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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도 피해 가는 마지막 낙원! 어디야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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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도 피해 가는 마지막 낙원! 어디야 도대체? [이권우의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브루스 채트윈의 <파타고니아>
희한한 여행기다. 처음 가본 곳의 풍경이나 유물에 대한 넋두리는 절제되어 있다. 대신, 그곳에 가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와, 책을 읽어 미리 안 이야기와, 가서 들은 이야기로 범벅되었다. 우리 여행이란 게 고작 이름 난 유적지 앞에 떼로 몰려가 사진 찍고 오는 것이라 그런지 낯설다. 아니라면, 지은이의 글쓰기 방식이 독특해서일까?

물론, 그만한 효과는 있다. 험한 자연과 격동의 역사와 맞서거나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그런데 그 사람 가운데 미국에서 건너온 은행 강도, 바쿠닌의 영향을 받아 혁명을 선동한 아나키스트, 이곳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프랑스 출신 떠버리 변호사 등이 있다. 재미있을 수밖에.

다른 책에서 읽은 내용을 요약해 풀이해 주는 대목이 지루하기는 하지만, 배경 지식이 늘어나는 데 도움이 된다. 더욱이 여행지에서 들은 이야기란 과장된 내용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몽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런 점에서 이 여행기는 고전적인 여행기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보지 않고도 가본 것처럼 쓸 수 있었던 것은 들은 이야기가 수두룩해서다. 어쩌면, 모든 여행기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인지도 모른다.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다는 브루스 채트윈의 <파타고니아>(김훈 옮김, 현암사 펴냄)를 읽으며 들은 생각이다. 지금이야 여행 관련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많아 낯선 곳이라는 개념이 없다시피 하지만, 국내에 초역된 2004년만 해도 파타고니아가 얼마나 미지의 세계였을까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도 여전히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듯싶다. 산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은 고가인데다, 친환경 소재를 쓰는 등산 제품 회사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도대체 어딜까? 지은이가 들려주는 에피소드는 상당히 흥미롭다. 1520년 마젤란이 산훌리안에 상륙했다고 한다.

일행이 아직 배에서 내리지 않았을 적에 해변에서 벌거벗은 거인이 춤추는 광경을 보았다. 그 거인은 테우엘체 인디오였는데, 대체로 성정이 순한 편이지만 덩치가 크고 체격도 좋고 목소리도 우렁차서 거칠거나 난폭한 종족으로 오해받기 일쑤였다.

마젤란이 이 거인이 신고 있는 인디오 모카신의 크기를 보고 놀라 "허, 파타곤(patagon)"이라고 했단다. 큰 발이라는 뜻인데, 이 말이 파타고니아의 기원이 되었다고. 책 서문을 쓴 니컬러스 셰익스피어는 이 지역을 교과서적으로 설명해준다.
▲ <파타고니아>(브루스 채트윈 지음, 김훈 옮김, 현암사 펴냄). ⓒ현암사

파타고니아는 지도에 표기되는 정확한 지명이 아니다. 그곳은 아르헨티나와 칠레 남부에 펼쳐진 9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역을 아우르는, 경계가 모호한 광대한 땅이다. 그 지역을 가장 적절하게 규정해주는 요소는 토양이다. 우리는 빙하가 남겨놓은 현무암 자갈층을 이르는 로다도스 파타고니코스를 볼 때 우리가 파타고니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곳을 뒤덮은 대표적인 식물군에 해당하는 키 작은 관목 하리야를 볼 때도 그렇고, 그곳의 전형적인 기상 요소, 곧 10월에서 3월까지 맹렬하게 불어오는 바람, 채트윈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의 살가죽을 벗겨낼 정도로" 매서운 바람으로도 그곳을 규정해볼 수 있다. 그 바람은 생텍쥐페리의 비행기를 뒤로 밀어낼 만큼 거셌다.

이 여행기의 눈은 앞부분에 있다. 지은이가 파타고니아를 여행하기로 마음먹은 동기가 잘 나와 있기 때문이다. 누가 모험에 가까운 여행을 떠날까에 적절한 답을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할머니집 장식장에는 굵은 털이 나있는 가죽 조각이 있었다. 무어냐고 어머니에게 물으니, 초식 공룡인 브론토사우르스 조각이라고 말해줬다.

