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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된 지도자의 시체…그는 신이 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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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된 지도자의 시체…그는 신이 되려 했다! [3인1책 전격수다] 존 그레이의 <불멸화 위원회>
<어머니>(막심 고리키 지음, 최윤락 옮김, 열린책들 펴냄)로만 고리키를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충격받을 것이다. 불의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는 주체적 노동자의 이미지를 영원히 각인시켰던 <어머니>와 달리, 고리키의 다른 저서들에는 음울한 예언자의 모습이 배어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인간을 기계라고 상상하는 편을 좋아한다. 소위 '죽은 물질'들을 정신의 에너지로 스스로 바꾸어 내고, 먼 미래에는 세계 전체를 순수하게 정신적인 어떤 것으로 바꾸어 낼 기계로 말이다. (…) 미래에는 인간에 의해 흡수된 모든 물질이 인간의 두뇌에 의해 단 하나의 에너지, 즉 정신적인 에너지로 바뀔 것이다."

SF 소설의 한 구절처럼 들리는가? 그렇다면 당장 존 그레이의 <불멸화 위원회>를 펴 드시길. '유령과 볼셰비키, 그리고 죽음을 극복하려는 이상한 시도'라는 부제처럼, 이 책 곳곳에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영국과 러시아에서 불멸을 꿈꿨던 온갖 인간 군상들의 처연하고 어리석고 야심찬 계획들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고리키는 그 중 한 명에 불과하다.

도서평론가 이권우(한양대 특임교수), 서평가 이현우(필명 '로쟈'), <프레시안> 기자 김용언 세 명이 다양한 주제의 책들을 선정하여 같이 읽고 토론하는 자리, '3인 1책 수다'에서 준비한 12월의 책은 존 그레이의 <불멸화 위원회>였다. 책 수다는 인터넷 매체 (☞바로 가기)에 동시 게재된다. <편집자>

▲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용언, 이현우, 이권우. ⓒ프레시안(최형락)

이권우 : 과학이 불멸을 꿈꾼다, 는 의미의 제목에 확 끌렸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맞닿은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현재에 대해서는 한 챕터에만 나오고, 20세기 초의 영국과 러시아 이야기가 훨씬 많이 나와서 놀랐어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불멸화 위원회>(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가 제 성향에 잘 맞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고리키 같은 유명 인사들에 대해 너무 많은 곁가지들이 나오더라고요.

김용언 : 그런 곁가지나 여담이 원래 재밌잖아요.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실제 있었던 에피소드가 줄줄이 등장하는데 저로서는 완전 열광이었습니다.(웃음)

이권우 : 누가 이 책 보면 에피소드 몇 개를 끄집어내서 영화로 만들고 싶을 것 같더라고요. 자, 그럼 <불멸화 위원회>를 애독한 김용언 기자가 먼저 시작해보시죠.

김용언 : 저자 존 그레이는 영국에서 2008년까지 런던 정경 대학에서 유럽 사상 교수로 재직했고, 정치철학이 전공이며 일종의 부전공처럼 분석철학과 사상사까지 아우르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한국에 나왔던 책이 <불멸화 위원회>를 비롯해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환상>(김영진 옮김, 창 펴냄), <추악한 동맹>(추선영 옮김, 이후 펴냄),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 등 네 권입니다.

<불멸화 위원회>에 초점을 맞춰보자면 근대 자체가 실상 전근대라 일컫는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근대에 대한 열광이 판타지에 불과하다 내지는 흔히 과학이 종교의 억압이라든가 무지몽매한 미신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한 무엇으로 칭송되었지만 사실 그 뿌리가 종교와 신화에서 거의 한 발자국도 못 나갔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유토피아에 대한 판타지의 허상을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깨뜨리는 작업을 하는 저자 같습니다.

<불멸화 위원회>는 아마 번역된 책들 중에서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책 같은데요, 거의 SF 소설이나 고딕 호러 소설을 읽는 것 같아요.(웃음) 영국과 러시아의 엘리트들이 너무나 진지하게 불멸을 꿈꿨던 황당무계한 실화들을 엮어가면서, 저자의 주요 관심사였던 인류의 어리석음, 다시 말해 과학이라는 이름을 빌미로 한 어리석음을 질타하는 책입니다.

