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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참여 경선은 민주주의? 대국민 사기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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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국민 참여 경선은 민주주의? 대국민 사기극이야! [정치 몰입, 2012] 정치학 교과서로 본 국민 참여 경선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2012년 대통령 선거가 채 5개월도 안 남았습니다. '프레시안 books'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을 앞두고 새로운 기획 '정치 몰입, 2012'를 선보입니다. 다양한 관점의 필자들이 책을 매개로 2012년 정치를 향해서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쏟아낼 예정입니다. 그 시작을 정치학을 공부하는 박수형 박사가 엽니다. <편집자>

정치는 우리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준다. 그렇다면 우리 공동체의 미래도 우리가 정치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개인의 경우든 공동체의 경우든, 자연의 원리와 자원의 희소성이 부과하는 한계를 수용하면서 그로부터 기인하는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는 지혜와 성숙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한국 사람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 못지않은 지혜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들 생각만으로 만들어진 한계와 문제를 진짜인양 착각하며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한다면, 그건 지혜도 성숙도 아닌 그저 무지와 맹목의 실천일 뿐이다.

우리가 정치를 생각하는 방식에 무엇보다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정치 개혁'을 위한 논의와 실천이었다. 정치 개혁은 민주화 이후 우리 공동체가 해결해야 할 여러 사안들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가는 개혁 과제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정치 개혁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논의를 거듭하고 수차례에 걸친 제도 변화를 단행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달라진 것 없는 아니 오히려 더 실망스런 정치와 대면하고 있다.

그 부진한 성과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제기되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이라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실제로 변화된 제도는 여전히 개혁의 이상에 크게 미흡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답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가치들도 상호 갈등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는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상호 갈등하는 가치들 중에서 무엇에 우위를 둬야할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채, 우리는 정치의 의미를 왜곡하고 그것의 잠재력을 잊게 만드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져갔다.

가치 혼돈으로 인한 정치 이해의 왜곡은 "깨끗한 선거", "원내 정당화", "일하는 국회" 등을 목표로 내건 거의 모든 정치 개혁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 개혁의 대표적인 성과로 인정받는 '국민 참여 경선 제도'의 문제와 한계에 주목하고자 한다.

정당의 후보 선출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는 개방형 후보 선출 방식은 정당에 이로운가 해로운가? 국민 참여 경선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는가 그렇지 못한가? 만약 국민 참여 경선이 정당에도 민주주의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방식으로 후보를 선출해야 하는가?

이 글은 민주주의의 고전적 저작들과 이미 오래전부터 개방형 후보 선출 방식을 실행하고 있는 미국 정치학 교과서들 그리고 지난 몇 차례에 걸친 한국의 국민 참여 경선 경험을 바탕으로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

ⓒ프레시안(손문상)

정치 개혁과 후보 선출의 의미

아시다시피 국민 참여 경선은 이른바 '3김 정치' 시대에 정당 보스가 행사했던 자의적 영향력을 차단하는 동시에 정당의 후보 선출에서도 일반 시민의 선호가 반영되도록 도입된 제도이다.

이 제도를 정치 개혁의 성과로 이해하는 논리는 간단히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정치 발전을 가로막은 대표적인 행태들 중 하나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3김으로 대표되는 보스가 정당 정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당내 주요 결정을 좌우한 데 있다. 따라서 당내 다른 결정은 몰라도 선거에서 유권자의 직접적인 선택 대상이 되고 그리하여 장차 의회와 정부를 이끌어나갈 공직 후보만큼은 보스와 그 영향 아래 있는 대의원이 아닌 당원과 일반 시민의 참여로 선출해야 한다.

특히 한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공직이자 사실상 정당 대표로 인정받는 대통령 후보가 보스의 영향력 밖에 있는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선출된다면, 그 사람의 대중적 정당성은 강화되고 그만큼 그 정당에 대한 신뢰도 높아질 수 있다. 과연 이런 주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가정은 얼마나 타당할까? 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먼저 후보 선출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미국의 정치학자 존 올드리치가 2011년에 펴낸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펴냄)를 보면, 민족 국가와 같은 대규모 공동체에서 민주주의가 하나의 정치 체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근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첫째 어떻게 공직을 획득코자 하는 사람들의 수를 조정할 것인가, 둘째 어떻게 수많은 유권자들을 정치 과정에 참여케 할 것인가, 셋째 입법 결정에서 요구되는 다수를 어떻게 확보 유지할 것인가.

대다수 정치학자들이 이익 집단이나 운동 이상으로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까닭은 이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정당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직 후보 선출은 정당이 첫 번째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행하는 기능이자 여타 조직과 정당을 구분케 하는 정당 고유의 역할이다. 하나의 공직에 수십, 수백 명의 후보가 출마하는 상황을 상상해보면, 그 잠재적 후보들을 걸러주는 주요 정당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쉽게 알 수 있다.

