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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 잔 대신 민주주의를 살리려면, 기꺼이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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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 잔 대신 민주주의를 살리려면, 기꺼이 프레시안! [협동조합 프레시안] 언론, 광고, 민주주의의 삼각 함수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한다고 대문에 내걸었을 때, 나는 환호했다. 지난 몇 년간 '협동의 경제학'을 공부했고, 자연스레 현재의 협동조합 붐에 희망을 걸고 있는데, 유력한 인터넷 신문 중 하나가 협동조합으로 전환한다는 소식이 어찌 기쁘지 않을 것인가?

몇몇 분이 "왜 하필이면 협동조합인가" 이런 문제를 제기했다. 연초에 내가 원장으로 있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을 사단법인에서 협동조합 형태로 바꾸는 문제를 검토해 보자고 했지만, 딱히 협동조합으로 바꿔서 획기적으로 나아질 것이 없다는 대답이 나왔다. 말하자면 전환 비용도 뽑기 힘들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내 나름으론 얼마든지 답을 만들 수 있었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프레시안의 협동조합 전환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이유를 찾아야 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이기 때문이다. 충분히 의견을 나눌 때 비로소 이 모델의 시행착오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앞으로의 토론을 위해 발제한다는 심정으로 다소 긴 글을 쓰기로 했다.

(이 글의 이론 부분은 종합 편성 채널 설립에 관한 논쟁이 한창일 때 언론노동조합의 요청으로 쓴 '방송과 광고의 경제학'과 겹친다. 내 지식의 한계가 딱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

공공재로서의 방송과 민주주의

언론 중에 공중파 방송은 전형적인 공공재(public goods)이다. 폴 새뮤얼슨의 고전적 논문 이래로 현재의 표준적 교과서는 공공재를 비경합성(non-rivalry)과 비배제성(non-excludibility)으로 정의한다. 이 중 비경합성이 더 중요한 요소인데 이는 '집합적 소비(collective consumption)'에서 비롯된다.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직장의 신>을 내가 소비한다(본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소비하는 것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 흔히 공공재의 예로 드는 국방과 마찬가지이다. 이름 하여 비경합성인데 이는 내가 사과를 사서 먹으면 다른 사람이 동시에 그 사과를 절대로 소비할 수 없는 일반 재화와는 대조적이다.

흔히 이런 재화의 경우에는 공급자가 돈 안 낸 사람을 배제할 수 없다(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안 낸 사람을 배제하기 위해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켰는데, 예컨대 수량이 풍부한 마을 공동 우물은 공유 자원이지만 계량기가 달린 상수도는 '클럽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재의 공급과 소비에는 무임 승차(free riding)의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이기적인 소비자('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경제학의 기본 가정이다)에게 현재의 방송에 얼마를 낼 용의가 있는지 묻는다면 "나는 백해무익한 TV를 보지 않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 낸 돈으로 방송이 나온다면 나는 언제든 공짜로 <직장의 신>을 즐길 수 있다.

모두 이런 생각을 한다면 아무도 방송사를 경영할 수 없을 것이다. 돈을 벌기는커녕 드라마 제작에 드는 그 엄청난 비용을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따라서 시장에서는 방송이 공급되지 않고 또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방송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 언론도 똑같다.

한편 비유하자면 민주주의도 공공재이다. 내가 민주주의를 한껏 누린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민주주의의 덕을 보는 걸 방해하지 않는다. 전두환 같은 희대의 독재자에게만 민주주의가 적용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도 없다. 당연히 민주주의는 시장에서 만들어지지도 않고 돈으로 살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모두 이기적이었다면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목숨까지 거는 비용을 치러 민주주의가 달성된 후 그 과실은 전체가 골고루 누린다면 아무도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인간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동물이 아니라 때론, 또 어떤 사람들은 전체를 위해 희생하고 협동할 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민주주의는 공공재이고 따라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필요로 한다.

▲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프레시안(최형락)

언론과 광고의 경제학

지금 언론은 방송 3사, 종합 편성 채널, 유선 방송, 인터넷, 신문과 잡지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특히 비배제성이 강한 공중파 방송과 인터넷 언론은 무슨 돈으로 프로그램을 생산해내는 것일까?

한국방송(KBS)의 KBS1 채널은 시청료로 운영한다. 나머지 방송은 광고 수입으로 운영하고 유선 방송은 돈 낸 시청자에게만 방송을 내보내고(클럽재) 이와 함께 광고 수입도 챙긴다. 한편 신문과 잡지는 구독료와 광고에 의존한다. 한국의 인터넷 언론은 미미한 광고 수입과 자발적 기부금으로 수지를 겨우 맞추고 있다.

결국 언론은 자발적, 또는 강제적 요금(시청료나 구독료)을 빼면 광고 없이 생산되지 않는다. 각 방송이 시간대 별로 치열한 시청률 경쟁을 하는 것은 이 지표에 따라 광고의 양과 가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방송사는 시청자와 광고주 양 쪽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상황을 '양면 시장(two-sided market)'이라고 부른다. 신용카드 회사는 소비자와 가맹점을 매개하면서 수수료를 받는다. 마찬가지로 방송사는 시청자와 기업을 매개하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방송사의 수입을 기업이 광고료로 지불하고 시청자는 공짜로 방송을 보는 것 같은 모습을 띠게 된다.

시청자는 채널을 선택함으로써 특정 프로그램에 투표하고 동시에 광고된 물건을 선택함으로써 특정 상품에 돈으로 투표한다. 만일 기업이 광고료를 물건 값에 전가할 수 있다면 기실 시청자는 소비자로서 프로그램 가격을 지불한 것이 된다. 텔레비전에 광고하는 기업은 대부분 독과점이기 때문에 이런 설명은 설득력이 있으며 실제로 광고료는 기업 회계에서 비용으로 처리된다.