영국 파트에서 가장 재미있는 건 아무래도 서유럽의 온갖 유명 인물들이 유령과의 통신을 진지하게 믿고 시도했다는 부분일 텐데요.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이라든가 소설가 헨리 제임스의 형, 또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 등이 심령주의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불멸화 위원회>에서는 중요하게 언급되진 않았지만, 사실 셜록 홈즈를 탄생시킨 작가 코난 도일도 이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심령주의 뿐 아니라 요정에도 애정을 기울였죠.(웃음) 어떤 잡지에 요정 사진이 실리면 이 요정은 진짜다 아니라를 확인해주는 역할을 진지하게 수행했어요.

지금에서야 황당하게 느껴지지만, 생각해보면 18세기 말 19세기 초만 해도 미신과 신화가 대부분 사람들의 삶 속에 너무 자연스럽게 배어있었기 때문에 그 존재를 딱히 의심하지 않았잖아요. 다만 과학이 발흥하고 계몽주의가 스며들면서, 미신을 아예 부정할 게 아니라 한번 과학적으로 입증해보자는 욕망으로 방향을 바꾼 게 아닌가 싶습니다. 코난 도일은 자신의 본업이 탐정 소설이 아니라 역사 소설이나 탐험 소설 쪽이라고 생각했지요. 당시 탐험 소설이라는 게 영국 백인들이 미지의 대륙을 탐험하면서 자신들의 '올바른' 이상을 전파시키는 역할을 재구성한 내용물이거든요. 아마 미신과 신화의 영역도 그런 계몽주의의 탐험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았을까요?

<불멸화 위원회>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을 바로 그런 측면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불멸을 꿈꿨던 이들 모두가 자신들의 뿌리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라고 여겼지만 존 그레이는 첫 장에서부터 '그게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주장한다는 점이죠. 흔히들 하는 오해와 달리 다윈의 이론은 지속적인 진화 과정을 거쳐 완전체로 나아간다는 데 있지 않아요. 인간도 다른 동물과 다르지 않은 하나의 종(種)일 뿐이며 우연에 의해 인간들의 삶이 결정되었다는 쪽에 가깝지요.

이권우 : 워낙 에피소드가 다양하고 곁가지로 많이 새어나가기 때문에 자칫 <불멸화 위원회>를 오해할 수 있는데요. 저자가 일관되게 말하는 바는 이겁니다. 과학과 주술 혹은 심령주의가 많은 면에서 관련을 맺어왔다는 것.

▲ <불멸화 위원회>(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 ⓒ이후

이 책의 1장 '교차 통신, 유령과 나누는 대화'를 보면 영국인들이 심령주의에 빠진 건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에 대한 거부감 때문입니다. 인간 진화의 결과가 필멸이라면 그것은 수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심령주의를 통해 인간 정신의 불멸을 추구하며 더 완벽한 존재로 진화할 수 있다는 믿음에 빠진 거죠. 이 믿음을 바탕으로 빅토리아 시대 사상가들이 각종 실험을 펼쳤고요. 과학의 성과가 잘못 수용됐을 때, 어떤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는지 목도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말 유명한 실존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인 인물은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였습니다. 다윈보다 먼저 진화론의 비밀을 알아낸 사람이고, 이후 다윈 스스로가 자연선택의 공동 발견자라고 공공연하게 인정했던 사람이거든요. 이 사람마저도 결과적으로 심령주의에 빠졌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우리는 한 진보 지식인이 보수주의로 회귀할 때 벌어지는 정신적 파괴에 익숙하죠. 이 책에선 과학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지적 파산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의미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성주의나 과학적 세계관의 뿌리가 얼마나 허약한지 알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이현우 : 예전에 존 그레이의 전작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를 아주 흥미롭게 읽었더랬습니다. '호모 라피엔스'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인용한 제목인데, 한자로 '추구(鄒狗)'라고 하죠. 볏짚으로 만든 개인데요. 제사 때에는 귀하게 다뤄지지만 제사가 끝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존재를 뜻합니다. 저는 그 책의 서평을 쓸 당시 '우리 시대 쇼펜하우어의 제안'이라고 제목을 붙였어요. 존 그레이가 최근 지젝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적인 글을 써서 둘 사이에 논쟁이 붙기도 했는데, 저 혼자 그린 그림으로는 '우리 시대의 헤겔 대 쇼펜하우어의 대결' 이런 구도가 아닌가 싶더라고요.(웃음)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에서 존 그레이는 굉장히 염세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를 견지합니다. 원래 자유주의 철학자로 출발했는데 최근에 와서는 입장이 많이 달라지면서 보수와 진보 양쪽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거 같아요. 그런 포지션조차 쇼펜하우어와 닮았죠.(웃음) 물론 존 그레이의 책은 불편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요긴한 영감과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저자여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저자입니다.