후보 선출은 민주주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정당 자신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앞의 논의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사람들이 정당을 조직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당이 선거에 나서려는 사람들에게 공직 후보 지위를 보장해주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당선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당 후보의 지위가 정치적 야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중요한 유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정당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도 큰 의미를 갖는다. 다른 모든 조직이 그렇듯이 정당이 선거에서든 의회에서든 하나의 조직으로서 일관된 행동을 펼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에 대한 규율이 필수적이다.

정당 규율을 보장하는 수단에는 정당이 제공하는 인적, 물적 자원이나 이념과 노선, 리더십 같은 상징적 자원도 있지만, 후보 지위만큼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수단을 찾아보긴 어렵다. 정치적 야심이 큰 만큼 후보 지위를 바라며 당내 활동에 적극적인 사람들에게도 그렇겠지만, 특히 이미 다른 정치적 자원을 충분히 보유한 사람들에게 정당 후보 지위는 당내 규율을 부과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현대 정당론의 초석을 놓은 정치학자 엘머 에릭 샤츠슈나이더는 이러한 후보 선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인식했던 것 같다. 그는 오늘날 정당론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정당 정부(Party Government)>(Transaction Publishers 펴냄)에서 후보 선출이 정당에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선거를 통해서만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조건으로 인해 후보 선출은 정당의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 자리 잡게 된다. (…) 만약 정당이 권위를 가지고 효과적으로 후보를 선출할 수 없다면, 그 정당은 정치 활동을 계속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정당에 둘 이상의 후보는 확실한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당의 일치단결, 즉 당에 대한 당원들의 집중은 오직 구속력 있는 후보 선출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그리하여 후보 선출 과정은 정당의 핵심 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후보 선출 방식의 성격이 정당의 성격을 결정한다. 후보를 선출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정당의 주인이다."

정치 개혁 그 중에서도 특히 보스가 좌우하는 정당 운영 방식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정당의 성격을 결정할" 만큼 중요한 후보 선출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논리는 정당 조직의 핵심 원리를 파악한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샤츠슈나이더의 주장을 말 그대로 따른다면, 국민 참여 경선을 통해 한국 정당의 주인은 이제 총재, 대표, 보스가 아닌 당원과 일반 유권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민 참여 경선을 옹호하는 입장은 정당 활동에서 후보 선출이 갖는 본원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후보 선출의 중요성에 착목한 만큼이나 새로운 제도가 가져올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국민 참여 경선 제도의 문제

앞에서 요약한 국민 참여 경선 도입의 논리는 한국의 정치 현실과 민주주의와 정당에 관한 일련의 경험적, 이론적, 규범적 가정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그런 가정들 모두를 검토할 수는 없기 때문에, 아래에서는 이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내는 효과와 그런 제도 변화를 정치 개혁으로 정당화하는데 사용된 근본 가정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국민 참여 경선의 한계와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① 국민 참여 경선은 정당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낸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런 관심과 지지의 대상인 정당 조직을 약화시킨다.

한국의 정치 전문가 다수는 국민 참여 경선이 기존 정당을 좌우해온 보스의 자의적 영향력을 차단함으로써 정당 정치에 대한 일반 시민의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낼 것이라 말했고 지금도 그렇게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안정적으로 조직화되어 꾸준히 지속되는 정당이 존재한 연후에나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아시다시피 한국 민주주의의 뚜렷한 특징이자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정당 제도화의 수준이 매우 낮다는 데 있다. 그 단적인 예로 민주화 이후 선출된 대통령들 모두가 임기 중 자기 정당의 명칭 변경과 조직 개편을 경험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선거 때마다 정당 명칭이 바뀌고 정당 사람이 바뀌는 조건에서, 그 정당 조직이 체계적으로 분업화된 기능을 수행하면서 안정적이고 책임 있는 리더십을 구현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런 조직 여건에선 정당이 사회 여러 부문의 이익들을 대표하는 일은 고사하고 기존 지지층을 계속 묶어세우는 일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지난 두 차례 대선과 일부 지역 선거에서 실험된 바 있는 국민 참여 경선은 이 문제에 어떤 긍정적 효과도 보여주지 못했다. 아니 그 제도의 원리만 따져본다면 오히려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고 말하는 편이 합당하다.

국민 참여 경선의 첫 번째 문제는 이 제도가 정당 보스 내지 리더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바로 그 정당 조직을 약화시킨다는 데 있다. 다른 모든 단체나 조직과 마찬가지로 정당이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조직 활동에 대한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유인이 필요하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런 유인들 중 특히 정당만이 제공할 수 있는 유인은 공직 후보 지위와 그 지위를 누구에게 부여할지 결정하는 권한이다.