어린아이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꿈에 이 공룡이 침실 벽을 부수고 뛰어 들어오는 통에 소스라치며 깨어났다는 말을 과장이라 여길 이는 없을 듯. 이 공룡을 발견한 이는 할머니 사촌으로 뱃사람인 찰리 밀워드. 파타고니아의 라스트 호프만에 있는 동굴에서 발견했다.

할머니 집에 공룡의 가죽이 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그러다 놀림만 당했다. 브론토사우르스는 파충류라서 털이 있을 수 없어서다. 매머드를 착각한 것이 아니냐고 했다. 하지만 매머드는 아니었다. 무엇일까? 나중에 찰리 선장이 발견한 동물은 대형 나무늘보인 밀로돈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기에 얽힌 해프닝도 자세히 나와 있다. 그렇다고 어린 채트윈의 몽상이 깨지지는 않았다. 그곳에 가고 싶었다.

다른 동기는 일종의 정치적 과대망상이라 할 수 있겠다. 영국에서도 우리처럼 반공 교육이 있었던 모양이다. 민방위 시간에 강사가 스탈린의 무력 도발 가능성을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강사는 스탈린이 강력한 폭탄으로 파괴할 가능성이 큰 유럽 도시들을 표시해 주었다.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겠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공포는 수소 폭탄보다 훨씬 강하다는 코발트탄에 관한 기사를 읽으며 더 강해졌다.

살아남으려면 스탈린이 폭탄을 투하할 수 없는 지역을 찾아야 했다. 아이들끼리 이민 위원회를 결성해 이주 지역을 찾았다. 더불어, 방사능 낙진의 패턴을 예상해 피해가 작은 지역을 찾는, 나름은 꽤 진지한 연구를 거듭했다. 그래서 낙점한 곳이 남반구.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제외하니, 남는 곳은 파타고니아였다. 전쟁광이라던 스탈린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죽었다. 다행히 이민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도 파타고니아에 대한 환상은 깨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곳에 가고 싶었다.

드디어 갔다. 어릴 적부터 꿈꾸던 파타고니아로. 지은이의 이력을 볼라치면 파란만장했다. 절대로 순탄한 인생이 아니었다. 훌쩍 떠나고 싶었을 듯싶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큰 변화를 겪는다. 이 여행기로 그는 일약 스타가 되니까. 그토록 그리던 파타고니아를 본 소감은 이러했다.

파타고니아 사막은 모래와 자갈이 아니라 부러지면 고약한 냄새가 나는 회색 가시덤불로 이루어진 사막이다. 아라비아 사막과 달리 영혼을 극적으로 고양시켜주는 곳이 아님에도, 그곳은 인간 체험의 기록들 속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찰스 다윈에게 그곳의 부정적인 특징들은 대단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다윈은 <비글호 항해기>에서 세계 곳곳의 수많은 경이를 목격한 자신이 어째서 이 "불모의 황야"에 그리도 단단히 사로잡혔는지 설명하려 애썼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이 책은 '파타고니아의 만인보'이다. 지은이가 만난 흥미로운 인물들의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아흔일곱 개의 에피소드로 엮어 있는데, 비중이 약한 이는 한 항목에 그치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이들은 몇 개의 에피소드를 차지한다. 그 가운데 가장 비중이 높은 이는 찰리 밀워드. 72번 항목부터 지루할 정도로 길게 언급된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재미를 느꼈던 인물들 이야기를 소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지은이는 코모도로리바다비아에서 남아메리카학의 대가라 할 마누엘 팔라시오스 사제를 만난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제는 지은이를 앉혀 놓고 파타고니아의 선사 시대를 주제로 장광설을 펼친다. 그러다 최초의 인류가 출현한 곳이 바로 파타고니아라고 말한다. 특히 1928년에 이 인류의 조상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인디오식 이름은 요실. 황록색의 이끼 같은 털로 뒤덮인 꼬리 없는 원인(原人). 키는 80센티미터이고, 낮에는 느릅나무 숲에서 지내다가 밤이 되면 혼자 사냥 나온 사람의 모닥불 곁에서 몸을 녹였단다. 신부는 그 원인에게 푸에고피테쿠스 파텐시스라는 학명을 붙이기로 했다고 기염을 토했다. 지은이는 신부가 독학으로 그런 경지에 오른 것을 높이 평가했다. 읽으며 든 느낌은 한마디로 믿거나, 말거나!