<불멸화 위원회>는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영국과 러시아의 지식 엘리트가 공통적으로 빠졌던 지적 함정, 불멸을 꿈꿨던 일종의 역사성을 다루죠. 인간은 다른 동물과 똑같이 유한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다윈주의의 충격이 유럽을 강타했을 때 기독교가 갖고 있던 내세에 대한 믿음 자체가 완전히 제거되진 않았지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돌아옵니다. 영국에선 내세의 유령들이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다, 러시아에선 세상을 먼저 떠난 이들을 우리가 구원해야 한다는 믿음으로요. 두 가지 다른 양상의 대조를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권우 : 영국에서의 심령주의는 다윈주의 충격에 대한, 과학으로 무장한 세속주의의 대응 같아요. 구체적으로 34쪽을 보면 "인간과 지각 능력을 가진 모든 존재들이 그토록 기나긴 진보의 과정을 기껏 거치고 나서 완전히 소멸할 운명에 이른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이다. 하지만 인간 영혼의 불멸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계의 소멸이 그리 끔찍한 전망으로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나오죠. 이 구절이 영국 심령주의자들의 기본적 속성 같아요. 우리 육체가 불멸한다는 게 아니라 영혼이 사후에도 지속된다는 것, 이 사후에 지속하는 영혼이 계속 진화한다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19세기 말 고전학자 프레더릭 마이어스는 "과학은 죽는다는 것이 '더 이상 물리적인 재앙으로 중단되지 않고 무한히 먼 목적을 향해 계속 움직여 나가는 도덕의 진화 과정' 상에 있는 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줄 터"라는 믿음을 가졌지요. 심지어 본인이 죽기 전에 봉인된 편지를 친구에게 남기고, 나중에 유령이 되어 영매를 통해 그 편지와 똑같은 내용의 신호를 보내겠다고 했죠. 결국 같지 않다는 게 드러났지만.(웃음)

김용언 : 영국 심령주의자들의 한계는 엘리트라는 데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다들 좋은 가문 출신의 학자, 교수, 물리학자, 작가 등이었지요. 이 사람들이 꿈꿨던 사후 세계라는 게, 자신들의 그 좁은 귀족 그룹 이외의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잖아요. 상류층 사람들이 그 상류층의 삶을 사후에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이미 19세기 말에 이르면 자신들이 누려왔던 특권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어떻게든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이었을 텐데, 자신의 계급이 사라지고 있다는 상황에 대한 불안한 예감도 심령주의 부흥에 크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이권우 : 맞습니다. 101쪽에 보면 유령과의 교차 통신에 '정신적 우생학' 실험이 포함되잖아요. 우생학은 결함을 없애는 걸 목표로 하는 학문입니다. 심령학자들은 사후 육신에 결함이 없을 거라고 믿었고요. 그러니까 양쪽 모두 과학의 어떤 성과를 받아들이면, 인류가 과거에 발생한 그 어떤 수준보다도 더 높이 다다를 수 있다고 믿었다는 거지요. 우생학이 대체로 엘리트 중심이고 지배권력 중심이다 보니까, 심령주의에 빠진 인물들도 엘리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영국인들의 불멸의 꿈은 엘리트 중심 우생학이 심령주의와 얽히면서, 다윈의 결과를 왜곡시키고 그에 저항하려 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 이현우. ⓒ프레시안(최형락)
이현우 :
이 책에선 영국과 러시아의 공통점으로 진보에 대한 관념을 꼽지요. 지금이야 모두들 진보와 진화가 다르다고 얘기하고, 진화의 동력이라는 건 우연하게 환경에 적응하는 계기에 따라 진행된다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죠. 당시에는 그런 관념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관념 자체를 전부 폐기하지 못했지요.

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에선 마르크스적인 진화론을 종교적 관념과 결합시켜요. 부르주아 사회가 폐기된 이후에 새롭게 도래될 사회라는 건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은 사회이고, 그 사회주의적 인간 자체도 훨씬 더 나은 인간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팽배합니다. 흥미로운 건 '더 나은 인간'의 조건 중 하나가 죽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는 겁니다. 러시아 작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도 얘기했지만, 죽음은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간주됐어요.