여기서 당의 후보를 선출하는데 당비도 내지 않고 당 활동에도 참여한 바 없는 일반 시민이 당원과 동등한 권한을 갖는 데에 대한 당원들의 불만은 부차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에 대해서는 다른 종류의 유인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당의 활동을 주도하고 당의 후보로 나서려는 당내 엘리트들이 국민 참여 경선으로 인해 대의원과 당원 나아가 정당 조직 자체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게 된다는 데 있다.

물론 당내 예비 후보들에게 정당은 여전히 여러모로 유용한 가치를 갖고 있다. 그러나 자신을 그 정당의 후보로 만들어줄 권한과 자원이 당 밖에도 상당 정도로 분포해 있을 때, 그들 엘리트가 정당 활동을 통해 신뢰와 지지를 얻고자 하는 유인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고 정당 조직의 활력 또한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② 국민 참여 경선은 정당 정치에 경쟁의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제3당의 발전을 가로막음으로써 활발한 정당 간 경쟁을 억압한다.

한국 민주주의는 몇 개의 정당을 필요로 할까? 정당의 핵심 기능은 사회의 여러 갈등하는 이익과 요구를 표출하는 데 있는 만큼, 그 수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갈등의 수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물론 중요한 갈등의 수가 많다고 해서 그만큼 많은 정당들이 경쟁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정당 수가 너무 많으면 정치적 혼란과 무책임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기능적 분업화의 진전이 과거보다 더 많은 이익 갈등을 낳고 전통과 현대, 탈현대의 여러 가치들이 각축을 벌이는 조건에서, 단 두 개의 정당만으로 그런 모든 이익과 가치를 표출하고 대표하는 일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현실 정치논리에 민감한 사람들은 한국 정치가 점점 더 양당 구도로 굳어가고 특히 영호남을 중심으로 한 지역 1당 체제가 여전히 지속되는 사실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일반 유권자를 놓고 벌이는 양당 예비 후보 간의 경쟁이 제한적이나마 정당 정치에 새로운 이익과 요구를 투입하는 긍정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 제한적 효과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지난 20여 년 동안 실패를 거듭해온 제3당 실험을 앞으로도 계속 그런 모습으로 지켜봐야 한다.

만약 한국 정치의 나아갈 방향이 제3당 발전을 통한 정당 간 경쟁의 활성화라는데 동의한다면, 국민 참여 경선이 바로 그 장애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근거는 이렇다. 자기 당에 적합한 자질과 식견을 갖춘 예비 정치인을 찾는 것은 정당 내지 그 지도부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주요 정당에 비해 인지도도 낮고 조직적 자원도 부족한 소수파 정당에겐 더욱 그러하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좋은 후보의 가치는 소수파 정당에서 더 크게 발휘된다.

그러나 국민 참여 경선은 소수파 정당이 이 과제를 해결하는 것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든다. 만약 정치적 자질과 야심을 가진 잠재적 후보가 국민 참여 경선을 통해 이미 주요 정당에 소속돼 있는 예비 후보에 효과적으로 도전할 기회를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이 소수파 정당의 이름으로 공직 후보에 나설 가능성은 크게 줄어들게 된다.

그리하여 소수파 정당이 좋은 후보를 충원하기는 훨씬 더 어려워지고 그 만큼 선거에 승리할 가능성도 낮아진다. 결국 주요 정당만이 정치적 성공을 보장해주는 유일, 유이한 수단으로 남게 되고, 제3, 제4 정당은 설 자리를 잃고 마는 것이다. 물론 제3당의 발전을 저해하는 데는 국민 참여 경선 외에도 여러 제도적 요인들이 있다.

특히 단순 다수 선거 제도는 양당제를 보장하는 제도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단순 다수 선거를 채택한 나라들 중에서도 확고한 양당제를 오랫동안 유지해온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그리고 대통령으로부터 주의원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공직에 걸쳐 개방형 내지 준개방형 후보 선출 제도를 실시하는 나라도 미국이 유일하다.

③ 국민 참여 경선은 일반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증진한다? 그렇지도 않을뿐더러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 가운데 하나인 '책임성'의 원리를 약화시킨다.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는 참여, 대표, 책임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체제로 알려져 있다. 민주주의에서 시민은 선거와 비선거 정치 활동에 대한 '참여'를 통해 자신의 선호와 이익을 표출하고, 의회와 정부를 구성하는 정당은 그렇게 제기된 이해관계를 '대표'해 법률과 정책을 만들며, 그런 통치 과정과 결과에 대한 '책임'은 대표자인 정치인의 설명과 피대표자인 시민의 평가로 구현된다.

이런 원리를 고려할 때, 좋은 민주주의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좀 더 다양하고 폭넓은 이익들이 대표되고,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하는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다. 또 같은 맥락에서 좋은 정당 내지 정당 체제란 그들 정당 간 경쟁과 타협이 참여와 대표, 책임의 원리를 증진하고 확대하는 경우로 이해할 수 있다.

