스 웨인 손에 거둬져 로빈이 된다. 제이슨 토드는 1988년에 발간된 <배트맨: 패밀리의 죽음>(짐 스탈린 지음, 짐 아파로 그림, 최세민 옮김, 세미콜론 펴냄)에서는 조커에 의해 살해되는 운명을 겪는다. 국내 출간된 <배트맨: 패밀리의 죽음> 서문에는 배트맨이 딕 그레이슨과 헤어지고 제이슨 토드가 2대 로빈이 되는 과정이 간략히 정리되어있다. 책임 편집자 데니스 오닐이 쓴 후기에는 제이슨 토드의 죽음을 편집자가 어떻게 결정했는지에 대한 해명이 나와 있다.

<배트맨 : 패밀리의 죽음>은 <배트맨> 426호부터 429호까지의 연재분을 하나로 엮은 단행본이다. 연재 당시 DC 코믹스 측은 427호 마지막에 제이슨이 폭탄이 설치된 창고 안에 갇히는 부분까지 이야기를 전개시킨 다음 전화번호 두 개를 수록했다. 하나는 제이슨이 살아남은 데 투표하는 번호였고 하나는 제이슨의 죽음에 투표하는 번호였다.

투표 결과는 총 1만 614통의 전화 중 살리자는 쪽이 5271통, 죽이자는 쪽이 5343통이었다. 이 결과에 따라 428호에서 제이슨 토드는 등장한지 몇 년 안 되어 사망처리 되고, 갑작스러운 로빈의 죽음에 독자뿐 아니라 언론까지 큰 충격을 받았다. 15년 뒤, 2003년에 출간된 <배트맨 허쉬>(밥 케인 지음, 제프 로브 글, 스콧 윌리암스·짐 리 그림, 박중서 옮김, 세미콜론 펴냄)에서는 제이슨 토드의 부활이 암시되고 결국 2005년 <배트맨> 638호에서 부활한다.

▲ <배트맨 허쉬>(밥 케인 지음, 제프 로브 글, 스콧 윌리암스·짐 리 그림, 박중서 옮김,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제이슨 토드가 <배트맨 : 패밀리의 죽음>에서 사망한 뒤 1989년 12월 출간된 <배트맨> 442호에서 팀 드레이크가 세 번째 로빈이 된다. <배트맨 허쉬>에서는 1대 로빈인 딕 그레이슨이 나이트 윙으로 등장하고 3대 로빈 팀 드레이크가 로빈으로 한 작품 안에 등장한다.

2004년경에는 팀 드레이크의 여자 친구이자 스포일러라는 캐릭터로 활동하던 스테파니 브라운이 잠시 '걸 원더(Girl Wonder)' 즉 여자 로빈이 되기도 한다. (스테파니 브라운을 4대 로빈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팀 드레이크의 아버지인 잭 드레이크가 아들이 로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배트맨에게 총을 들고 가서 해명을 요구하는 등, 아들의 로빈 활동을 적극 반대하자 팀이 스스로 로빈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로빈의 자리가 공백이 되자 스테파니 브라운은 배트맨에게 자신을 로빈으로 삼아달라고 부탁한다. 배트맨은 스테파니를 로빈으로 훈련시켜 함께 활동하지만, 곧 로빈으로서의 자질을 의심하여 해고한다. 독자적으로 활동하여 배트맨의 인정을 받으려 애쓰던 스테파니는 2005년 출간된 <배트맨 : 워 게임즈>(Batman: War Games)에서는 갱들 사이의 전쟁에 휩쓸려 사망하게 된다.