이권우 : 책 53쪽에 보면 그렇게 왜곡된 방향으로 대중화된 진화론에 대해 나옵니다. "진화에 완전함을 향해 가는 경향이 내재"되어 있으며 "진화는 하등한 생명 형태에서 고등한 생명 형태로 가는 과정"이라는 속설 말이죠. 그걸 퍼뜨린 대표적 인물이 허버트 스펜서와 프랑스의 생물학자 라마르크라고 지적합니다.

이현우 : 오늘날에도 통속적으로 많이들 그렇게 오해를 하지요. 라마르크 식 유물론, 스펜서 식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요. 보통 우파 이데올로그들도 적자생존이 진화의 핵심이라고 주장하잖아요. 이 라마르크 진화론은 러시아의 스탈린 시대에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수용됩니다.

책에 언급된 유명한 예로 농학자 트로핌 리센코가 나오지요. 사실 다윈 식 진화에는 이념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어요. 하지만 인간이 의도적으로 개입하여 자연의 유전적 특성을 바꾸면서 개선시키고 발전시킨다는 노력에 라마르크 식 진화설이 잘 들어맞기 때문에, 리센코는 바로 그 라마르크 식 진화론을 채택합니다.

다윈주의 진화론을 신봉했던 생물학자들은 리센코의 정적으로 간주되어 전부 숙청당해요. 특히 세계적인 육종학자였던 니콜라이 바빌로프도 그 와중에 희생당하고요.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심각한 식량난을 해결을 못 했고, 소련의 생물학은 약 30년 동안 퇴보 상태에 머무릅니다. 이념적으로 옳은 것, 이념적으로 받아들이기 좋은 것, 실제 과학적 진실 사이에는 간극이 있는데, 그 중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을 때 얼마나 큰 재앙의 결과를 맞게 되는지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러시아 작가 보이노비치의 소설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마추어 생물학자인 한 등장인물이 육종 개량 시험을 하는데, 그 프로젝트 이름이 '사회주의로의 길'이에요. 토마토 줄기에 감자 뿌리를 결합시켜 아래는 감자가, 위에는 토마토가 열리게 하는 거죠. 절반의 성공을 거둡니다. 감자 줄기에 토마토 뿌리로.(웃음) 현실 사회주의 실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는 동시에 리센코주의의 비판이기도 해요.

이권우 : 방향이 자연스럽게 러시아 쪽으로 넘어왔는데요, 러시아의 불멸의 의지에는 건신주의(建神主義)가 결합되어 있다는 얘기가 나오지요. 건신주의가 정확히 어떤 건가요?

이현우 :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신을 만들어야 한다' 내지는 '우리가 신이다'라는 믿음입니다. 그게 함축하는 바는 '신이 아니면 인간도 아니다'라는 거지요.(웃음) 바로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강철 인간' 정도는 돼야죠.

러시아 혁명기 때 문화적으로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가 '새로운 인간'이었어요. 어떻게 '새로운 인간'이 될 것인가, 내지는 어떻게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낼 것인가. 이건 니체 식 초인(위버멘쉬)이기도 합니다. 1900년대 초 러시아에서 니체주의가 굉장한 반향을 얻었어요. 그들을 매혹시킨 건 초인 혹은 새로운 인간에 대한 관념이었고, 볼셰비키 역시 모든 인민이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혁명 이후 무자비한 학살 내지는 죽음에 대한 방조가 벌어진 상황의 이념적 배경은 바로 그겁니다. 레닌과 트로츠키, 스탈린 모두 공통적으로 대단히 무자비했습니다. 특히 농민 계급에 대해서요. 우크라이나 대기근 때 500만 명 이상이 아사했는데 죽어 마땅하다며 일부러 방치했어요.

이권우 : 러시아 혁명사를 살펴보면 혁명 이후 농민들이 식량을 안 내놓았잖아요. 그 문제와 관련된 조치였던 건가요?

이현우 : 그렇진 않습니다. 농민은 노동자들과 다르게 취급되었어요. 러시아 혁명 자체가 노동자들의 연대 혁명으로 설명됩니다. 깃발에도 망치와 낫이 그려져 있잖아요. 망치가 노동자 계급을 상징하고 낫이 농민 계급을 상징해요. 볼셰비키 혁명가 내에는 노동자들이 많이 포함되었지만, 국민 전체적으로 봤을 때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었어요. 그들만으로는 러시아 사회 전체를 전복할 수 없기 때문에 농민들의 연대가 필요했던 거죠.

