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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빌딩과 헌책방 거리를 지나면, 도시의 맨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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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빌딩과 헌책방 거리를 지나면, 도시의 맨살이! [이권우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강상중의 <도쿄 산책자>
내 주변을 볼라치면 도시의 익명성을 즐기는 이들이 제법 된다. 태생이 도회지인데다 도시로 상징되는 문화를 만끽하며 살아온 덕에 그러한 이들도 있지만, 타고나길 촌놈이건만 도시성에 흠뻑 빠진 녀석들도 있다. 나야 무지렁이 같이 살아온지라 도시하고는 도통 맞지 않는다. 여행을 가면 시골이나 산으로 가지 도시로 가는 법은 없다. 나에게 도시는 벗어나야 할 곳이다.

그런데 이즈음 유행 가운데 하나가 도시 여행인 듯싶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의 역사와 자연을 되짚어보는 이들이 늘고 있다. 하긴 우리네 대도시들만 해도 역사의 지층이 두터운 편이니 확인하거나 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수두룩할 터이다. 더욱이 도시 여행은 번잡하지 않다는 장점도 있다. 비자를 신청할 필요도, 교통수단을 예약하는 수고도 필요 없다. 그냥 짬만 내서 걸으면 된다.

▲ <도쿄 산책자>(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사계절 펴냄). ⓒ사계절
강상중의 <도쿄 산책자>(송태욱 옮김, 사계절 펴냄)에 나온 사진을 보며 도시 여행의 미덕을 다시 확인했다. 넥타이를 매지는 않았지만, 양복차림에 구두를 신은 사진이 많았다. 그런 법이다. 시내를 돌아다니는데, 등산복 입고 운동화로 갈아 신는 번잡을 부릴 이유가 없다. 그냥 가면 된다. 되돌아보면, 이상이나 박태원이 경성을 걸어 다녔을 적에도 이렇지 않을까 싶다. 식민지 지배를 받는 고통의 한편에 근대성의 상징들이 자리 잡고, 이것들의 정체를 골몰하는 우울한 지식인들이 경성을 걸었다. 그것은 사유를 위한 여행이었을 터다. 남아있는 것, 사라지는 것, 지켜야 할 것, 새로운 것에 대한 단상이 끊이지 않았으리라. 거칠게 말하면, 시골이 단층이라면 도시는 복층이다. 도시를 여행하는 이의 사유가 중층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도쿄 산책자>의 부제가 '강상중의 도시 인문 에세이'라 붙은 까닭을 이해할만했다.

이런저런 일로 도쿄에 몇 차례 가본 적이 있다. 혼자 일을 치르거나 여행 삼아 가보지는 않았다. 일 하러 가긴 했으되, 여럿이 어울렸던지라 두루 돌아다닐 수는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도쿄역 앞 풍경이었다. 아마도 근대 지식인들이 배를 타고 일본에 오면 긴 기차 여행을 하고 도쿄에 도착했으리라. 여행에 따른 피곤,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따위로 복잡해진 심정으로 첫발을 내디뎠을 터다. 도쿄역 앞 빌딩 군을 바라보며 나는 식민지 지식인들이 근대라는 것 자체의 압박 때문에 이곳에 오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했다. 식민지에 들어온 왜곡된 근대가 아니라, 도쿄에 만개한 근대의 원본에 대한 강한 갈망 말이다.

그런데 지하도에 들어가니, 그들은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절망에 빠졌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도에는 도쿄역 앞의 옛 풍경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고 있었다. 어쭙잖은 일본어 실력으로 띄엄띄엄 읽어보니, 그 지역은 뉴욕을 본따 건물을 세웠던 지역이고, 전란 중에 파괴돼 재개발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지상으로 올라와 두루 살펴보니 옛 건물들의 형태를 복원해놓은 것들이 보였다. 그야말로 포스트모던하구나 싶었다.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약간의 기이한 모습이어서였다.