▲ 로빈 걸 원더 스테파니 브라운.
스테파니가 죽은 뒤 팀은 아버지 잭의 승인을 얻어 다시 로빈의 삶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팀의 험난한 로빈 활동은 여자친구 스테파니의 죽음으로 끝나지만은 않는다. 2004년 출간한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브래드 멜쳐·래그스 모랄스 지음, 마이클 베어 그림, 정리아 옮김, 시공사 펴냄)에서 아버지 잭 드레이크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고 가장 친했던 슈퍼보이(슈퍼맨의 사이드킥) 콘 엘이 <인피니트 크라이시스>(Infinite Crisis, 2006)에서 연달아 죽으면서 팀 드레이크는 소위 '멘붕' 상태에 이르게 된다. 팀이 아버지 잭을 잃자 브루스 웨인은 팀을 입양하여 양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팀 드레이크는 팀 웨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팀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으니 양아버지 브루스 웨인마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2008년 7월부터 2009년 3월까지 연재된 이슈들을 엮은 단행본 <파이널 크라이시스>와 <배트맨> 676호부터 681호(2008년 5월~11월)를 엮은 단행본 <배트맨 R.I.P.>에서 배트맨은 저스티스 리그 멤버들과 함께 다른 차원에서 온 신적인 힘을 지닌 악당 다크사이드 맞서다가 다크사이드의 손에 의해 숨을 거둔다.

이 사건으로 배트맨의 자리가 공석이 되자 1대 로빈 딕 그레이슨과 부활한 2대 로빈 제이슨 토드, 3대 로빈 팀 드레이크가 배트맨의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이는 <배트맨 : 배틀 포 더 카울>(Batman: Battle for the Cowl, 2009)이라는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여기서 1대 로빈이자 나이트 윙으로 독립한 딕 그레이슨이 배트맨의 자리를 이어받는다. 딕 그레이슨이 배트맨이 되고 브루스 웨인과 탈리아 알 굴(Talia al Ghul, 영화 <배트맨 비긴즈>에서 리암 니슨이 맡은 라스 알굴의 딸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는 아역으로 등장) 사이에서 인공배양이라는 묘한 방식으로 태어난 소년 데미언 웨인이 로빈(5대 로빈으로 분류)을 맡으면서 3대 로빈인 팀 드레이크는 레드 로빈이라는 별도의 캐릭터로 독립하게 된다.

▲ <배트맨 : 다크 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프랭크 밀러 지음, 이규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이후 배트맨이 결국 살아 돌아오고(미국 코믹스에서 슈퍼히어로가 죽었다 살아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브루스 웨인이 다시 2010년 출간된 <배트맨 : 브루스 웨인의 귀환(Batman : The Return of Bruce Wayne)>을 통해 배트맨에 복귀하면서 잠깐 브루스 웨인과 함께 공동으로 배트맨 활동을 하던 딕 그레이슨은 나이트 윙으로 돌아간다. 데미언 웨인은 부활한 배트맨 브루스 웨인과 함께 로빈으로 활동한다.

로빈의 역사는 큰 틀에서는 위와 같이 정리할 수 있지만 모든 배트맨 관련 작품에서 위와 같은 설정의 로빈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김지선 옮김, 세미콜론 펴냄)에서는 별도의 소녀 로빈 켈리가 등장한다. <배트맨 : 다크 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프랭크 밀러 지음, 이규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에서는 배트맨에게 해고당한 1대 로빈 딕 그레이슨이 악당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밝고 유쾌한 배트맨과 로빈의 모험담 : 배트맨 TV 드라마

개인적으로 로빈이라는 캐릭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국내 개봉한 배트맨 영화 중 크리스 오도넬이 연기한 로빈이 등장하는 <배트맨 포에버>(1995)와 <배트맨과 로빈>(1997) 때문이다.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1989)과 <배트맨 리턴즈>(1992)를 통해 배트맨은 상처 입은 영혼을 가면 속에 감춘 '다크 히어로'라고 학습한 상태에서, 로빈과 썰렁한 농담 따먹기를 하는 유쾌하고 쿨한 영웅 배트맨이 나오는 <배트맨 포에버>와 <배트맨과 로빈>은 쾌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작품이었다.

오히려 공중파 TV 방송국인 서울방송(SBS)에서 1993년부터 이후 꾸준히 방영했던 애니메이션 <배트맨>(Batman : The Animated Series, 미국 방영 1992~1995)의 배트맨이 <배트맨 포에버>와 <배트맨과 로빈> 보다 더 배트맨다운 다크 히어로의 포스를 보여주었다. 배트맨과 로빈 사이도 차라리 TV 애니메이션 쪽이 덜 유치했다. 애니메이션 <배트맨>은 팀 버튼이 흥행에 성공시킨 두 배트맨 영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아동 대상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성인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에서도 배트맨이 홀로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 배트맨이 뿜어내는 어두운 분위기와 고독함은 로빈이 함께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는 덜 강조되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에 로빈의 등장은 없을 것이라는 소식이 그래서 더욱 반가웠다.