당시 농민들이 혁명에 동조했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런 거예요. 그동안 귀족 계급에 예속되어 자기 땅을 가질 수 없었거든요. 농노 해방 이후에도 남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을 전전했는데, 세상이 바뀌면 자기 땅을 소유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에 동조했던 겁니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고 난 뒤에는 상황이 달라져요. 부농을 러시아 어로 '쿨락(kulak)'이라고 하거든요. 주먹을 뜻하는 '쿨락'에서 나온 말이지요. 무얼 쥐고 있는 계급이에요. 바로 농민들의 땅에 대한 기본적인 소유욕을 뜻하는 것이고, 그런 본성으로는 새로운 인간이 될 수가 없다는 주장이 대두됩니다. 결과적으로 농민은 새로운 사회의 적으로 간주되고 치밀하게 척결이 추진됩니다.

일단 계급을 나눠요. 부농, 중농, 빈농. 맨 처음엔 부농 척결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어요. 그런데 기준이 참 애매합니다.(웃음) 자기가 경작할 수 있는 이상의 땅을 소유하고 있으면 무조건 부농입니다. 작으나마 자기 땅을 가졌거나 말 한 필이라도 소유하고 있으면 무조건 중농입니다. 빈농은 진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고요. 나중에 빈농 빼고 대부분이 계급의 적으로 타도 대상이 돼 숙청당합니다. 소유욕은 부르주아적 근성이며 이기적 본성이고, 그런 본성을 다 제거해야만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민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프레시안(손문상)


이권우 : 이 건신주의라는 게 러시아의 전통적 영지주의와 관련 있다고 나오는데요. 여기에는 어떤 배경이 있나요?

이현우 : 러시아 종교철학자 중 니콜라이 표도로프(책에는 페도로프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원발음은 표도로프이다.-편집자 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이 사람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불멸화 위원회> 186쪽에 잘 나오는데, 표도로프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임무는 모든 죽은 자들, 우리가 잃은 모든 사람들, 우리의 아버지들과 선조들을 그들의 아들로서, 그들의 후손으로서, 우리가 되살려 내는 것"입니다. 영국하고 좀 다르게, 영혼만 계속 존재하는 게 아니라 육신까지도 되살릴 수 있다고 하지요. 이런 러시아 정교가 사회주의와 결합했을 때,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부활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게 되죠.

인간을 극대화하고 과대평가하면 '인간은 신'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잖아요. 인간은 신에 가까워지는 존재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우리가 신이 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생겨나요. 상대적으로 평균적 인간에 대한 과도한 비판이 생겨나고요. 아이러니합니다.

자본주의의 강점은 인간에 대한 과소평가입니다. 인간은 다 하찮은 존재들이고 굉장히 속물적이고 천박하고 이기적인 존재라는 관념. 한편 이게 자본주의의 성공 비결이기도 하죠.(웃음) 반면 사회주의는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바람에, 현 수준의 인간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고 강철 같은 인간, 새로운 인간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 중 대표적 사례가, 이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노동 영웅 운동이지요. 스타하노프 운동 같은 것이요. 스타하노프는 탄광 노동자였는데 열 몇 명 어치의 일을 혼자 해냈어요. 사회주의에는 인센티브가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혼자 대가 없이 그런 일을 해냈다는 점 때문에 인민 영웅이 되고 다른 노동자들의 모범이 됐죠. 당신이 스타하노프처럼 탄을 못 캐내는 건 열의가 부족해서고 당성이 부족하고 혁명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근거가 가능해지니다. 새로운 착취의 방식이죠. 너는 이렇게 대단한 걸 할 수 있는 존재라면서 거꾸로 인간에 대한 굉장한 억압을 가하는 겁니다.