국민 참여 경선 지지자들은 이 제도가 이들 세 가지 원리 중에서도 특히 참여, 즉 후보 선출 과정에서 일반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증진시켜준다고 말한다. 분명 이 제도에 힘입어 과거 대의원 제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정당 후보 선출 과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참여 확대는 앞서 살펴봤듯이 제3당의 발전을 제약해 대표의 범위를 넓히기도 어렵고,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본 선거의 참여 확대로 이어지지도 못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국민 참여 경선은 민주주의에서 정당만이 효과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책임성마저 약화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정치 개혁의 대안으로 국민 참여 경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원이나 일반 시민이 행하는 '자발적' 참여의 가치를 강조한다. 위로부터의 동원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참여가 민주주의의 진정한 기반이란 뜻이다. 그러나 정치 참여 행태를 주의 깊게 분석한 연구자들은 참여가 그렇게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며, 대개 엘리트나 단체, 조직이 동원을 위해 노력한 결과로 참여가 이뤄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후보 선출 과정에서 당의 경계가 사라질 때 나타나는 일반 시민의 참여란 후보나 그들 조직 못지않게 당 밖에 포진한 주요 사회 집단, 이를테면 언론 매체, 이익 단체, 사회단체와 전문가 그룹이 다양한 방식의 동원 활동에 관여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비록 허약한 정당이라도 그 정당이 계속해서 선거에 참여해 더 많은 표를 얻고자 노력하는 한 선거 경쟁이 부과하는 책임성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쉽지 않고 그런 정당에 의해 후보로 선출된 공직자 또한 정당과 동일한 책임성의 제약 하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여러 이해관계로 후보 선출에 관여하는 언론이나 사회단체, 이익 집단이나 지식인 또는 전문가에게 이와 같은 종류의 책임을 묻기는 어렵고 그들 당 밖 집단과 엘리트가 후보 선출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정당과 선거를 통한 책임성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④ 국민 참여 경선은 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높여준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당의 분열과 대립을 극대화해 정당과 후보의 선거 경쟁력을 떨어뜨린다.

정치인과 정당에겐 선거에서 승리해 공직을 획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이념과 노선, 강령과 정책도 중요하지만, 그런 것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선거에서 승리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제도가 그것을 채택해 운용하는 정당 내지 후보 지지율을 높여준다면, 누구도 그 제도를 거부하긴 어렵다. 이런 이유에서 국민 참여 경선 지지자들은 이 제도의 장점 가운데 하나로 소수 대의원들이 아닌 다수 시민들이 선출한 후보가 당선 가능성도 높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이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가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과거 후보 선출을 담당했던 대의원들은 당내 계파나 그와 관련된 물질적 이익에만 몰두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 참여 경선을 통한 예비 후보 간 경쟁은 일반 유권자의 관심과 참여를 불러일으키고 그럼으로써 그런 과정을 거쳐 선출된 후보에 대해서도 더 많은 지지를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정 모두를 체계적으로 검증하긴 어렵지만, 민주화 이후 지난 대선 후보 선출 과정에 대한 대략적인 검토만으로도 이들 가정에 오류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당내 계파 논리 가정과 관련하여 국민 참여 경선 도입 이전 사례들을 살펴보자. 1987년 대선에서 민주화 진영을 대표하는 두 야당의 대선 후보는 전당 대회 대의원들이 합의 추대로 선출했다. 지금은 낯설고 심지어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당시 합의 추대가 가능했던 것은 대의원들 또한 민주화 요구에 부응했을 뿐만 아니라 자당 지도자가 그 요구에 가장 맞는 후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87년 대선은 민주화에 대한 바람이 최고조에 달했던 예외적 사례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 다음 대선들에서는 어땠을까? 1992년 민자당(민주자유당) 대의원들은 애초 당내 소수파 민주계 수장이었던 김영삼 최고위원을 대선 후보로 선출했다. 당선 가능성이 아닌 계파 논리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1997년 신한국당과 2002년 한나라당 사례에서도 전자는 대의원 대회를 통해 후자는 국민 참여 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를 선출했지만, 결과는 양자 모두 동일하게 이회창 후보였다. 김대중 후보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1992년 민주당과 1997년 국민회의 대의원 대회에서 김대중 후보는 약 70퍼센트의 지지를 얻으며 각각 이기택, 정대철 후보를 누르고 본 선거에 나섰다. 이에 대해 대의원 지지 비율만 놓고 당내 계파 구도가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기택, 정대철 후보가 김대중 후보 못지않은 당선 잠재력을 보유했음에도, 계파 논리로 인해 대의원 경선에서 패배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예비 후보 간 경쟁의 긍정적 효과를 말하는 두 번째 가정 또한 설득력이 약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정당 내에서도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고, 후보 선출 과정에서도 여러 인물들이 경쟁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같은 당에 속한 예비 후보들이 당 밖 유권자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면 당내 분열과 대립은 극대화되고, 이는 본 선거의 정당 간 경쟁뿐만 아니라 이후 정부 운영이나 의회 활동에서도 당의 일관되고 효과적인 활동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같은 당 소속이어서 다른 당 사람보다 이념, 노선, 정책에서 유사한 입장을 가진 예비 후보들이 대의원과 당원을 넘어 일반 시민의 지지까지 얻고자 어떻게든 그들 간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만들다보면, 그런 종류의 동원 경쟁은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며 사소한 근거들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고 뚜렷한 이념, 정책상의 차이를 가지고 경쟁한다면, 그것 또한 그들 예비 후보가 굳이 같은 당에 속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낳게 된다. 어떤 경우든 예비 후보 간 경쟁이 치열할수록 당내 분열과 대립은 심화되고, 결국 그것은 앞서 샤츠슈나이더가 강조했던 후보 선출의 핵심 요건, 즉 당의 일치단결을 훼손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 정당의 후보 선출 과정을 면밀히 관찰했던 한 연구자는 예비 선거에서 나타나는 경쟁을 가족 성원들 간의 싸움에 비유하며, "진정한 예비 선거는 본 선거에서 치르는 다른 정당과의 싸움보다 더 쓰라리고 더 지속적인 상처를 남긴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의 경험은 달랐을까? 2007년 완전 국민 참여 경선을 실시했던 대통합민주신당은 '동원 선거' 논란과 경선 규칙을 둘러싼 지루한 공방 속에 많은 유권자들의 질타와 외면을 받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선출된 후보는 민주화 이후 대선 사상 가장 큰 표 차로 패배했다. 국민 참여 경선 덕분에 후보 지위를 획득한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도 예외라고 말하긴 어렵다.

