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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죽여라!' 그분의 명령, 당신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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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죽여라!' 그분의 명령, 당신의 선택은? [김성희의 '뒤적뒤적'] 제리 하비의 <생각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
늘 궁금했다. 어떻게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멍청한 결정을 내리는지, 멀쩡한 구성원들이 참여한 조직이 왜 부당하고 때로는 비열한 행위를 하는지.

예를 들면 쿠데타가 그렇다. 장군 혼자서 정권을 탈취할 수는 없다. 설사 이익에 혹해 그를 따르는 소수의 장교단이 있다 해도 그렇다. 총을 들고 따라나선 수많은 졸병이 없다면 군사 정권은 들어설 수 없다. 그 장삼이사 병사들은 대부분의 쿠데타가 단지 집권층의 교체에 불과하리라는 것을 몰랐을까. 아니면 모두 생명의 위협을 받아 총을 들고 새벽에 병영을 뛰쳐나왔을까.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서 일부 언론의 교묘한 또는 막무가내식 보도 태도까지, 이런 의문이 생기는 사례는 많다. 물론 그 이유를 짐작 못한 것은 아니다. 사회생활을 남 못지않게 했으니 모를 수가 없다. 개인적 의견과 달리 조직의 조치를 묵인, 방관, 동조한 경우가 적지 않았으니 말이다.

▲ <생각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제리 하비 지음, 이수옥 옮김, 황상민 감수, 엘도라도 펴냄). ⓒ엘도라도
미국의 경영학자가 쓴 이 책은 그런 궁금증의 상당 부분을, 체계적으로 풀어준다. 핵심은 '애벌린 패러독스(Abilene Paradox· 번역서에선 '애빌린 패러독스'로 표기했다.)'다. 심리학 박사인 지은이의 체험에서 나온 조직 원리다.

지은이 하비 박사는 1974년 여름 텍사스의 처가를 방문했다. 무더운 여름날 오후 "외식을 하자"는 장인의 제안에 온 가족이 고물 자동차를 타고 애벌린에 다녀온다. 왕복 4시간 동안, 용광로 같은 더위와 먼지바람을 무릅쓰고 사막길을 갔는데 식사는 형편없었다.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정작 알고 보니 아무도 애벌린에 가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내도, 장모도 '다들 가자니까' 억지 춘향 격으로 따라 나섰음을 뒤늦게 알았다. 심지어 장인도 집에 있고 싶었지만 모처럼 찾아온 딸 내외를 생각해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아무도 적극적으로 원하지 않았는데 '조직'은 의도하지 않은 행태를 보인 것, 이 모순을 심리학 박사인 지은이는 조직 운영의 원리, 정확히는 조직의 허점 분석으로까지 확장했다.

하비 박사가 제시하는 애벌린 패러독스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공모의 상호작용'과 권위에 대한 맹종이 그것이다.

"상사의 독재에 공모하는 부하 직원이 없는 한 독재하는 상사는 나오지 않으며, 부하 직원의 아부에 공모하는 상사가 없는 한 아부하는 부하 직원도 생기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자멸적 조직의 각 구성원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공모해 위험을 만들어낸다."

그가 지적하는 '공모의 상호작용'은 이 한 마디로 요약된다. 동료들에게 까탈스러운 사람으로 비치기 싫어서, 남들도 다 좋다하니까, 따돌림 당할까봐 혹은 해고 등 불이익을 꺼려 조직의 행동을 묵인 내지 동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은 이것이 '상상의 압력'이란다. 책임을 전가하거나 남 탓을 하기 위해 지어낸 경우가 많다는 설명이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 숙청을 할 때 자신들만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다. 나치는 유대인 유력 인사들로 구성된 유대인위원회를 이용했다. 유대인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들로 구성된 위원회는 자신들만은 예외일 것이란 희망 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자기합리화에 근거해 나치에 협조했다. 그리고 유대인 증명서 발급이라는 부당하지만 사소해 보이는 차별에 순응한 것이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

제2차 대전 때 영국을 이끈 처칠은 이런 사람들을 두고 "사람들은 악어를 배불리 먹여주면, 그 악어가 자기를 가장 나중에 먹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먹힐 차례가 오기 전에 폭풍이 지나가기 바랍니다"라고 경고했다.

권위에 대한 맹종은 또 다른 문제다. 지은이는 구약 성경의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려던 아브라함의 예를 든다. 아브라함의 행동은 종교적 신념에서 나왔기에 신학적으로는 어떻게든 설명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지은이는 아브라함이 "왜 제 아들을 죽이라 하시는지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대신 저를 죽이십시오" "(아내)사라와 잠시 이야기할 시간을 주세요"라고 말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를 1분기 경영개선을 위해 직원 50명을 정리하면 승진과 연봉 인상을 해주겠다는 사장의 제안을 받은 사람에 비교한다. 대부분의 경우 "조직 관리를 위한 합법적 행동이라 믿으며 직접적인 결정을 내린 자신들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여겨 실행에 옮길 것이란다.

심지어 어떤 중간관리자는 "고용주를 신뢰해서는 안 되며, 시장성이 있는 새로운 기술을 배울 계기를 제공하고,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가족의 결속력을 강화해주고, 삶은 궁극적으로 불공평하다는 진리를 가르쳐준다"해서 그런 '경영 합리화' 조치를 환영하더라는 사례까지 들려준다.

그러면서 묻는다. "나는 단지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라고 밝힌,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책임자 아이히만과 다를 게 뭐가 있냐고.

책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따른 아브라함처럼 조직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이 충성심의 잣대이지만 이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도 모르게 조직을 파괴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는 해설이 덧붙여져 있다.

지은이는 조직구성원들의 '공모'를 정당화하는 다양한 배경을 들었는데 그 중 '부정적 상상'은 눈여겨 볼만하다. 이는 부당한 결정을 거부했을 경우 더 큰 재난이 일어날 것이란 상상이다. 예를 들면 "썩은 가지를 잘라내지 않으면 회사가 도산할 것이고, 그러면 모두가 실업자가 됩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부터 밀어내지 않으면 우리 모두 일자리를 잃을 것입니다"란 구조조정 명분이 그렇다.

하지만 지은이는 "유대인 처형 부대의 대원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그 일을 그만둘 수 있었다" 또한 "나치 친위대원 중에 유대인 처형을 거부했다고 사형당한 예는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하며 이는 책임 전가를 위한 변명이라고 지적한다.

책에는 애벌린 패러독스에 대처하는 처방도 실렸지만 솔직히 실효성은 의문스럽다. 모두가 "예"할 때 "아니오"라고 맞서는 사람은 그 성패의 기준이 현실과 달라야 한다는 등 상당 부분 개인의 분발 또는 '궐기'에 의지하는 탓이 크다.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사리에 맞게 행동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시대, 조직에 헌신하는 사람이 더 장수하고 더 높이 나는 현실에서 그런 해법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런 모순이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고, 원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위안을 주는 책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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