▲ 이권우. ⓒ프레시안(최형락)
이권우 :
심지어 우주 진화론까지 나오잖아요. 176쪽에서 러시아 우주공학의 할아버지라 불리는 콘스탄틴 치올콥스키는 "우주 공간에서는 인간이 스스로를 죽음에서 해방시킬 수 있"으며 "인간을 완전하게 만들고 불완전한 생명 형태들을 일소"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요. 우주에서는 "인류의 진보는 영원하다. 우리는 의심의 여지 없이 불멸을 얻게 될 것"이며 "하등한 생명 형태(식물, 동물, 갱생의 의지가 없는 인간)은 뒤에 남겨지거나 박멸될 것"이라고도 했고요.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성과 속>(이동하 옮김, 학민사 펴냄)을 보면 마르크스주의는 유태인적인 종교의식의 새로운 변형이라고 나와요. 메시아 사상이잖아요. 프롤레타리아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유토피아의 실현을 주장하니까요. 유물론적인 물질주의적 사고와 현실적인 변혁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종교적 심성이 배어있다는 게 엘리아데의 결론입니다. 어릴 땐 그 구절만 해도 충격적이었는데, <불멸화 위원회>에서 드러나는 건신주의와 공산주의의 결합은 더 큰 충격입니다.

이현우 : 하지만 자본주의도 그런 시도를 하잖아요? 생명 연장의 꿈이라는 또 다른 불멸을 상업화하고 있지요. 방금 말씀하신 내용은 존 그레이의 <추악한 동맹>에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천년왕국설이라든가 유토피아주의가 현대 정치와 어떻게 연관되었는지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런 정치신학이 20세기 비극의 주된 원인이라고 고발하지요. <불멸화 위원회>도 그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쓰인 거고요.

이권우 : 정치적 유토피아는 대체로 현실에 대한 유예를 전제 조건으로 하죠. 먼 미래에 더 큰 행복을 줄 테니 오늘의 삶의 궁핍함을 감내하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대체로 유토피아는 전체주의로 귀결되게 되어 있거든요. 그 부분은 이해할 수 있지만 건신주의는 여전히….(웃음)

이야기의 방향이 현대로 넘어오면서 <불멸화 위원회> 3장에는 불멸을 꿈꾼 재미있는 인물이 또 하나 등장합니다. <특이점이 온다>(장시형·김명남 옮김, 진대제 감수, 김영사 펴냄)의 저자 레이 커즈와일이요. 그가 쓴 다른 책 <영원히 사는 법>(레이 커즈와일·테리 그로스먼 지음, 김희원 옮김, 승산 펴냄)은 과학이 불멸을 가능케 할 때까지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을 쓴 책인데요, 아까 이현우 선생님이 언급했던, 자본주의가 꿈꾸는 불멸과 직접적으로 맞닿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자본주의의 불멸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볼까요. 영국과 러시아의 불멸은 과학을 바탕으로 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심령주의나 건신주의에 지나지 않았는데요.

이현우 : 그걸 과학이라고 생각했던 건데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유사과학이 된 거죠.

이권우 : 그에 비해 지금은 아예 과학을 내세우잖아요. 우리 몸 속 장기 중 하나가 손상되면 다른 세포에서 새로 만들어내어 갈아 끼우는… 우리 몸을 자동차 부품처럼 갈아 끼우면서 불멸을 지향하는 거겠지요.

이현우 : 불로장생의 꿈은 사실 오래됐죠. 진시황 때부터.(웃음) 이를테면 20억 원 정도 든다는 전신성형도 그 카테고리에 속할 텐데요. 기술적으로 완벽하진 않지만 조금씩, 가령 피부 노화를 방지하는 등의 방식은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필멸성의 중요한 특징인 고유함을 제거해버린다는 게 있어요. 우리는 신체의 유한성에 구속되는 존재인데, 그 신체를 다른 기계장치 등과 결합된 새로운 형태로 바꿈으로써 우리의 존재양식이 조금 달라집니다.

이권우 : 자본주의적인 불멸의 특징이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혼이나 정신의 성숙, 완성태로서의 도정에는 관심 없이 육체 자체로서 불멸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는 거지요.

김용언 : 심지어 그 불멸하는 육체는 젊음을 유지하는 거잖아요. 노년 상태로 건강하게 오래 살다기보다 아름다움의 틀을 계속 유지하려는 욕망입니다.

이권우 : 그렇지요. 건강하고 좋은 상태로 육체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너무 철저한 물질주의로 느껴집니다. <영원히 사는 법>은 불멸이 가능한 시대까지 우리가 장수해야 하기 때문에 그 혜택을 받기 위해 건강하게 장수하는 비결을 전달하지요.

