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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멸망 뇌관은 핵폭발 아니라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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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멸망 뇌관은 핵폭발 아니라 달러!" [김성희의 '뒤적뒤적'] 크리스 브래지어의 <세계사, 누구를 위한 기록인가>
역사는 재미있다. 어지간한 드라마 뺨친다. 교훈도 넘친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니 이 책 <세계사, 누구를 위한 기록인가?>(크리스 브래지어 지음, 추선영 옮김, 이후 펴냄)를 읽기 전에는 '어떤 역사책이 좋은 책인가' 하는 점을 따져본 적이 없다.

좋은 역사책이란 무엇일까, 어떤 기준을 맞춰야 할까. 정확성? 객관성? 모두 어렵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퇴색하고, 자료가 사라진 과거의 일을 정확히,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기술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지역사나 미시사가 아닌 세계사를 다룬 책은 분량의 제약까지 받는다. 이래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느니 하며 사관(史觀)을 거론하게 된다.

책은 번역판의 제목을 보면 언뜻 역사철학을 다룬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양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나름 익히 알려진 주제를 설파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아니다. 그냥 '세계사'다. 생명이 탄생하기 전 점액질에서 21세기 이라크 침략까지 인류사를 다뤘다. 1970년대 많이 읽힌 영국 작가 H. G. 웰즈의 <세계 문화 소사>를 생각하면 된다.

원서는 4만 단어로 인류사를 정리했다는데 번역판은 300쪽이 조금 안 되니 그야말로 주마간산 세계사라 보면 된다. 최근 화제가 된 <유럽 문화사>(도널드 서순 지음, 뿌리와이파리 펴냄)가 19, 20세기 유럽사만 다뤘는데도 5권 2500쪽 이상의 분량이니 이 책이 얼마나 소략한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 <세계사, 누구를 위한 기록인가>(크리스 브래지어 지음, 추선영 옮김, 이후 펴냄) ⓒ이후
하지만 걱정할 게 없다. 이 책은 그 나름대로 충분한 가치를 지녔다. 아니 분량 이상이다. 다시 좋은 역사책의 조건을 거론하자면,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거나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빠질 수 없다고 본다. 이 책 곳곳에서 그런 대목을 만날 수 있으니 그런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대중의 '각성'을 설명하면서 두 가지 이유를 든다. 도시와 교육이다. 수천 개로 쪼개져 있는 농촌과 달리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서 노동 계급은 자신들이 사회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억압받는 대중임을 깨달았다. 교육도 급진적 사고를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사람들은 새로운 기계를 다룰 수 있을 만큼 배워야 했으므로 19세기에 대중 교육이 도입됐다. 박애주의나 기독교의 자선 사업 덕분이 아니라 자본의 필요에 의해 보급된 대중 교육으로 인해 보통 사람들도 사회주의, 사회 정의 같은 새로운 정치적 사고에 눈을 뜨게 되었다.

노예 무역은 어떤가. 서인도제도로 최초의 흑인이 팔려간 때는 1510년. 이후 급속히 늘어나 17세기에는 노예를 잡아들이기 위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요새가 서아프리카 해안에 40개가 운영됐다. 아프리카 노예제는 산업 혁명으로 소용돌이 쳤던 유럽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자 미국이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미국의 발전은 아프리카의 노예 없이 정착민들의 이마에 흘린 땀만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정도면 세계사가 조금 다르게 보이지지 않는지? 흥미로운 사실도 적지 않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가르친 여성 사상가 아스파시아는 이 책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그리스 도시 밀레토스 출신으로 고대 그리스의 명지도자 페리클레스와 함께 살기도 했는데 정치와 수사학에 능통했다고 한다.

지금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 참정권에 대한 이야기도 새롭다. 에드워드 왕 시대 영국에서 벌어진 여성 투표권 획득 투쟁은 말 그대로 '투쟁'이었다. 남성들의 별장에 대한 폭탄 공격, 유명 미술품 파괴, 공공건물의 유리창 깨기, 감옥에서의 단식 투쟁 등 과격했던 참정권 확대론자들의 시위에는 근대 '테러주의'의 여러 전술이 활용되었다. "그들이 인간의 목숨보다 재산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노예 무역을 처음 시도한 것은 포르투갈 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10세기경부터 유럽 무역상들의 거래 중 일부였다는 사실도 일러준다. 기독교 침입자들은 동유럽의 비기독교인들을 납치해 프랑크 인들에게 팔아넘겼으며 베니스나 제노바의 부는 대부분 노예 무역으로 벌어들인 것이었다. '노예(slave)'라는 단어 자체도 유럽 노예 무역의 주요 희생자였던 슬라브인(Slavic)에서 유래됐다는 설명이다.

말리 제국과 송하이 제국은 들어본 적이 있는지? 14, 15세기 서아프리카에서 번성했던 국가들이다. 1324년 메카로 성지 순례를 떠난 말리 제국의 칸칸 무사 왕과 측근들이 카이로에서 얼마나 많은 황금을 뿌렸는지 카이로의 금값이 12년 후에도 회복되지 못할 정도였단다. 또 1600년 직전 열대 우림 지역의 베닌을 방문했던 네덜란드 상인은 암스테르담보다 더 큰 도시 규모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또 다른 네덜란드인은 '훌륭한 법'과 '잘 조직된 경찰력'에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미개한 아프리카인'이란 유럽인들이 만들어낸 신화라는 증거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이 책의 미덕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의미심장한 예언도 그에 포함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컴퓨터와 항공 여행, 핵무기와 달 착륙의 시대로 기억되기보다는 다가오는 세기에 세계를 휩쓸 사상을 가진, 알려지지 않은 예언자의 탄생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같은 이가 혹 그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막연하게 느껴진다면 이런 구절은 어떨까. 고대 로마 제국의 몰락 원인으로 화폐 가치 하락을 들면서 이것은 서방 제국의 쇠퇴와 몰락이 어떻게 진행될지 보여주는 지표일지 모른다고 지적하는 대목이다.

"서방 제국은 핵폭발로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달러가 폭발하는 구슬픈 소리와 함께 몰락할 것이다."

2006년 출간된 책이 2008년 세계적 금융 위기와 이후 휘청거리는 자본주의를 예고한 것 같아 그 혜안에 놀라게 된다.

대부분의 책이 그렇듯이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학술서가 아닌 만큼 사료를 꼼꼼히 들지 않았다. 일반 독자로서는 사실인지 주장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또 지은이는 역사가가 아니다. '아주 특별한 상식'으로 옮겨진 'NO-NONSENSE' 시리즈(이 책도 그 중 하나다)를 기획한 영국 <뉴 인터내셔널리스트>의 공동 편집인이니 저널리스트라 봐야겠다. 그러기에 이런 포켓북 형태의 세계사를 집필할 수 있었겠지만 자본주의와 서구 중심주의 비판 그리고 여성 중심에 기울었다는 인상도 준다. 따라서 삐딱하다는 점에서 좋게는 '진보', 나쁘게는 '좌파'의 딱지를 붙이며 불편하게 여길 이들도 있겠다.

그런 시선을 의식했는지 지은이는 후기에서 "역사가 우리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전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책은 새로운 시각과 사실을 보여주기에 그런 아쉬움을 너끈히 상쇄한다. 한 마디로 좋은 역사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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