2002년 경선 과정을 통해 잠시 동안 높은 인기를 누렸던 당시 노무현 후보는 그 후 선거 운동에 투입해야 할 자원과 역량의 상당 부분을 경선에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당내 성원들의 반발과 이탈을 무마하는데 할애해야 했고, 그에 따라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대통령직을 맡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민주당이 대선에서 승리한 후에도 그 분란의 여진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는 정치 개혁을 명분으로 당내 반발 세력을 떨어내고 새 정당을 만드는 일로부터 시작됐고, 다시 그들 반발 세력과 결합해 과거 민주당으로 돌아가는 일로 끝났다. 2007년 이명박 후보 역시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 측이 제기한 BBK 문제가 본 선거에서도 중요 이슈로 다뤄지면서 그의 도덕성에 큰 상처를 남겼고 이회창 후보의 때 아닌 대선 출마마저 가능케 했다.

대선에서 낙승한 후의 이명박 대통령 행보도 비록 덜 극적이긴 했지만 노 대통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임기 첫 해인 18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당내 박근혜 지지 세력을 물리치려 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고, 결국 이듬해엔 친박근혜계 의원들의 복당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 후 나타난 이 대통령 지지율 하락이 야당이 아닌 박근혜 의원에 대한 지지 상승으로 이어진 데는 야당의 무능 탓도 크지만 이런 분란과 대립이 기여한 바도 적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은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는 정당 '안'이 아니라 정당 '사이'에 있는 것이다.