어찌하였든 식민지 지식인들은 도쿄역에 내리자마자 원본을 보지 못했다. 근대의 복제본을 보았을 뿐이다. 그럼, 다시 뉴욕으로 가야하나?라고 느꼈을 그 끝없는 절망감이 확 밀려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도쿄를 걷는 강상중도 예의 세련된 '도시남'이다. 이질적인 것들이 섞이고 그래서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역동성이야말로 도시의 한 상징이지 않던가. 그는 도시의 매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결국 이 모두가 자신감을 갖고 싶다는 심리의 표현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모두가 불안감을 안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바로 그 불안 안에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주었으면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누구나 다양한 가능성을 숨기고 있는 '보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감이 없음을 부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소가 바로 '도시'가 아닐까요.

사람은 모르는 타자와 교류함으로써 자신의 새로운 정체를 깨닫게 되는 법입니다. 그때 자신 안에서 자신이 몹시 싫어하는 타자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타자는 무척 가까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도시란 바로 그런 타자를 만나는 장소입니다. "도시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이러저러한 배경이나 과거를 짊어진 사람을 받아들이면서 도시가 구축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도쿄는 넓다. 그곳을 한권의 책에 담기란 버거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곳을 가보고 쓴 글은 짧다. 이 책의 특징이라면 그 제한과 한정 속에서 빚어진 강상중 특유의 수사(修辭)다. 도시 여행기를 밑줄 치며 읽는 경험은 그리 흔하지 않을 법하다. 평소 즐겨 찾던 곳이나, 편집자의 요구로 가본 것, 추억이 어린 곳 등 스물아홉 군데를 다녀온 기록을 여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 실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세 가지 열쇳말이 떠올랐다. 도심 속 성(聖)의 공간과 그 대척점에 놓여 있다고 할 글로벌한 장소, 그리고 두 공간을 잇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스민 곳이라는.

도시의 상징인 마천루를 보노라면, 욕망의 발기라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도무지 사그라질 줄 모르는 욕망이 하늘이라도 닿을 듯한 기세다. 이 아찔한 수직의 폭력성을 완화해주는 수평의 공간이 도시에 숨어 있게 마련이다. 이 책의 1장이 '비일상적인 공간을 찾아서'이고 메이지 신궁이 맨 앞에 나온 것은 상당히 의미 있다. "무기질인 빌딩이 즐비하고 거리도 사는 사람도 획일화되고 심신이 바짝 말라" 가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다들 어딘가에서 마음의 따뜻함, 마음의 성역"을 찾게 마련이다. 그런데 강상중의 예민함은 속(俗)의 세계와 다른 성의 공간을 미술관, 호텔, 연극무대에서 찾아낸다는 데 있다. 일상을 지배하는 질서의 세계가 일시나마 영향력을 잃은 곳은 모두 성이 재현된다 보는 듯싶다. 그가 엘리아데를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일순 들었다.

강상중은 현대 사회에서는 미술이 종교를 대신한다고 본다. "예술이 교환 불가능한 것, 유일무이한 것"이어서 그렇다. 호텔은 일상과 차별화를 이루어 비일상성을 연출하려 공을 들이기 때문에, 연극은 "그 장소에서 단 한번 뿐인 것, 반복도 재생도 할 수 없는 것"이 펼쳐지며 배우를 통해서만 그 역할의 실체가 표현되는 모순에서 성의 요소를 찾아낸다. 메이지 신궁과 가장 유사한 것은 아사쿠사 신사에서 벌어진 축제 현장이다. 강상중은 이 축제를 일종의 사회적 사정(射精)이라 본다. 일상이 주는 삶에 대한 압박과 긴장에서 벗어나 즐기는 광란의 대향연의 가치를 잘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말한다.