▲ 애니메이션 <배트맨>의 한 장면.

국내 번역 출간된 배트맨 그래픽 노블에도 딕 그레이슨이나 제이슨 토드, 팀 드레이크 등 여러 로빈들이 등장하지만, 다행히도 영화 <배트맨 포에버>와 <배트맨과 로빈> 수준의 활극은 연출되지 않는다. 배트맨의 어둡고 고독한 본질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로빈과의 협력이 묘사되어 이들 작품을 접하면서 <배트맨 포에버>와 <배트맨과 로빈> 때문에 갖게 된 로빈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많이 해소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배트맨 포에버>와 <배트맨과 로빈>의 배트맨과 로빈이 뿜어내던, 그 받아들이기 힘든 밝고 유쾌한 분위기는 어디로부터 나온 것일까. 두 영화를 감독한 조엘 슈마허가 배트맨에 대한 애정이나 이해가 부족해서였을까?

수년 뒤 <배트맨과 로빈>에서 강조된 밝고 유쾌한 분위기의 배트맨과 로빈은, 조엘 슈마허가 갑자기 툭 기획해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오래된 수수께끼가 풀린 기분이 들었다.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은 50년대의 미국 만화 규제로 인해 탄생한, 보다 밝고 유쾌한 배트맨과 로빈의 모험담과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방영했던 아담 웨스트 주연의 TV 드라마 <배트맨>(Batman TV series, 1966~1968년)에 기초한 작품이었다. 열린 마음으로 보자면 조엘 슈마허가 선보인 밝고 유쾌한 분위기의 배트맨 역시 일흔 살 먹은 히어로 배트맨의 또 다른 모습인 셈이다.

▲ TV 드라마 <배트맨>의 한 장면.

1943년의 영화 <배트맨>과 1949년의 영화 <배트맨과 로빈> 역시 원작 코믹스와는 따로 노는 모습을 보였지만, TV 드라마 <배트맨>은 '다크 히어로'로서의 배트맨만을 인정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차마 인정하기 힘든 '흑역사'라 할 만한 작품이다. 이는 배트맨의 원작자 밥 케인과 DC 코믹스측도 마찬가지다. TV 드라마 배트맨의 경우 원작 만화 배트맨에 대한 이해나 지식이 전무한 것을 넘어서 만화를 혐오한 제작자 윌리엄 도지어가 만들어낸 팝아트 스타일의 '캠피(campy)'한 코미디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TV 드라마 <배트맨>이 '팝아트 스타일의 캠피한 코미디'라니 무슨 소리인지 생소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풀어 설명해보자면 이렇다. '팝아트 스타일'이란, 팝아트를 대표하는 미술가인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당시 만화책 특유의 표현을 회화로 끌어들였듯, 만화책 특유의 표현이나 요소를 적극적으로 드라마에 끌어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먹으로 악당을 때리면 만화책의 효과음과 의성어가 화면에 함께 나타나는 것이 대표적이다. 게다가 배트맨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복장은 1950년대의 밝고 유쾌한 배트맨 만화 같았고 대사와 행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마치 만화를 그대로 실사로 옮겨놓은 것 같은 과장된 연출이 만들어내는 우스꽝스러운 분위기를 '캠프(camp)'라고 한다.

▲ TV 드라마 <배트맨>의 장면들.
대낮의 도시 한복판을 로빈과 함께 뛰어다니며 농담을 주고받는 배트맨. 악당에게 뒤통수를 가격 당하고 기절하여 맥없이 포박당하는 배트맨. 악당들과 어설프게 주먹질을 하는 배트맨. 이런 TV 드라마 <배트맨>의 모습들을 최근, 특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과 비교하면 엄청난 괴리를 느끼게 된다. 유튜브에서 'Batman', '1966', 'adam west' 등으로 검색하면 1966년의 TV 드라마 <배트맨> 영상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위에서 설명한 '팝아트 스타일의 캠피한 코미디'가 무엇인지를 직접 체험해보고 싶으면 유튜브 검색을 추천한다.