이번에는 지은이가 들은 이야기. 1650년경 살인을 저지르고 배에서 달아난 두 명의 선원이 치로에 섬 맞은편에 있는 바닷가 숲에서 사로잡혔다. 총독에게 끌려온 이들은 범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신비로운 이야기를 떠벌렸다. 자신들이 지붕이 은으로 된 궁전들이 있고, 피부가 하얗고 에스파냐어를 쓰는 이들이 사는 도시를 목격했다고 말이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세사르의 매혹적인 도시' 트라팔란다에 대한 관심을 되살렸다. 1528년, 세사르라는 키잡이 출신이 플라테 강을 타고 내륙을 거슬러 올라가 안데스산맥을 넘어간 끝에 황금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지역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원정대가 꾸려지고 그들이 끝내 실종되고 말았다는 유의 이야기는 이미 예상했을 터.

이 이야기를 읽으며 이 책에 나오는, 그러니까 파타고니아에 사는 유럽 이주민들의 심성을 엿볼 수 있다 싶었다. 결국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땅으로 파타고니아를 여겼고, 그래서 이 땅을 무력과 돈으로 지배하고 강탈했던 바이다. 지은이는 담담히 말하고 있지만, 아마도 이 책을 읽은 토박이들은 남미의 일그러진 초상화를 보는 듯싶었으리라.

이 책은 수미쌍관의 구조를 띠고 있다. 찰리 밀워드가 보낸 가죽 때문에 유년 시절부터 파타고니아에 가고 싶었다 하지 않았나. 마침내 지은이는 한때 공룡이라 착각했던 그 가죽을 발견한 동굴에 찾아간다. 잿빛 역암으로 된 절벽에 지름이 120미터나 되는 큰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천장에는 하얀 종유석이 매달려 있고, 양옆은 소금 결정으로 뒤덮여 있었다.

행여 남아 있는 가죽이 있을는지 싶어 바닥을 더듬어보았다. 가죽은 없고 똥만 그득했다. 그러다 어릴 적 보았던 털을 발견했다. 털 뭉치를 집어 봉투 속에 넣고는 기쁜 나머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이 엉뚱하고 괴이한 여행의 목적을 드디어 달성"했다고. 똥 무더기를 뒤져 털을 줍고는 이런 감탄을 했을 지은이를 떠올리면 익살스러운 웃음이 절로 떠오른다.

마무리하며 이제 내가 숨긴 인물이 있음을 말해야겠다. 이 사람은 지은이가 파타고니아에서 만난 화석화한 인물형이 아니다. 니타 스탈링. 아담한 체구에 성격은 활달하고 단호한 말투를 쓰는 영국 여성. 젊은 시절 사진 찍는 일을 즐기다 원예 기술자로 변신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녀는 집과 세간을 전부 팔아치우고 여행을 떠났다.

발 닿는 데로 돌아다니며 영어를 가르치거나 임시 정원사로 일했고, 번 돈은 다음 여행 경비로 썼다. 지은이를 파타고니아에서 만나기 전, 그녀는 남아프리카 초원 지대, 오리건 주의 백합과 마드론 숲,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소나무숲, 서부 오스트레일리아, 교토와 홋카이도를 두루 다녔다.

아무리 간소하게 짐을 챙기더라도 야회복만은 꼭 넣고 다녔는데, 그 정성 덕이었을까 일본에서는 연하남과 로맨스가 있었다. 파타고니아를 떠나면 진달래 보러 네팔에 갈 예정이란다. 인생 뭐 있다고 아등바등 거리며 살까. 이리 살아야 하는 법이거늘. 처박혀 있는 60리터짜리 배낭을 얼른 챙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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