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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전, 조선공산당의 '민주적'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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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전, 조선공산당의 '민주적' 투쟁! [프레시안 books] 임경석의 <모스크바 밀사>
1. 아서원의 결의

지금부터 88년 전인 1925년 4월 17일 오후 1시, 오늘의 롯데호텔 자리인 을지로 입구의 중국 요릿집 아서원 깊숙한 내실에 19명의 청년들이 조용히 모여들었다. 향후 한국현대사에 지대한 파란을 일으킬 조선공산당 결성대회를 열기 위함이었다.

모인 이들은 훗날 남로당의 지도자가 되는 박헌영, 진보당 당수가 되는 조봉암 등 당대 국내 공산주의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서울과 지방의 17개 공산주의자 그룹 130명의 혁명가를 대표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서울에서는 조선기자대회와 조선민중운동자대회가 열려 시내 여관마다 전국각지에서 올라온 반일운동가들로 차있었다. 조선공산당 주도세력이 경찰의 감시를 흩어놓기 위해 일부러 때를 맞춰 소집한 대회들이었다. 당 결성을 직접 준비해온 것은 130명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국내 각지에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사전에 충분한 조율을 거친 공산당 결성대회는 경찰의 기습을 피하기 위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당 규약과 주요 정책안이 가결되고 7명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회를 선출했다. 당의 대표로는 김재봉이 선출되고 공산당의 핵심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의 대표로는 박헌영이 뽑혔다.

특이한 것은 이 대회에서 소련에 파견할 전권위원으로 조동호를, 부전권위원으로는 조봉암을 지명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공산주의운동은 전 세계에 하나의 공산당, 즉 코민테른이라 불리던 국제공산당만이 존재하며 모든 국가의 공산당은 그 지부로 소속되어야 했다. 양 조 씨는 조선공산당의 결성사실을 코민테른에 알리고 이를 승인받아 오라는 중대한 임무를 부여 받은 것이다. 이른바 모스크바 밀사였다.

▲ <모스크바 밀사>(임경석 지음, 푸른역사 펴냄). ⓒ푸른역사
한국공산주의운동사의 중요한 연구자인 성균관대학교 임경석 교수가 쓴 <모스크바 밀사>(푸른역사 펴냄)는 두 전권위원 조동호와 조봉암이 여러 악조건을 이겨내고 조선공산당을 코민테른 조선지부로 승인받기까지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역사학계에 공산주의 연구자가 거의 사라져 버린 오늘에도 꾸준히 묻혀 버린 기록을 헤집어 한국 현대사의 빈 공간을 메우고 있는 임경석 교수는 구 코민테른의 문서 보관서에서 그동안 유추 해석으로만 존재했던 이야기들을 규명해내는 작업에 몰두하는 중이다. 이 책은 그 성과물의 하나로, 저자 특유의 문학적 묘사까지 더해져 흥미진진하고도 생생하게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2. 모스크바의 조선인들

서울에서 모스크바까지 장장 1만 2000킬로미터, 비행기도 없고 두만강 하구까지 가는 기차도 아직 부설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대장정의 임무를 부여받은 두 사람은 경의선을 타고 압록강을 넘어 중국 상해까지 먼 길을 간 다음 배를 타고 다시 한반도를 휘돌아 소련 땅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야 했다. 당시 횡단열차는 모스크바까지 꼬박 11일이 걸렸다.

출발 45일 만인 1925년 6월 21일, 모스크바에 먼저 도착한 이는 조봉암이었다. 그가 가져간 것은 단 두 장의 위임장이었다. 종이가 아닌 헝겊에 타자를 친 것이었다. 삼엄한 일제의 경계를 뚫기 위해 옷의 안감을 뜯어 속에 꿰매 넣고 봉합을 하기 위함이었다.

코민테른에 일국의 공산당으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규약, 강령, 회의록 등 훨씬 많은 서류가 필요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다각적인 검토 끝에 조봉암이 가져온 조선공산당을 승인한다. '잠정적'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으나 사실상 승인이었다.

코민테른에서 승인을 받았다는 소식은 서울의 소련영사관을 통해 국내운동가들에게도 알려져 대환영을 받는다. 그러나 국내의 또 다른 공산주의 조직이던 스파르타쿠스당, 까엔당, 고려공산동맹은 조선공산당이 화요파 등 일부 파벌만으로 이뤄진 연합체에 불과하므로 인정할 수 없다며 강력히 반발한다. 이들은 3개의 항의단을 모스크바로 파견해 승인을 취소하도록 맹렬한 운동을 벌인다.

코민테른은 이 파벌싸움을 정리하기 위해 조선 문제만을 다루는 특별위원회까지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6년 3월까지 계속된 논의는 조선공산당의 완승으로 끝난다. 조봉암, 조동호의 외교가 승리한 것이다.

