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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구한 플라스틱, 누가 돌을 던지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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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구한 플라스틱, 누가 돌을 던지랴! [프레시안 books] 수전 프라인켈의 <플라스틱 사회>
어린 시절 나는 한 여인을 마음에 품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자옥. 그렇다. 독자들이 다 아는 바로 그 김자옥이다. 내가 그녀를 좋아한 까닭은 예쁜 얼굴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얼굴은 나중에 (1978년)라는 영화 포스터에서야 처음 봤다.) 그녀의 목소리 때문이다.

그때 김자옥은 명작 단편 소설을 각색하여 방송하는 문화방송(MBC) 라디오의 <사랑의 계절>에서 내레이션을 맡은 성우였다. 내가 알고 있는 많은 명작 단편 소설 중에 상당수는 아마도 실제로 책으로 읽은 게 아니라 <사랑의 계절>에 출연한 김자옥의 목소리로 들은 것일 게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도 그 가운데 하나다. 내용은 이렇다.

(가난해도 너~~무 가난한) 딜링햄 부부에게는 큰 자랑거리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남편인 짐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금시계이고, 또 하나는 아내인 델라의 기다란 금빛 머리칼이었다. 만일 솔로몬 왕이 이웃에 살고 있었다면, 짐은 왕의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시계를 꺼내 보며 부러워서 수염을 쓰다듬는 솔로몬의 모습을 즐겼을 것이며, 델라는 창문 밖으로 머리채를 늘어뜨려 시바 여왕의 화려한 보석과 뛰어난 미모를 무색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가난한 부부는 서로를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했다. 델라는 남편의 금시계에 어울리는 은빛 시곗줄을 선물했고, 짐은 아내에게 빗을 선물했다. 하지만 선물은 소용이 없었다. 짐은 빗을 사기 위해 금시계를 팔았고, 델라는 백금 시곗줄을 사기 위해 아름다운 머리칼을 잘라 팔았기 때문이다.

김자옥의 목소리로 들은 이 이야기는 내 인생에서 만화책으로 본 <플랜더스의 개>(위더 지음, 하이럼 반즈 그림, 노은정 옮김, 비룡소 펴냄) 다음으로 슬픈 스토리다. 멍청한 짐에게 화만 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훌쩍거렸을 것이다. '그깟 빗을 하나 사려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금시계를 팔다니……. 스물두 살이면 어린 나이가 아닌데 그렇게 분별이 없다니……. 또 금시계를 팔고 빗을 샀다면 그 차액이 꽤 될 텐데, 왜 그 이야기는 없어!'

▲ <플라스틱 사회>(수전 프라인켈 지음, 김승진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을유문화사

어처구니없는 짐에 대한 분노가 풀리는 데는 어언 30여 년이 걸렸다. <플라스틱 사회>(수전 프라인켈 지음, 김승진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를 읽은 덕택이다.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찾아 읽어보니, 빗이 보통 빗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짜 거북껍질로 만들고 가장자리에 보석이 박힌 진귀한 빗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빗이 너~~무 비싼 것 아닌가? 그때는 그랬다.

1860년대까지 당구공이나, 빗, 피아노 건반 등은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상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귀한 상아로 만들었으니 당연히 값은 비쌌고 코끼리는 멸종 위기에 처했다. 코끼리의 멸종 위기에 대한 사회적인 문제가 제기되자 상아의 공급도 어려워졌다. 이때 뉴욕의 당구공 업자들은 누구든 상아를 대체하기에 적절한 물질을 가져오면 1만 달러를 주겠다는 신문 광고를 냈고, 그것을 본 존 웨슬리 하이엇은 1869년 '셀룰로이드'를 만들었다.

셀룰로이드로는 최고급 상아로 만든 물건처럼 보이는 모조품을 쉽게 만들 수 있었다. 부자들의 오락이었던 당구가 서민의 오락으로 발이 넓어졌고, 당시 부잣집 처자들만 꽂았던 장식용 머리빗도 저렴하게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젠 머리빗을 사기 위해 금시계를 팔 이유가 없어졌다. 플라스틱은 새로운 사회를 열었다. 즉 소비의 대중화, 소비의 민주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코끼리도 살아남았다.

많은 사람들은 보통 '화학', 'chemistry' 같은 단어에 혐오감을 보인다. '천연' 또는 '자연'과 반대되는 이미지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천연자원을 공급하는 동식물의 고갈을 막아 준 것은 바로 화학이었다. 그 중에서도 플라스틱이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플라스틱은 자연의 파괴자가 아니라 자연의 수호자인 것이다.

