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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과 평강의 로맨스는 가짜! 속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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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과 평강의 로맨스는 가짜! 속았다고? [이권우의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김부식과 일연은 왜>
책을 읽으려면 꼼꼼하게 읽고 비교하며 읽고 비판적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그리 읽어 왔다고 자부하고, 그리 읽어야 한다고 떠벌리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책을 읽다보면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역시 한낱 책벌레가 연구자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일전에는 배병삼의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녹색평론사 펴냄)을 읽으며 그 지식의 고고학에 매료된 바 있다. 이번에는 정출헌의 <김부식과 일연은 왜>(한겨레출판 펴냄)라는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반성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은 <삼국사기>(김부식 지음, 이강래 옮김, 한길사 펴냄)와 <삼국유사>(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민음사 펴냄)를 엮어 읽었다. 같은 사실(史實)을 어떻게 다른 시각으로 다루었는지, 비슷한 주제를 다룬 항목을 비교해 보면 무엇을 알 수 있는지 힘 있는 문체로 써냈다. 대부분 책벌레들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각각 읽어본 적은 있더라도 비교하며 읽은 경험은 적을 터라 시사하는 바가 큰 책이다. 하여튼, 이 책을 읽으며 '읽기'의 본령은 무엇인지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의미 있었다.

지은이는 일종의 두괄식 체제로 글을 썼다. 책 앞머리에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세계관과 <삼국유사>를 쓴 일연의 그것을 명확히 밝혀 놓았다. 그리고 2부에 7개 항목에 걸쳐 두 권의 책 내용을 엮어가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먼저, 지은이는 김부식에 대해 소상히 말한다. 신라 무열왕계에 맥이 닿아 있던 김부식은, 묘청이나 정지상 같은 서경중심 세력과 체질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었다. 서경세력은 주술적이고 신비적인 세계관에 깊이 젖어 있었다. 반면에 김부식은 유가적 합리주의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여기서 <삼국사기>의 특징이 오롯해진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 작업은 자신의 오랜 정치적 경륜을 총동원하여 지난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분투였다. 지금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관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것처럼, 이자겸으로 대표되는 외척세력의 발호와 묘청으로 대표되는 서경 세력의 반란을 진압하고 권력의 정점에 선 김부식에게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구축한 시대를 정당화해줄 역사의 전범이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삼국사기>였던 것이다."

▲ <김부식과 일연은 왜>(정출헌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프레시안

지은이는 일연의 정치적 위상을 힘주어 말한다. <삼국유사>가 한낱 야사이고, 일연은 속세를 떠난 산승이라 여기는 통념을 뒤집기 위해서다. 일연은 반무신 정권세력과 친원세력의 후원을 받았고, 불교계의 최고 지위인 국존(國尊)에 임명되었다. 역설인 것은 그를 기리는 글에 보면 1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목록이 나오는데, 정작 <삼국유사>는 없다는 사실이다. 당대에 평가 받지 못한 책이 오늘날 고전으로 대접 받으니, 우리 문화사의 일대 반전이라 해도 될 일인 듯싶다. 김부식과 비교할 적에 드러나는 일연의 민낯은 무엇일까? 지은이는 말한다.

"일연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현실만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또 다른 세계가 현실 너머에 엄연히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 세계관은 김부식이 표방했던 유가적 세계관, 곧 중세적 합리주의와 정면으로 맞선다. 그런 점에서 일연은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배제해버렸던 비현실적인 사실들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여 '세계의 진실'을 새롭게 되살리려 했다고 말할 수 있다. (…) 거기에 유가적 세계관과 불교적 세계관이 팽팽하게 힘겨루기를 하던 고려 후기의 시대적. 사상적 분투가 아로새겨져 있음은 물론이다."

두 사람의 세계관이 투영되다보니 각 책에는 미리 알아두고 읽어야 하는 특징이 나타난다.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자신의 역사관에 부합하도록 남아있는 사건을 적절하게 선별. 배치하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면 비현실적 사건을 끌어들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고, 비록 "국가적 차원의 공업을 세운 인물과는 거리가 있으나 인간 개개인이 지켜야 할 자세 가운데 효행, 지조, 예술, 절행에 뛰어난 인물"을 선별하고 배치했다.

일연은 현실 너머의 세계를 거두고 배제하는 데 나름의 잣대가 있었던 바, "일연이 주목한 신이함이란, 신이함 그 자체가 아니라 불교적 경이로움과 연결되어" 있다. 지은이는 <삼국유사> 전반부에 기이 편을 배치한 것이 후반부에 나올 불교적 경이를 이해하게 하려는 전략 아니었겠느냐 주장한다. 결국 <삼국유사>는 불교적 세계관으로 삼국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다는 말이다.

2부 '진실을 엿보는 일곱 개의 창'에 나온 '공주는 왜 미천한 사내를 만났을까: 평강공주와 선화공주'는 지은이의 주장을 입증해주는 적절한 예다. 이 글은 <삼국사기>에 나온 평강공주 이야기와 <삼국유사>에 나온 선화공주 이야기를 비교한다. 존귀한 여성이 비천한 남성과 사랑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을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인물로 키워냈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적절하다 싶다.