일국일당제에 따라 여러 파벌들은 존립기반을 상실하고 차츰 당으로 흡수되어 조선공산당은 실질적인 지도권과 대표권을 가지게 된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일제의 치열한 추적으로 공산당 지도부는 네 차례나 대량 검거되는데 그때마다 새로 구성된 지도부에는 이들 비주류파벌이 다수 진출한다.

3. 예속인가, 자율인가?

저자 임경석 교수가 <모스크바 밀사>에서 관심을 집중한 부분은 조선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역학관계이다.

코민테른이 각국 공산당에 대한 승인과 해산권을 갖고 상당한 활동자금을 지원했다는 측면에서 강력한 권한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이에 따라 우리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관점은 조선공산당이 코민테른에 의해 결성되었으며 그 명령에 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최근 발굴한 코민테른 문서들을 통해 이러한 관점을 수정해야 한다고 본다.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고 만든 것이 아니라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스스로 결성해 코민테른을 찾아갔다는 것, 코민테른은 초기서류가 미비함에도 관료적으로 이를 반려하지 않고 조봉암과 조동호의 강력한 요구에 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에 반대하는 여러 파벌들이 모스크바를 찾아오자 이들까지도 일일이 만나 회의를 열고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수개월 간의 검토를 거친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대표들은 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개진한다. 심지어 그들은 보이틴스키 등 조선문제 담당관들에 대한 해임까지 요구한다.

나아가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거부하기까지 한다.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이 조선 국내에 항일빨치산을 양성하도록 결정한다. 중국의 공산유격대와 같은 형태의 투쟁을 유도한 것이다. 이에 조선공산당 집행부는 조선 국내사정을 모르는 얼빠진 소리라며 거부한다. 수십만의 경찰과 헌병, 밀정들로 촘촘히 감시망이 짜인 조선과 드넓은 중국과는 다른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코민테른 역시 이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결정을 철회한다.

반면 코민테른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도 한다. 당시 국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벌이고 있던 반종교운동을 중단하고 종교계와 힘을 합쳐 반제국주의운동을 하라는 결정에 따르는 것이다.

이렇듯 조선의 공산주의자들과 코민테른은 수직적 관계라기보다 서로 협조하고 의견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코민테른의 결정기관인 각종 위원회들은 소련공산당이 결정적 지도권을 가지기는 했으나 세계 각국의 공산주의자들로 이뤄져 나름의 민주적인 절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4. 레닌주의의 전설

<모스크바 밀사>는 조선공산당의 결성부터 승인까지의 한정된 시간만을 다루고 있지만, 이후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의 단서들을 보여주고 있다.

레닌이 만들었던 코민테른은 1943년 스탈린에 의해 해산된다. 따라서 해방 후 한국공산주의 운동은 스탈린 개인의 일방적인 명령에 따르게 된다. 북한의 국가 수립과정, 김일성을 지도자로 결정하는 과정, 한국전쟁의 결정 등에서 스탈린의 역할은 가히 제왕적이었다.

<모스크바 밀사>는 초창기 공산주의 운동의 민주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아득히 사라진 레닌주의의 전설을 되살려주는 책이다. 공산당 내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되 결코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끝없는 투표와 설득으로 끝내 다수파를 차지했던 레닌주의가 아직 살아있던 코민테른을 통해서.

아마도 조선공산당을 후원했던 코민테른 간부의 대다수는 스탈린의 대숙청 기간을 넘기지 못하고 희생되었을 것이다. 당수였던 김재봉을 포함해 조선공산당 간부급 60여명은 일본경찰의 고문으로 죽었지만 박헌영 등 해방까지 살아남은 이들의 다수는 스탈린의 한국판인 김일성에 의해 희생된다. 공산주의 운동에서 레닌주의는 전설로만 남았을 뿐, 스탈린주의가 곧 공산주의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연 혁명은 악마를 키우는 또 다른 방법일 뿐인가?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악마를 잡기 위해 또 다른 악마를 키우는 것이다. 다만 같은 오류를 번복하지 않을 지혜를 믿어야 하리라.

<모스크바의 밀사>에서 조봉암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쓴 편지에서 아내 김조이에 관해 말한다. 김조이는 열성적인 공산당원의 한 사람으로, 코민테른의 주선에 따라 모스크바로 유학 가는 학생 대열에 섞여 있어 조봉암과 길이 엇갈리고 있었다.

"삐와(맥주) 한잔씩 나누고 보니 매우 쾌하올시다. 오는 학생은 내가 못 볼 듯한데, 우리 색시도 못 보면 너무 섭섭할 것 같아요. 나는 못 보더라도 몸 편하고 공부 잘해야 되겠는데…. 정말이지 마누라가 그립소이다."

이 유쾌하고 따뜻한 공산주의자 조봉암은 훗날 스탈린주의에 반대해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 조선공산당과 결별한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을 놀라게 하는 다수표를 얻음으로서 이승만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진정, 혁명은 죽음과 함께 가는 길인가?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죽음이 아니라면 어떻게 혁명가를 아름답게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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