당내 민주화 혹은 정당 민주화 요구는 한국뿐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정당 정치의 병리적 현상을 치유할 수 있는 정치 개혁의 목표이자 원리로 자주 언급되곤 했다. 이런 목표가 제안되는 정치 맥락과 그것을 보장해주는 제도 대안은 나라마다 논자마다 다르지만, 그들의 공통된 주장은 정당 조직 운영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도자 내지 지도부의 권한은 줄이고 대신 당 활동가들과 일반 당원들의 더 많은 참여와 토론으로 당내 주요 의사 결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국민 참여 경선이나 미국의 개방형 예비 선거도 바로 이 강력해 보이는 주장에 힘입어 도입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로버트 미헬스가 20세기 초반 독일 사회민주당의 경험을 토대로 정식화한 '과두제의 철칙'을 해소하기 위해 '더 많은 민주주의'를 상상하는 해법은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이 강한 사람들에겐 매력적으로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모든 권력과 권위, 결정은 관련 당사자들의 참여와 토론으로 구성돼야 한다는 전제로부터 도출된 이런 주장 속에는 한 가지 중요한 논리적 맹점이 숨어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이론가 로버트 달은 미헬스를 비롯해 당내 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 직접 민주주의 등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장에는 논리학에서 경계하는 '구성의 오류', 즉 부분의 현상을 전체의 현상으로 치환해 이해하는 오류가 내재돼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에서 정당 간 경쟁이 활발하다면 개별 정당이 내적으로 민주적이냐 비민주적이냐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정당의 존재 이유는 다수 유권자의 선호와 요구에 부응해 선거 경쟁에서 승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와 의회를 운영하며 다시 다음 선거에서 그 실적을 두고 경쟁을 반복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에서 정당의 역할이 정당 간 경쟁과 타협을 통해 가능한 많은 시민의 권리와 이익을 실현하는데 있다면, 다소 비민주적이라도 강력한 리더십과 규율을 갖춘 정당이 민주적인 정당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효과적으로 자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좀 더 분석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에서 검토한 호세 마라발의 최근 연구 또한 동일한 결론을 제시한다. 스페인과 영국을 비롯한 의회 민주주의 사례에 바탕을 둔 연구에서 그는 정당 지도부가 당내 민주주의를 거스르며 부과하는 엄격한 정당 규율은 유권자가 정부를 통제하는데 효과적인 방편이며, 그에 따른 당내 소수 이견 집단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근거는 이렇다. 당내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활발한 토론과 논쟁은 유권자가 현 정부의 정책을 평가하고 지지 정당을 선택하는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체제 수준의 민주주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해볼 수 있고 실제로 그런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런 종류의 토론과 논쟁은 거기서 나타나는 당내 지도급 인사들의 기회주의적 행태와 이념적 성향이 강한 당 활동가들의 편향된 견해로 인해 일반 유권자에게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 게다가 당내에서 나타나는 치열한 논쟁은 일반 유권자에겐 당의 분열과 혼란 그리고 그에 따른 정치적 역량 약화로 이해되어 그 정당에 대한 지지 철회로 귀결되는 경우가 더 많다.


▲ <소명으로서의 정치>(막스 베버 지음, 박상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위와 같은 근거를 고려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흥미롭게도 우리에게 정치학의 대가로 알려진 학자들은 당내 민주주의나 그와 유사한 주장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박상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이나 윌리엄 글래드스턴 같은 지도자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도자의 손에서 유용한 기구가 되려면 추종자 집단은 맹목적으로 복종해야 하고, 미국적 의미에서 '머신'이어야 하며, 명사들의 허영심 내지 독자적 권리 주장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 그것은 당을 이끄는 지도자를 갖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다."

같은 맥락에서 프랑스 정치학자 모리스 듀베르제는 <정당론>(박희선·장을병 옮김, 문명사 펴냄, 1976년)에서 특히 좌파 정당에서 두드러졌던 '민주 집중제'의 효용에 주목하며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의 원리들은 모든 수준의 리더십이 선거로 선출되고, 자주 교체되고, 집단적인 성격을 가지며, 약한 권위를 갖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조직된다면, 정당은 정치 투쟁에 적합한 장비를 갖출 수 없다."

이탈리아 정치학자 지오반니 사르토리도 <민주주의 이론의 재조명>(이행 옮김, 인간사랑 펴냄, 1990년)에서 달과 동일한 논리 위에서 민족 국가와 같은 "대규모 정치 체제의 민주주의는 많은 '작은 민주주의들'의 단순한 합이거나 확장일 수 없다"고 단언했다. 샤츠슈나이더 역시 그 특유의 간명함으로 같은 주장을 이렇게 표현했다.

"민주주의는 정당 안이 아니라 정당 사이에 있는 것이다."

국민 참여 경선의 문제와 한계에 대한 이런 진단은 그 이전의 후보 선출과 정당 운영 방식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국민 참여 경선 지지자들에겐 그 제도 도입 이전까지 한국 정치를 좌우했던 두 정당 지도자의 행태를 비판할 만한 여러 근거가 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지지가 어느 때보다 높았던 중대 선거에서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것도 그렇고, 자신들의 대선 승리만 고려하며 3당 합당과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주도했던 것도 그렇고, 정치 자금과 충성, 당선 가능성에만 우선순위를 두고 일방적으로 후보와 당직자를 지명한 행태도 그렇다.