지금 내 책상 위에 있는 물건 가운데 플라스틱 제품은 스마트폰, 스탠드램프, 명함 갑, 클립 케이스, 필통, 볼펜, 에딩 펜, 클립 디스펜선, 아스피린 병, 핸드크림 튜브, 스피커, 크리스마스 실 포장지, 마우스, 칼, 도장, 약 포장, 저금통, 인주 케이스, 물병, 가위, 안경, 안경 갑, 결재서류첩, 탁상달력, 난방기 리모컨, 키보드, 북마크……. 음, 플라스틱이 아닌 것을 세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우리는 플라스틱으로 일하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옷을 입고, 플라스틱 병에 담긴 음료를 마시며, 플라스틱 차를 타고 움직이고, 플라스틱 가구 속에서 산다. (나는 심지어 눈 주변의 뼈 일부도 플라스틱으로 대체해 놓았다.)

하지만 우리는 플라스틱 속에 살면서도 그 존재에 대해 잘 인식하지 못하며 그 정체에 대해 잘 알지도 모른다. 플라스틱은 어떻게 탄생하였고,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고, 플라스틱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플라스틱 사회>는 플라스틱의 역사와 문화, 과학, 경제 그리고 정치에 관한 이야기다.

프라인켈은 수많은 플라스틱 제품 가운데 여덟 가지 물건을 선택하여 이야기를 풀어간다.

(1) 머리빗 - 플라스틱이 가져온 소비의 대중화
(2) 의자 - 플라스틱의 미학
(3) 프리스비 원반 - 플라스틱의 글로벌 생산 시스템
(4) 링거백 - 플라스틱과 건강
(5) 라이터 - 플라스틱이 야기한 버리는 문화
(6) 비닐봉지 - 플라스틱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
(7) 페트병 - 플라스틱의 재활용과 그 한계
(8) 신용카드 - 플라스틱과 관련한 기대와 우려

플라스틱은 디자이너들에게 매력적인 소재다. 천연 소재로는 도전하지 못했던 디자인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꿈의 물질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나무나 가죽으로는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의 의자에 앉는다. 사람들은 플라스틱은 무조건 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싸게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여 플라스틱 생산에도 '세계화'가 도입되었고, 평생 해변에서 원반 던지기 따위는 해 본적이 없는 노동자들이 프리스비 원반을 생산한다. 플라스틱 하면 '내분비 교란 물질' 또는 '환경 호르몬'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만 병원 역시 플라스틱 왕국이다.

플라스틱이 없던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불과 얼마 전이 바로 그런 세상이었다. 낡은 옷은 수선하고, 더 낡으면 해체해서 다른 옷을 만들고, 그래도 더 낡으면 걸레로 썼다. 부서진 물건은 수리하고, 부품을 떼어서 보관하고, 고물로 팔았다. 그런데 플라스틱이 '버리는 문화'를 만들었다. 플라스틱은 괜히 쓸데없는 포장재가 되기도 하고 한 번 쓰고 버려지는 라이터가 되기도 한다.

재활용도 쉽지 않다. 플라스틱은 저마다 성질이 다른데 그 많은 종류대로 분리해서 수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플라스틱 쓰레기가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분리된 후 재활용 할 수 있는 알갱이로 변하여 다시 미국으로 오는 에너지 고소비 순환계가 만들어진다. 내 지갑에는 현금 대신 플라스틱이 들어 있다. 이 중에서 한두 개 빼고는 왜 있는지 모른다. 대개 몇 년 있으면 새 카드가 자동으로 날아온다. 그러면 옛 것은 버린다. 종이돈 찍는 것보다 플라스틱 돈 찍는 게 과연 친환경적일까?

프라인켈은 플라스틱의 역사, 문화, 정치 등을 살펴보자고 <플라스틱 사회>를 쓴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플라스틱과 더불어 잘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플라스틱은 낭비하기에는 너무 가치 있는 물질"이라는 것이다.

열흘 후면 크리스마스다.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아내에게 성탄절 선물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뭔가 해야겠다. 어떻게 무엇을 살까? 뽀글이 파마를 한 아내에게는 빗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 세상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물건은 수없이 많고, 내게는 아직 열두 장의 플라스틱 카드가 남아 있으니 뭐가 걱정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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