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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제와 형부의 스캔들, 그들의 슬픈 비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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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제와 형부의 스캔들, 그들의 슬픈 비밀은… [박수현의 '연애 상담소'] 한강의 <채식주의자> ②
인간이기를 그치고 싶어

처제 영혜는 언젠가부터 광적으로 채식을 고집한다. 그 정도가 하도 심해서 가족들은 이해할 수 없다. 영혜가 채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殺)에 대한 혐오에서? 아니, 거꾸로 살을 향한 욕망 때문이다. 그녀 자신이 강한 살의를 품고 있다.

그녀는 너무나 무언가를 죽이기를 열렬히 염원하기에, 죽임을 상기하는 어떠한 것도 멀리해야 한다. 육식은 살의를 환기하기에 두렵다. 자기가 먹어치운 무수한 생명들의 원혼이 명치께에 걸려 있다고 상상하는 영혜.

영혜의 외부는 자신을 못 견디게 하는 존재들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이 모든 것들에, 그러나 대상이 뚜렷하지 않은 살의를 느낀다.

▲ <채식주의자>(한강 지음, 창비 펴냄). ⓒ창비
영혜는 가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어느 쪽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상 자체가 살의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예의범절, 자제, 절도 등의 미덕으로 구성된 일상의 법칙 이면에는 분명히 끔찍한 것이 있다.

우리는 안다.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서 얼마나 타인을 위해하고 우리 또한 끊임없이 위협을 당하는지. 시각을 달리하면 지금 이곳은 끔찍한 전쟁터이다. 그래서 영혜는 사람이기를 그만 두고 싶다. 식물이 되고 싶다. 영혜의 판타지는 이렇다.

언니, 내가 물구나무서 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 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응,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156쪽)

아버지가 강제로 그녀에게 고기를 먹이려 했던 날, 그녀는 칼로 손목을 긋는다. 형부는 피로 범벅이 된 영혜를 등에 업고 병원으로 향한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그때까지 해 왔던 비디오 작업들에 구역질을 느낀다.

그때까지의 그의 작품은 "그가 거짓이라 여겨 미워했던 것들, 숱한 광고와 드라마, 뉴스, 정치인의 얼굴들, 무너지는 다리와 백화점, 노숙자와 난치병에 걸린 아이들의 눈물 들을 인상적으로 편집해 음악과 그래픽 자막을 넣었던 작품"(83)이었다.

그 순간, 처제의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푹푹 찌는 여름 오후의 택시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이 그를 위협했고, 구역질나게 했고, 숨을 쉴 수 없게 했다. (…) 단 한순간에 그는 지쳤고, 삶이 넌더리났고, 삶을 담은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었다. (83~84쪽)

형부는 현실을 소재로 작업을 해 왔다. 하지만 영혜의 자해 소동을 겪고 난 이후, '현실적인' 자기의 작업에 환멸한다. 삶을 담은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그의 고백은 현실 저 너머의 것에 대한 근원적인 욕망을 암시한다. 이 욕망 앞에서 현실의 모든 것들은 누추해진다.

영혜의 광태는 형부에게 실상을 환기시켜준다. 현실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 제대로 본 사람이라면 미칠 수밖에 없음을. 형부가 갑자기 지질 변동을 겪게 된 이유는 영혜의 결핍, 광기, 병증을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결핍과 광기는 현실의 참혹을 똑바로 보여주는 조명등 노릇을 한다.

영혜와 형부가 견딜 수 없어하는, 견디기를 거부하는 현실의 세목을 상세히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 약육강식? 적자생존? 자본주의적 현실? 이 정도는 소설에서 암시되지만, 그 현실의 구체적 세부를 묘사하는 것은 필수적이지 않다.

묘사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우리를 못 견디게 하는 현실이 무엇인지. 일례로 늘 우리를 결핍감에 시달리게 하는 연인도 현실이고, 서로에게 비수를 품고 사는 인간 사회도 현실이고, 인내와 노력의 끝에 환멸이 있다는 생의 섭리도 현실이다.

문제는 그들을 못 견디게 하는 현실의 세목이 아니라 그들이 현실에서 말할 수 없는 혐오를 느끼고 사람이기를 그만 두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반복적으로 꿈꾸는 식물의 이미지는 이런 맥락에 있다. 식물이란 인간이기를 그치고 싶어 하는 이들의 염원을 담은 유토피아이다. 그는 이런 꿈을 꾼다. 물론 그의 판타지를 담은 꿈이다.