"아마 살아가야만 한다면 일찌감치 파탄 나고 말겠지요.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과정이 필요하듯이 마쓰리(祭)에 의한 연소도 필요합니다. 생활 속에 삶과 죽음의 리듬이 있기에 우리는 일상을 되풀이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일본에 처음 갔을 때 놀란 것은 서울과 도쿄의 유사성이다. 특히 경인선 전철은 도쿄 전철을 빼다 박아놓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근대성은 이식되는구나, 하는 탄식과 함께 말이다. 유럽의 도시와 달리 서울이나 도쿄는 뉴욕을 도시의 이상향으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왜 저리 높은 건물이 필요한 것일까? 강상중은 롯폰기 힐스에서 이렇게 말한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처럼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겠지요. 기술력이나 재력을 보여주는 데는 고층빌딩이 안성맞춤입니다. 빌딩에 사는 사람들도 빌딩이 높을수록 경치도 좋고 풍요로움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우월감이라고까지는 못하더라도 권력이나 돈을 공간적으로 시각화할 수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욕망이나 상승 지향이 수직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 그것이 고층빌딩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대를 수놓은 낱말은 자유와 상대주의, 소비와 욕망이었다. 한쪽에는 글로벌이라는 깃발을 세우고, 다른 한쪽에는 포스트모던이란 애드벌룬을 띄어 놓았다. 풍족하고 넘쳐난다고 했고, 신나고 즐겁다 했다. 그런데 그 종국은 무엇인가? 무한한 소비라는 비아그라를 먹은지라 결코 조루증을 보일 리 없다는 발기된 욕망이 꺾어질 날이 오고 있다. 강상중의 지적대로 고양이가 애완의 대표가 된 것은 우리가 어느덧 수축의 시대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달라붙지도 않고, 손이 많이 가지도 않고, 걸근거리지 않는 것이 팽창의 시대를 상징한 개와 사뭇 다르지 않냐고 말한다. 서울이나 도쿄의 바벨탑이 무너질 리야 없지만, 언제가 그 건물들은 미망의 시대를 알리는 기념비로 전락할 가능성이 클 듯싶다.

도쿄에서 아날로그를 상징하는 거리로 진보초 고서점가 만한 데가 어디 있겠는가. "시대에 알랑거리지 않"은 앎의 거대한 뿌리로 고서점가는 버텨왔다. 이 거리를 가본 이들은 기억하리라. 그리 크지 않지만 오래된 책으로 단단히 무장한 서점들이 풍기는 아우라를 말이다. 그것은 삶을 바꾸는 책의 힘에 대한 깊은 믿음과, 세상이 바뀌더라도 그 책을 찾을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낙관적 기대가 빚어낸 감탄스러운 분위기다. 아날로그는 추억과 친족관계이다. 진구 구장, 산겐자야 주오극장은 강상중의 어린 시절 기억이 고스란히 배인 곳이었다.

도시와 산책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서둘러 걷거나 뛰어야 하는 곳이 도시다. 그런데 강상중은 이런 통념에 제동을 걸었다. 천천히 걸으며 둘러보고 살펴보고 사유했다. <도쿄 산책자>가 가볍지만 통찰력 있는 문명 에세이로 읽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에 갈 일 있으면 이 책을 들고 가볼만하겠다. 보지만 말고 강상중에 기대어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도시를 어슬렁거려 보는 것도 좋을 성싶다. 도시 어디에나 속과 구별된 성의 공간이 있게 마련이며, 아날로그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곳이 있는 법이니까. 기왕이면 이문재의 시집 <산책시편>(민음사 펴냄)을 꺼내들고 도시를 걷는다면 더 좋으리라.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이 도시는 느슨한 산책을 아주
싫어하는 모양입니다 산책은 아니
산책만이 두 눈과 귀를 열어 준다는 비밀을
이 도시는 알고 있는 것이겠지요
도시는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저 반짝이는
유토피아의 초대장들로 길 안팎에서
산책을 훼방하는 것이지요 -마지막 느림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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