이렇게 현재의 다크 히어로 배트맨과 수백 수천 광년은 차이가 나는 '팝아트 스타일의 캠피한 코미디'의 TV 드라마 <배트맨>은 원작자 밥 케인과 DC 코믹스 측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중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배트맨 만화책을 접하지 않고 TV 드라마부터 접한 시청자들에게 배트맨의 이미지는 TV 드라마의 이미지로 먼저 자리 잡았고 오히려 TV 드라마 덕분에 만화책 판매가 급증했다. 캠피한 코미디로 전락한 배트맨에 강력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던 만화 배트맨의 오랜 팬들이나 "뉴 룩" 배트맨으로 배트맨 시리즈를 일신하려던 DC 코믹스 입장에서, TV 드라마 <배트맨>의 엄청난 인기는 그저 난감할 따름이었다.

결국 TV 드라마 배트맨의 엄청난 인기를 DC 코믹스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배트맨은 TV 드라마처럼 보다 더 '캠프'해졌고, 새로운 배트걸로 고든 국장의 딸 바버라 고든이 드라마에 등장하자 만화 역시 드라마의 배트걸을 그대로 등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비록 TV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배트맨 만화책 역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지만 배트맨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은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쪽으로 형성되었다. 1968년에 TV 드라마가 그 엄청난 인기에도 불구하고 예산과 시청률 하락에 따라 시즌3으로 종영되었고, 이에 따라 "드라마가 흥할 때 나는 배트맨 만화를 더욱 캠피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리고 드라마가 그 인기를 잃자 만화책 역시 인기를 잃게 되었다."라는 줄리어스 슈어츠의 회고처럼 배트맨 만화책 판매 역시 급감하였다.

TV 드라마 <배트맨>으로 인해 대중들에게 각인된 캠피한 배트맨 역시 당시 드라마와 함께 사랑을 받았고 여전히 캠피한 배트맨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다. 개인적으로도 그 캠피한 배트맨 또한 배트맨이라 생각한다. 굳이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배트맨이 캠피한 배트맨만으로 남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이 불길한 상상은 2012년 현재에는 불필요한 상상이지만, 드라마 <배트맨>이 끝나고 만화책의 판매량이 급감하던 1960년대 후반의 DC 코믹스 편집자들에게나 배트맨의 골수 독자들에게는 실재하는 위협이었다. DC 코믹스는 배트맨 시리즈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에 착수했다.

▲ 스토리 작가 데니스 오닐과 작화가 닐 애덤스의 'The Secret of the Waiting Graves'(1970)
"고독한 어둠의 복수자" 배트맨으로의 회귀.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뉴 룩" 배트맨을 선보였던 줄리어스 슈워츠가 다시 나섰다. 이번에는 스토리 작가 데니스 오닐과 작화가 닐 애덤스를 선두에 세웠다. 오닐은 배트맨이 시작되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DC 코믹스 도서관에서 배트맨 초기작들을 읽었다. 우스꽝스럽기만 하던 광대 조커가 광기 넘치는 살인마로 돌아오는 등 캠피한 배트맨을 벗어나 본연의 다크 히어로로 돌려놓기 위한 작가들의 노력은 이후 스토리 작가 스티븐 잉글하트와 작화가 마샬 로저스 같은 이들을 통해 계속되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되돌아온 다크 히어로 배트맨에 골수팬들은 열광했지만, 불행히도 떨어진 판매량은 회복되지 않았다. 배트맨 만화책의 판매 저조는 70~80년대까지 계속되어 1985년에는 사상 최저치의 판매를 기록했다.

이렇게 악화일로를 걷던 배트맨은 1986년 2월에 출간된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를 시작으로 제목처럼 다시 화려하게 부활했다. 국내 번역 소개된 배트맨 그래픽노블이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 이후의 작품들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를 시작으로 프랭크 밀러가 재정립한 이른바 모던 배트맨과 이 모던 배트맨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킨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배트맨 시리즈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번 글로 넘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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