▲ <절반의 인민 주권>(샤츠슈나이더 지음, 현재호·박수형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하지만 그런 여러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들 김대중과 김영삼은 권위주의 시대의 탄압과 유혹을 이겨내며 민주화 요구에 부응한 정치 지도자로서 대중적 인정과 지지를 받았고, 집권 후에는 그런 요구에 따라 군부 청산과 대북 정책에서만큼은 분명한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샤츠슈나이더는 <절반의 인민 주권>(현재호 박수형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에서 "대안을 정의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권력 수단"이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지도자는 자력에 의해서든 타력에 의해서든 당시로서는 광범위한 호소력을 가졌던 민주화란 대안을 확보했고, 그들에게 그것은 무엇보다 큰 정치적 자산이었다. 반면 이후 세대 정치인들은 '3김 정치 청산'이나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국민 참여 경선과 같은 정치 개혁을 요구하고 제도화하는 데만 그쳤고, 바로 그런 제도 개혁으로 인해 앞선 지도자들이 받았던 지지를 능가할 만한 대안을 조직하지 못하고 심지어 다시 과거로 돌아가 그들 선배 지도자의 대안에 의존하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대안을 찾아서

어디서든 언제든 정치를 비판하긴 쉽지만, 그에 상응할 만한 대안을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 한국과 같이 정치에 대한 도덕주의적 이해가 팽배한 나라에서 대안 없는 비판은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른 정치 불신과 냉소를 더욱 부채질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국민 참여 경선에 대한 위와 같은 비판이 타당하다면, 다른 종류의 대안을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정당 발전에 적합한 후보 선출 제도는 어떤 형식과 어떤 내용으로 구성할 수 있을까? 아래에서는 한국과 유사한 미국의 예비 선거 방식이 민주주의에 반하는 제도임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지적했던 정치사상가 마이클 왈저의 논의를 토대로 그 대안의 기본 원칙과 대략적인 형식 및 운용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후보 선출 제도 대안의 기본 원칙은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겠다. 나라와 정당은 서로 다른 종류의 조직이며, 따라서 그들 각각의 지도자도 서로 다른 종류의 절차,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에 의해 선출되어야 한다. 한 나라의 지도자 내지 대표는 그 나라 시민이 선출해야 하며, 여기서 목표는 가능한 한 분명한 정당 대안들을 두고 가능한 한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는데 있다. 그에 반해 한 정당의 지도자 내지 후보는 정당과 실질적인 연계를 갖고 선거뿐 아니라 선거와 선거 사이에도 정당 활동에 기여하는 사람들이 선출해야 하며, 여기서 목표는 뚜렷한 정당 대안을 구성하고 당의 일치단결을 확보하는데 있다.

후보 선출 제도 대안의 형식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대선 후보 선출에 국한해 말한다면, 누구든 후보 선출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완전 국민 참여 경선보다는 제한적 국민 참여 경선이 낫고, 제한적 국민 참여 경선이라면 시민 참여 비율과 여론 조사 반영 비율이 낮을수록 낫다.

물론 국민 참여 경선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정당과 연계를 맺은 당원들이 후보를 선출토록 하는 제도가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정당은 유럽 정당과 같은 당원 기반 조직이 아니며,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가 전혀 다른 까닭에 앞으로도 유럽 대중 정당과 같은 모델로 발전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현실과 앞서 언급한 기본 원칙을 고려할 때, 좀 더 바람직한 제도 대안의 형식은 각급 지역과 전국 단위에서 선출되는 당 활동가들과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 장 및 의원 등의 선출직 대표들로 구성되는 구래의 대의원 대회이다.

형식은 과거와 유사하지만 운용 방식은 달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기제가 매우 중요하다. 하나는 대의원 구성 방법과 비율에 관한 것이다. 정의상 당 활동가들은 공직을 획득코자 하는 목표 이상으로 당의 이념이나 정책을 실현하려는데 복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보다 더 편향된 정치 성향을 띨 가능성이 높다.

이런 조건에서 선출직 대표 대의원은 일종의 균형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그들은 이미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의 이념이나 정책뿐 아니라 선거 승리도 고려하면서 일반 유권자의 견해를 대표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른 한편, 선출직 대표들이 당내 기득 구조를 지속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당 활동가 대의원들에게 '모반의 기회'를 보장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2002년 민주당의 국민 참여 경선이 바로 그런 경우였고, 그것은 당시 민주당 내지 그 계열 정당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가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부정할 순 없지만, 국민 참여 경선이 전체로서의 민주당 발전에 기여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정당 조직 활성화와 정당 변화의 계기를 동시에 확보하는데 있어서는 지역과 전국 대의원 선출 과정에서 당 활동가가 일반 유권자의 참여와 지지를 끌어내도록 하는 개방형 당대회가 바람직하다. 그 외에도 각 당의 조직적 정체성과 당내 역학 구도에 따라 활동가, 선출직 대의원 비율을 융통성 있게 조정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최종 대선 후보 선출 과정에서 타협의 공간을 마련해두는 것이다. 전체 후보 선출 대의원 대회가 단지 대의원을 뽑고 선거에 나설 후보를 뽑는 역할에만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또한 당내 이견을 조율하는 '토론의 장'이어야 하고 당의 화합과 당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하는 '축제의 장'이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당의 정체성과 위력을 과시하는 '의식(儀式)의 장'이어야 한다.