지은이는 먼저 <삼국사기>의 평강공주를 꼼꼼히 읽으며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는 평강공주가 어릴 적 자주 울자 아버지가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낸다고 농담을 했다. 그런데 왜 평강공주는 부친의 농담을 가슴에 담아두었다고 굳이 온달에게 시집 갔을까? 기록되길 "대왕께서는 항상 말씀하기를 '너는 반드시 바보 온달의 아내가 되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찌 그 말씀을 고치려 하십니까? 평범한 사내도 말을 반복하지 않는데 하물며 임금께서는 어떻겠습니까? '임금은 희롱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됐습니다. 저는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두 번째는 온달이 전사한 다음에 왜 관이 꼼짝도 하지 않았을까? 기록되길 "왕이 허락하자 온달은 출정하기에 앞서 맹세하기를 '계립현. 죽령의 서쪽 지역을 되찾아오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다. 드디어 전쟁터로 나가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웠는데, 온달은 적군의 화살에 맞아 중로에서 죽었다. 장사를 지내고자 했으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음과 삶이 결정됐습니다. 돌아가시지요'라고 하자 드디어 관을 묻을 수 있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비통해했다"라 했다.

지은이는 이 질문에 답을 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지적한다. '열전' 권5에 온달과 함께 실려 있는 을파소, 김후직, 녹진 등 9명의 전기는 <본기>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의 삶을 기록했다. 하지만 온달은 <삼국사기> 어느 곳에서도 이름은 물론이고 그가 거둔 전공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한다. 특히 온달은 양강왕 때 전사했고, 이 양강왕이 평강왕의 뒤를 이었다 기록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평강왕이 양강왕의 아들이다. 이런 점을 참작하면 온달은 실존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지은이는 분석한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를 아름답게 수놓은 로맨스도 허구일 터. 그렇다면 도전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사실에 근거해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유가적 역사서술의 기본원칙을 김부식은 왜 외면했을까, 라고.

"온달과 평강공주를 통해 김부식이 말하고자 했던 진정은 "자신의 말에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임금은 실없는 농담을 해서는 안 되고, 신하는 죽어서라도 자신의 말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 말이다. 실제로 김부식은 <삼국사기> 곳곳에서 임금이든 신하든 일반백성이든 누구나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신의를 꼽고 있다."

서동 이야기에서도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진다. <삼국유사> 권2 기이 무왕 편을 보면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못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고 어릴 때 이름을 서동"이라고 했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1 왕력을 보면 "제 30대 무왕 혹은 무강 또는 헌병이라고 하며, 어릴 적의 이름은 일기사덕이라 한다"고 했다. 기록에 차이가 있다.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이 서동인지, 일기사덕인지 헷갈리는 셈이다.

이 혼란을 일연도 인정했다. <삼국유사> 권2 기이 무왕 편에 "<삼국사기>에는 이를 법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 했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했으니 말이다. 실마리는 일연이 달아놓은 주석에서 찾을 수 있다. "무왕을 고본에는 무강이라 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라 한 것.

정리하자면, 고본에는 서동이 무강왕의 어릴 적 이름으로 나오는데, 일연은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으니 이것이 잘못되었다 여겨 무강을 무왕의 오기로 파악한 셈이다. 여기에서 지은이는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만약 무강왕이라는 임금이 있었다면 어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강왕은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익산군을 보면 "익산군은 본래 마한국이었는데 (…) 후조선 무강왕과 왕비의 쌍릉"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동국여지승람>에서 조선 무강왕이라 한 것은 곧 기준이다. 대체로 조선이 기준에 이르러 비로소 왕이라 일컫기 시작했고, 위만을 피하여 마한에 이르러 개국했다. 뒤에 백제 시조 온조에게 병합됐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지은이가 보기에 "무강왕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에게 병합되어 사라진, 곧 전라도 익산 지역에 존재했던 마한국의 건국주"였다. 그렇다면 서동의 로맨스는 백제의 제30대 임금인 무왕의 것이 아니라 마한국을 세운 무강왕의 이야기가 된다.

더불어 선화공주의 간청으로 미륵사가 창건됐다는 내용도 맞지 않게 된다. 2009년 미륵사지석탑 해체 과정에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미륵사지의 창건 주체가 '백제왕후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기록돼 있었다. 지은이의 추론과 유물이 전하는 객관적 사실이 일치하는 순간이다.

서동의 이야기에서도 일연의 불교적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다. 서동은 과부가 연못의 용과 관계해 낳은 인물이다. 그런데 왕이 되어 용화산 밑을 지나가다 선화공주의 청을 들어 못을 메우고 절을 세웠다. 용을 섬기던 토속신앙을 대신해 불교가 자리 잡는 과정을 선명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김부식과 일연은 왜>는 우리가 역사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지은이의 말대로 "역사란 역사가와 그가 살던 시대가 공모하여 만들어낸 '거대한 허구'에 다름 아니다". 어디 역사뿐이겠는가. 우리를 둘러싼 허구를 거두어내고 진실을 엿보려면 꼼꼼하게 읽어야 하고 비교하며 읽어야 하고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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