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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때려칠래!" '갈색 눈'이 문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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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때려칠래!" '갈색 눈'이 문제라고? [프레시안 books] 윌리엄 피터스의 <푸른 눈, 갈색 눈>
인권을 주제로 한 책은 언제나 반갑다. 인권만큼 널리 애용되는 말이 없음에도 인권 서고엔 늘 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른 눈, 갈색 눈>(윌리엄 피터스 지음, 김희경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의 발간은 기쁘기보단 씁쓸하다. 거의 반세기 전 미국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진행된 차별 수업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자료'가 아닌 '거울'로서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푸른 눈, 갈색 눈>은 인종 차별에 저항했던 마틴 루서 킹이 피살된 다음날인 1968년 4월 5일에서 시작된다. 킹의 죽음에 자극받은 교사 엘리어트는 학급 학생들을 눈동자 색에 따라 '푸른 눈'과 '갈색 눈' 집단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첫날엔 '갈색 눈' 집단에 "우월하다"며 특혜를 주었고, '푸른 눈' 집단은 "열등하다"며 차별했다. 다음 날엔 우월한 집단이 '푸른 눈'으로 바뀌었다. 처음에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을 의심했지만 이러한 주장이 반복되고 특혜와 차별이 가해지자 이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결과는 참담했다. 단 하루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월하다'고 주장된 눈동자 색을 가진 아이들은 실제 우월해졌다. 반면 '열등하다'고 지목된 아이들은 정말 열등해졌다. "울고 싶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다" "낙오자가 된 것 같았다" "몹시 역겨웠다" 그리고 "선생님을 죽이고 싶었다"까지, 단 하루인데도 불구하고 차별적 상황에 놓인 아이들은 입을 모아 절망과 분노, 우울과 슬픔을 토로했다. 개념이 아닌 현실로서 차별을 마주한 이날의 경험은 아이들의 인생을 변화시켰다.

<푸른 눈, 갈색 눈>은 이날의 차별 수업을 비롯해 몇 차례에 걸친 차별 수업과 아이들의 변화를 담고 있다. '상대방의 신을 신고 내디뎌 본 1마일'을 기록하며, 이를 통해 차별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보여준다. 책은 읽기 쉽고 간결하나 책이 품은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집단을 고른다. 이 집단을 차별해 그들이 열등해 보이고 열등하게 행동하도록 만든다. 그런 다음 그 집단이 보이고 행동하는 방식을 열등감의 증거라고 지적한다." (212쪽)

▲ <푸른 눈, 갈색 눈>(윌리엄 피터스 지음, 김희경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엘리어트가 수업에서 사용한 이 방법은 우리 현실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차별 공식이다. 서로에 대한 미움이나 적대, 혹은 편견은 중요하지 않다. 우월함과 열등함에 대한 논거가 있다면 좋겠지만 이는 조작 가능하고 사후적으로 충분히 만들 수도 있다. 엘리어트의 수업이 예증하듯 우월하다고 주장된 집단은 우월해지고, 열등하다고 차별받는 집단은 열등해지기 마련이다.

논거보다 더 필요한 것은 차별을 강요하기 위한 '힘'의 존재다. 힘은 물리적 강제력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전통, 관습, 종교, 과학, 권위, 도덕 등 사회에서 일정한 영향력만 갖고 있다면 이 모든 게 차별을 가능케 하는 힘이 된다. 엘리어트의 실험에서는 교사라는 권위가 힘으로 작동했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권위를 존중해야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차별은 이러한 구조위에서 작동해왔고,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일단 차별이 가해지고 일정기간 지속되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란 어렵다. 차별받은 주체가 존엄을 훼손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 제약으로 인해 삶의 반경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기보단 부정하게 되고, 사회적 차별의 근거가 된 요소를 애써 감추거나 제거하려 한다. 그가 하는 일과 만나는 사람 역시 제약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상황은 차별을 더욱더 강화시킨다.

"굽실거리도록 강요당해온 사람은 외부의 눈에 굽실거리고 싶은 사람으로 보일 거예요. 결국 그는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게 보이게 됩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한 아이는 교육을 덜 받은 성인으로 자라게 됩니다. 그 아이가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지 않는, 혹은 그것을 인정하기 거부하는 이들의 눈에는 그 사람이 단지 멍청하게만 보이겠죠." (134쪽)

해서 더 이상 인종 차별은 생물학이나 성경에 기대지 않는다. 갱, 마약 등으로 표상되는 폭력적이고 무책임하며 나태한 흑인 문화를 근거로 흑인을 차별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차별로 인한 열등감의 내재화와 제도화된 현실적 제약이 그들의 삶을 그렇게 내몰았다는 진실은 여기서 생략된다. 현재 백인이 누리고 있는 우월함이 흑인들에 대한 정서적, 물리적, 경제적 착취와 약탈 위에 기반하고 있음에 대한 성찰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차별은 차이에 기반을 둔다. 모든 사람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모두 같지만 또한 그렇기에 모두 다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어떤 누구도 지금껏 살았고, 현재 살고 있으며, 앞으로 살게 될 다른 누구와도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권의 싹이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다른 것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차별의 싹도 자란다. 다르다는 건 안정감보다는 두려움이나 공포, 혹은 부정적 인식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차이가 차별이 되는 건, 인간 본성에 기댄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적극적인 의도와 개입이 있을 때에만 발생된다. 모든 차이가 차별의 요인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또한 차별은 개개인의 개별적 행위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 속에서 제도로 고착되고, 집단 간의 불평등한 관계와 구조를 계속해 양산하며 강화시킨다. 즉 차별은 발명되고 사회에 안착한다.