이현우 : 그 상태 그대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인체 조직이 재구성이 되는 거죠. <불멸화 위원회> 249쪽을 보면 "생물적 조건에는 내재적인 한계가 있으며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면 (…) 인간의 생물학적 육신, 그리고 뇌의 모든 조직과 시스템을 재조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커즈와일의 주장이 나옵니다. 현재 우리의 생물학적 조직 자체는 유한하기 때문에 다른 걸로 교체되거나 재구성해야 되는데, 그 과정에서 현재 나를 구성하고 있는 조건으로서의 생명 형태는 소멸되는 거죠. 모든 불멸화 프로그램이 기본적으로 인간 소멸로 귀결되는 겁니다.

이권우 : 250쪽에서 이야기하는 "기계-인간 혼합"을 말씀하시는 거죠?

이현우 : 네. 저자가 영국 심령주의를 비판하는 부분에서도 그런 언급이 등장하죠. 그들이 공유했던 전제는 사후 영혼이 살아있을 때의 기억을 똑같이 보존한다는 것인데, 그레이는 육체 없는 유령에게 자아의 동일성이 어떻게 계속 유지가 되는 건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커즈와일이 주장한 "포스트 휴먼"에 이르면 인간에 대한 정의 자체가 달라져야 하는 겁니다. 예전의 '나'가 아닌 다른 인간이 되는 거거든요.

저자는 커즈와일의 주장 역시 영국인이나 러시아인들처럼 똑같이 헛된 망상에 기초했다고, 겉보기에만 현실적이고 기술적으로 구현 가능한 듯 포장했지만 핵심적인 전제는 공유하고 있다고 비판하지요. 사실 영국이나 러시아의 사례를 보면서 독자들은 "참 이상한 사람들이었네"하고 거리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지금의 우리가 그들과 똑같은 기대를 품고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데 대한 경종이랄까요.

저자는 다윈의 주장을 철저하게 수용합니다. 인간에 대해 어떤 환상도 갖지 않고, 인간은 동물 이상의 존재이며 신과 같은 존재라는 형이상학적 규정에서 벗어나라고 권하죠. 그렇지 않으면 계속적으로 이같은 주술적인 관념에 빠져있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 김용언. ⓒ프레시안(최형락)
김용언 :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에선 가이아 이론이 다윈주의와 잘 맞는다고 평가하면서, 철저하게 자연의 관점에서 이야기해야지 거기에 인간의 이념이 들어가면서부터 망가진다는 언급도 나옵니다.

이권우 : 결국은 지금의 과학도 말하자면 속류 진화론에 입각한 거라는 결론이네요. 전 <불멸화 위원회> 3장에 이르러서 비로소 저자에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계급의식이 반영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국의 심령주의자들이 주로 엘리트들이었고, 러시아에서도 볼셰비키라는 당 관료 엘리트들이 건신주의를 주도했다면, 오늘날 불멸을 꿈꾸는 사람들도 자본을 중심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더 많은 부를 획득한 사람들이 돈의 힘으로 과학을 사서 자기 생명을 연장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는 거죠. '특이점'에 이를 수 있도록 삶을 연장하려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속해 있는가, 영국이나 러시아와 다를 바 없는 오늘날 불멸화 위원회의 구성원들이 누구인가.

268쪽에서 크게 감동받은 대목이 있어요. "죽음은 걱정과 염려에서 해방된다는 뜻이다. 죽음이 올 때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리고 죽음이 늦도록 오지 않을 때 빨리 오라고 손짓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가 인간일 수 있는 건 필멸의 존재이기 때문이고, 필멸이기 때문에 니체가 말한 '운명애'도 우리가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필멸을 전제로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충실하게, 의미 있게 살아가려고 노력하지요. 불멸이 유토피아에 대한 꿈이라면, 필멸은 좋은 의미에서의 현실주의라고 봅니다.