국민 참여 경선이든 당원 투표 경선이든 이 모든 과제를 예비 후보들의 선거 운동과 한두 차례의 투표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최근 통합진보당의 비례 대표 경선 부정 사건과 이후 사태 전개는 절차적 규칙을 무시한 사람들의 윤리 문제도 고려해야겠지만, 득표 경쟁에만 의존한 후보 선출 방식이 한 정당에 얼마나 파괴적인 효과를 미칠 수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에 반해 대의원 대회는 당의 화합과 단결을 위해 최종 후보 확정 요건에서 대의원 지지 비율을 과반 이상으로 높일 수 있고 그에 따른 수차례의 투표도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효과적으로 진행하는 동시에 후보 선출 대회에 기대되는 여러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경쟁뿐 아니라 협상과 타협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거의 모든 정치학 입문서들은 갈등과 타협 내지 경쟁과 협상을 민주주의 정치를 작동시키는 핵심 메커니즘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후보 선출 과정에서도 당내 다양한 집단을 대표하는 지도자들과 활동가들, 예비 후보들이 후보 자질과 정책 이슈, 선거 전략과 향후 정부 운용 방식을 놓고 경쟁하면서 또한 타협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수차례 반복될 수도 있는 투표 과정에서 효과적인 경쟁과 함께 원활한 타협이 이뤄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규칙이 필요하다. 하나는 본 대회에 앞서는 지역 및 전국 대의원 선출 대회가 그로부터 선출된 대의원들의 지지 후보를 사전에 엄격하게 구속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협상과 타협이 수반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거래의 비밀을 일정 정도까지 용인해주는 것이다.

물론 후보 선출 경쟁의 패배자들이나 당내 고집스런 소수파들은 그런 비밀이 추악한 담합을 낳는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당의 화합과 선거 승리를 위한 타협인지 당내 기득권 세력만을 위한 담합인지는 최종적으로 본 선거에 참여하는 시민 유권자의 판단에게 맡겨야 할 문제로 보인다.

위와 같은 기본 원칙과 형식, 운용 방안이 정당을 중심에 두는 후보 선출 제도 대안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대안이 실제 현실에서 도입된다 하더라도 한국 정당과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이 대안이 갖는 드러나지 않은 문제와 한계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한국 정치에선 국민 참여 경선 외에도 민주주의 정치의 잠재력을 억압하는 다른 많은 제도들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전체 유권자의 절반도 안 되는 지지, 심지어 3분의 1의 지지만 받고도 대표로 선출되는 선거 제도도 그렇지만, 노동조합 등의 자발적 결사체가 단지 단체라는 이유만으로 정치 자금 기부를 못하게 만든 정치자금법도 그렇고, 지역 정당 조직의 공식 사무실 설치를 금지한 정당법도 그렇고, 지나치게 짧은 선거 운동 기간과 그 기간에조차 정당과 단체의 선거 운동에 광범위한 규제를 둔 선거법도 그렇다.

다른 나라에선 찾아볼 수 없는 이런 법률 조항들 속에서 한국 정치와 선거는 점점 더 후보 개개인과 언론 매체, 전문가 집단과 선거관리위원회가 주역이 되고 정당과 단체는 기껏해야 단역에 머무르고 마는 '민주주의 아닌 민주주의'로 변모해가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들 법률은 모두 노무현 정부 때 열린우리당이 중심이 되고 <한겨레> 등 진보 언론이 지원한 '깨끗한 정치', '돈 안 드는 선거'를 목표로 한 정치 개혁으로 도입한 제도들이다.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의 관점에서 국민 참여 경선의 여러 문제를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개방형 대의원 대회를 제시했다 하더라도, 이 제도에서도 분명 여러 결점과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제도란 인간 자유 의지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짐에도 바로 그 인간에 의해 운용되고 변용되는 까닭에 늘 오용의 가능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글이 어떤 가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민주화 이후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 정치를 휘감았던 그 '불모의 흥분 상태'를 가라앉히고 공동체가 대면한 진정한 문제를 '차가운 열정'으로 곱씹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있다. 민주주의에서 정당은 왜 필요한가? 운동이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정치 개혁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생각이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바꿔놓을 수도 있다.

참고한 정치학 교과서

<소명으로서의 정치>(막스 베버 지음, 박상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정당론>(모리스 듀베르제 지음, 박희선·장을병 옮김, 문명사 펴냄, 1976년)
<현대 위기와 민주 혁명>(로버트 달 지음, 한완상·이재호 옮김, 탐구당 펴냄, 1981년)
<절반의 인민 주권>(엘머 에릭 샤츠슈나이더 지음, 현재호·박수형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민주주의 이론의 재조명>(지오반니 사르토리 지음, 이행 옮김, 인간사랑 펴냄, 1990년)

Michael Walzer, "Democracy vs. Elections," in New Republic(January 3 and 10,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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