이 책의 화두가 된 인종 차별 역시 백인, 특히 유럽인들의 탐욕에 의해 고안된 근대 사회의 발명품이다. 근대 이전만 하더라도 종(race)이라는 말은 동물에게나 사용되는 어휘였다. 피부색을 근거로 한 사회적, 구조적 차별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인종+차별'은 서구가 비 서구를 식민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유럽인들이 상로로 개척하기 위해 나섰던 길에서 만난 아프리카인들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기 위해, 영국에서 아메리카로 이주한 백인들이 원주민인 인디오들의 땅을 빼앗고 흑인들을 노예로 삼기 위해 악의적으로 개발된 것이다.

<푸른 눈, 갈색 눈>을 읽으면서 못내 아쉬웠던 점은 이 대목이다. 차별이 인간 본능으로 읽히거나 차별을 만들어내는 본질적인 힘이 축소될 수 있을 거란 우려였다. 물론 "차별하는 (⋯) 사람들의 공모를 무시하고 문제는 순전히 권력을 가졌고 비합리적인 단 한명의 개인에게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차별이 발생한 이후 유지되고 강화되는 힘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별에 어떠한 권력이 개입했는지, 어떤 의도가 존재하는지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차별은 해소될 수 없다. 보다 깊숙이 차별의 실체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 책의 한계라기보다 역할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인종 차별과 관련해서 박경태의 <인종주의>(책세상 펴냄)나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이후 펴냄) 등은 이 책과 함께 읽기에 매우 좋은 책이다.

책이 결혼 이주 여성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현실에 대한 반면교사로만 소개되는 것 역시 안타깝다. 물론 인종 차별을 소재로 한 차별 수업이었기에, 지금 한국에서 동일한 처지에 놓여있는 이주민들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주 노동자도 이주민이고 동일한 인종 차별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논의에 들어오지 못한다.

서평을 쓴 기자들의 무심함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이주민과 이주 노동자를 분리해보려는 사고도 존재할 것이다. 이주민은 함께 살아갈 '정주'의 개념 속에서 사고되지만 이주 노동자는 '이주' 즉, '이익을 얻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돌아갈' 철새 같은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깃든 것 역시 '판단'보다는 '차별'에 가깝다. '우리'와 '우리의 이익'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내면화 말이다.

나는 이 책에서 사용된 불구라는 단어가 불편했다. 보통 불구라는 말은 신체 장애와 짝을 이뤄 사용되는데, 이 책에서도 소아마비와 함께 사용됐다. 불구는 장애를 개인의 몸의 질병, 손상, 또는 불능에 초점을 맞춰 정의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장애를 정의하고 나면, 장애는 개인의 신체적 불운으로 인식되고, 개인의 범주에 갇힌다. 하지만 장애인에게 가해지는 각종 사회적 차별과 배제는 정말 장애인의 '몸'에 따른 필연적 결과일까?

엘리베이터나 경사로가 설치된 건물에서 휠체어 장애인의 이동이 제약당하지 않듯, 장애 친화적인 사회와 문화 속에서 장애는 불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불구로 호명하는 건 그만큼 그 사회가 장애를 개인적 불행으로 떠넘기려한다는 증거다. 또한 비장애인 중심이며, 장애를 배제하는 사회라는 증거다. 여성과 남성을 위한 화장실은 그냥 화장실이지만, 장애인을 위한 화장실은 '편의 시설'로 명명되는 것도 동일한 발상위에 서 있다. 해서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불구'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차별은 우리의 일상과 사고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날을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이 차별인지, 내가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는지조차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 차별받는 주체는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했기에 차별을 정의하고 설명하기 어려워하며, 차별하는 이들의 눈엔 이들의 저항이 주제 넘는 행동으로 비춰질 뿐이다.

<푸른 눈, 갈색 눈>을 읽고 고개가 끄덕여졌다면, 팔짱을 끼고 서 있던 몸을 움직일 필요가 있다. 차별을 깨기 위한 첫 걸음은 묵인과 방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나는 무엇에 반대한다는 말보다 중요한 일은 아주 작은 행동이라도 그 반대를 몸으로 옮기는 일이다. 한 걸음 내딛자. 다음 걸음은 더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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