이현우 : 슬슬 맺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네요. 상대적으로 영국 이야기를 너무 안 한 것 같아 조금만 덧붙일게요. 심령주의자들이 유령에게서 온 메시지라고 주장했던 교차 통신 텍스트 이야기가 107쪽에 많이 나오지요. 재미있는 건 이 문서들이 대부분 빅토리아 시대의 유물이라는 거예요. 당사자들이 엘리트들이기 때문에 문서들 내용이 다 고급스러워요. 비유와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죠.(웃음)

그 다음 저는 불멸에 이권우 선생님 말씀에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저자의 회의주의나 염세적 세계관에 대해 좀 동의하기 힘든 부분도 분명 있어요. '그럼 뭐냐'라는 질문을 던지게 돼요. 인간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가져선 곤란하다는 반 휴머니즘의 결론을 내려버렸으니까요. 지금의 현실을 지배하는 사회적 구조에 대해 뭘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안도 하지 않아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판으로선 대단히 효과적인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꿔나가려는, 바꿔나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조건들이 있고 그런 시도들이 갖는 의미가 있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한계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김용언 : 제가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건 사소하다 싶은 디테일들인데요. 아마 존 그레이가 <불멸화 위원회>를 쓰면서 주제에 맞는 이야기만 해야 하니까 일부러 빠뜨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영국에선 영혼의 불멸에 대한 이야기로만 채웠는데요, 사실 영국은 19세기 초에 이미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그의 괴물이 등장한 나라잖아요.(웃음)

<프랑켄슈타인>은 과학과 의학이 움트기 시작한 시기에 인간이 신 같은 입장에서 또 다른 존재를 창조할 수 있다는 기대에서 비롯된 공포 소설이었고, 이것이 한참 후에 로봇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지지요. 소련의 건신주의가 이 지점과 맞닿는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인간 자체가 신이다'라는 명제가 인간 육체의 불멸 뿐 아니라 또 다른 존재를 창조할 수 있는 위치라는 뜻도 포함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에서 시작된 전통과 건신주의를 함께 얘기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구요.

유토피아의 꿈은 특정 시기에 대단히 활성화됩니다. 심령주의가 인기를 얻었을 당시 영국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전환기였고, 러시아의 경우는 본인들이 혁명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는 꿈에 부푼 그 시기에 맞춰 건신주의가 대두됐어요. 그럼 만일 지금 우리 입장에서 비근한 예를 찾는다면 언제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로 넘어오던 그 전환기가 아닐까 싶었어요. 당시 각종 대중문화에서 굉장한 흥분과 공포와 기대감에 젖어 생산했던 콘텐츠들을 이 책에 비추어 새롭게 다시 얘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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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 ⓒ이후
제가 이런 자리에서 너무 오타쿠 같은 발언을 하는 것 같은데(웃음), 이를테면 당시 큰 영향을 미쳤던 작품이 일본의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거든요. 거기 나오는 말도 안 되는 설정들이 <불멸화 위원회> 영국 쪽 이야기와 신기할 만치 닮았어요. 이 책 54쪽에 보면 심령주의자 중 한 명인 에드워드 거니의 경우 "사라지지 않는 최악의 고통을 달랠 수 있는 희망의 여지가 없다면 (…) 차라리 인간 종 전체가 당장 소멸하는 편을 바라겠다"라는 글을 남겼어요. 고통 없는 영혼에 대한 이들의 희구가 1990년대 말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되풀이돼요. 거기서도 돈과 권력이 있는 어떤 권력자들이 '인류 보완 계획'을 세워요. 육체와 영혼 사이에 아무런 장벽이 없는, 모두가 하나가 되는 이상적인 세계요.

1990년대 말 우리가 데이빗 크로넨버그 영화나 재패니메이션에 흠뻑 빠져있던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존 그레이가 얘기했던 영국과 러시아에 이어서 또 다른 '불멸' 버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권우 : 전 과학이 탈주술화에 성공했지만 다시 과학이 주술이 되고 있다는 저자의 메시지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현우 선생님이 지적했던 현실 개선 대안은 거기서 비롯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생각을 놓치는 순간, 과학의 한계라는 함정에 빠지는 게 얼마나 쉬운지, 우리의 인식 토대가 얼마나 허황된 것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지를 절실하게 느꼈고요.

또 필멸이기 때문에 불멸을 꿈꾸는 것과, 불멸을 위해 필멸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 사이에 어떤 큰 차이가 있는지 구분해야 할 것 같아요. 전 그게 예술과 과학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불멸화 위원회 자체의 계급성을 잊지 말아야죠. 문화 엘리트, 정치 엘리트, 자본 엘리트만 들어갈 수 있는 위원회 아니겠습니까. 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은 채 불멸 자체에만 환호한다면, 우리 삶이 더 피폐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긴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나가서 우리끼리 '필멸화 위원회'를 만들어 볼까요.(일동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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