그가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을 때, 짓무른 잎사귀에서 흐르는 것 같은 초록빛 즙이 그녀의 음부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향긋하면서도 씁쓸한 풀 냄새가 점점 아릿해져 그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절정의 직전에 가까스로 몸을 빼냈을 때, 그는 자신의 성기가 온통 푸르죽죽하게 물들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모를 싱그러운 즙으로 그의 아랫도리와 허벅지까지 시퍼런 풀물이 들어 있었다. (117쪽)

결핍, 혹은 근원적 욕망

영혜의 광기는 형부에게 현실의 참혹을 상기시켜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광기, 즉 결핍은 그를 치명적인 욕망에 빠뜨린 계기이다. "도취는 흠 없는 이미지를 향하게 마련이지만, 사랑은 상처 입은 이미지에 말을 건넨다."(<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대리언 리더 지음, 김종엽 옮김, 문학동네 펴냄), 178쪽) 사랑은 "궁극적으로 결핍에 건네지는 것이다."(<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 179쪽)

그의 결핍에 나의 마음이 공명한다. 접속은 약한 고리를 통해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이것은 경험적으로 보아 타당하다. 우리 모두 상대의 완전무결한 모습보다 안쓰러운, 약한 모습에 마음이 흔들려 본 경험이 있다.

이런 상식적 수준을 넘어서 결핍은 치명적인 욕망을 환기하는 도화선이다. 왜 그러한가. 그의 치명적인 결핍은 내 결핍의 치명성을 상기시킨다. 그의 결핍은 갑자기 깨닫게 해 준다.

내가 무엇을 잃고 살아왔는지. 내가 다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현실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허전한 나머지가 무엇인지. 그 나머지를 이제는 버려두지 말아야 함을. 다른 말로, 그의 결핍은 잠재워왔던 내 근원적인 욕망을 환기시킨다.

이에 식물이 되고 싶은 소망은 결여를 남김없이 채우려는 욕망, 현실에서 부족한 나머지를 향한 욕망, 즉 근원적인 욕망과도 통한다. 그들이 똑바로 본 현실의 참혹은 치명적인 결여, 일시적 만족'들'에도 불구하고 채 채울 수 없었던 궁극적인 허기를 암시하는 셈이다.

당신, 내 근원적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

아무리 형부가 처제에게 치명적인 욕망을 느낀다고 한들, 실제로 실현하기란 상식의 차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들은 경계를 넘었다. 경계를 넘게 된 계기 역시 영혜의 식물 되기 소망과 연관된다.

영혜는 온몸을 꽃으로 칠하고 비디오 촬영을 하자는 형부의 제의를 수락한다. 촬영을 진행하면서 형부는 알게 된다. 영혜 역시 온몸에 꽃을 그리고 성합하는 데 강렬한 욕망을 느낌을.

그는 몸에 꽃을 그리고 오면 영혜가 받아줄 것이라 믿었고, 영혜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들은 온몸에 꽃을 그린 상태에서 성합한다.

영혜는 형부의 몸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그녀는 형부의 몸이 아니라 꽃을 욕망했다. 즉 그녀는 형부가 아니라 남녀가 꽃이 되어 성합하는 이미지, 정확하게는 식물 되기를 욕망했던 것이다.

형부의 몸은 식물 되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였다. 꽃이 되어 성합하는 이미지는 근원 욕망을 환기한다. 욕망의 현실적 대상인 형부는 근원 욕망을 향해 가는 도구일 뿐, 근원 욕망 그 자체가 아니다.

형부의 욕망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형부의 욕망을 단순한 성욕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처제에게 느끼는 성욕 근원에는 성욕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경계를 넘어선 성욕은 근원적인 욕망이 외화된 일부분일 뿐이다.

형부는 처제의 몸에 그림을 그릴 때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무언가 근원을 건드리는, 계속해서 수십만 볼트의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감동"(103쪽)을 느낀다.

형부는 처제 엉덩이의 몽고반점 이야기를 듣고 치명적인 욕망을 품게 되었다. 몽고반점이라는 이미지가 식물적인 것에 대한 그의 욕망을 환기했기 때문이다. 이때 식물적인 무엇에의 욕망은 원래 그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내내 식물적인 무엇을 욕망하고 있었고, 몽고반점은 그 안의 오랜 욕망을 일깨웠다.

욕망은 결국 타인과 상관없이 원래부터 내 안에 있었던 나의 욕망이다. 타인을 욕망하는 사람은 결국 타인 자체가 아니라 내 안의 욕망을 욕망한다. 타인은 내 욕망을 환기하는 매개이자, 내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일 뿐이다.

우리가 연인에게서 우리의 판타지를 구하려고 할 때, 연인은 단순히 '나'의 판타지를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된다. 정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연인을 욕망한다기보다 연인을 매개로 '나'의 판타지를 실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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