방송사는 시청자의 (한계) 짜증 비용(nuisance cost, 광고가 너무 많이 나온다면 시청자는 채널을 돌려 버릴 것이다)과 (한계) 광고 수입을 비교해서 광고의 양과 가격을 결정할 것이다. 다른 한편 광고주는 광고로 인해 상품이 더 팔려서 생기는 한계 수입과 광고 비용을 비교해서 광고할 프로그램과 가격을 결정할 것이다. 결국 광고의 양과 가격은 두 시장의 균형이 일치하는(또는 적절히 협상되는) 지점에서 결정될 것이다. 이제 언론은 마치 시장에서 거래되는 일반 상품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언론과 광고, 민주주의의 경제학

공공재와 관련한 골치 아픈 문제가 광고가 끼어들면서 다 해결된 것 같지만 정작 중요한 결함은 다른 곳에서 발생한다. 즉 이런 시스템이 언론의 '공공성'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공공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학술적으로 정확히 정의되어 있지 않지만 (내 개인적 견해는 <협동의 경제학>(레디앙 펴냄)을 참조하시라) 언론의 공공성이 민주주의의 유지와 발전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면 언론은 그런 의미에서 체제재(system goods)에 속한다.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이라는 인식 하에 "거시 건전성 규제"가 논의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론도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 합의에 의한 규제"가 필요하다. 위르겐 하버마스와 존 롤스가 (숙의) 민주주의의 실현 조건으로 언론의 공정성, 특히 견해의 다양성(viewpoint diversity)을 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굳이 시장에 빗대어 말한다면 언론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양면 시장'을 넘어 '삼면 시장(three-side market)'의 플랫폼이다.

이런 체제재의 공급 비용을 광고로 충당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방송의 사활이 결린 시청률 경쟁은 언론의 공공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모델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다양한 결론이 나올 수 있지만 고전적인 주장들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예컨대 스타이너(Steiner)는 이미 1953년에 인기 있는 프로그램 유형이 과도하게 복제될 것이라고 예측했고(최근 한국의 각종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라),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마이클 스펜스와 브루스 오웬은 1977년에 특정 프로그램 유형은 공급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황금 시간 대에 시사 프로그램은 결코 방영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광고로 운영되는 방송사들은 시청료로 유지되는 방송사에 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내 놓지 않는다.

광고주는 잠재 고객의 호주머니에 관심이 있으므로 시청자의 연령, 성별, 직업을 고려하게 될 것이고 그런 시선에 부응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게 될 것이다. 예컨대 주로 40~50대 여성이 가전제품의 구매 결정을 한다면 이들을 타깃으로 한 드라마가 방송될 것이다.

광고가 뉴스의 내용마저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은 더 심각하다. 이미 신문에서 드러났듯이 최대의 물주인 특정 재벌에 대한 비판은 아무래도 껄끄러울 것이고 주식 시장이나 부동산 시장에 관한 뉴스는 분홍빛 전망으로 물들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서 지방 방송이나 종교 방송 등은 다양한 견해, 특히 소수자의 견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필수적인데 광고는 시청률이 떨어지는 이 방송들을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광고 시장은 언론의 공공성을 위해서 규제되어야 한다. 예컨대 광고세를 매겨서 그 수입으로 다양한 언론사에 보조금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협동조합 프레시안

모든 공공성 논의가 그렇듯 언론 공공성의 내용도 사회와 역사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특히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를 시민들이 결정해야 한다. 다양한 견해가 언론에 반영되어야 하며 언론은 그 토론의 장(하버마스의 '공론장')이 되어야 한다. 재벌과 조·중·동 그리고 경제 관료라는 삼각 동맹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광고로 유지되는 언론은 삼면 시장의 한 축인 시민의 목소리를 사실상 빼앗아 버렸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공공재 또는 공유 자원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로 정부를 상정하지만(예컨대 광고세와 보조금) 정부가 언론의 역할을 할 수는 없다. 국가 권력 역시 언론이 견제해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자본과 국가를 동시에 견제해서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라면 시민이 그 주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호모 에코노미쿠스로서의 시민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특히 인터넷은 공짜라는 인식이 강한데 자발적으로 돈을 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돈을 내기 위해 몇 번 해야 하는 클릭마저 대단한 비용처럼 느껴져서 중도에 포기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사회의 단초로 예찬받는 그리고 다중의 지혜가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주는 <위키피디아>마저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지 않은가?

평생 공유 자원의 문제(공공재와 마찬가지로 무임승차의 문제이다)를 연구해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엘리너 오스트롬은 주민들이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서로를 감시하는 자발적 협동이야말로 그동안 인류가 이 문제를 해결해 온 비결임을 밝혔다.

협동조합은 이런 인류의 지혜를 반영한 기업 형태이다. 협동조합으로 형태를 전환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겠지만 인터넷 언론이 처한 현실에 가장 걸맞은 형태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조합원들이 낸 비용으로 무임 승차하는 선의의 독자들이 얼마든지 존재하며 사실 인터넷 언론은 그런 무임 승차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 하필이면 너냐" 하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랐다면 한국에는 아직도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왜 별로 잘난 것도 없는 내가 남들을 위해서 돈을 내는가" 하고 생각한다면 인터넷 언론은 생존하기 어렵다. 그 옛날 자신을 희생하는 친구에게 미안해서 데모 대열에 끼어들었듯이 기꺼이 돈을 내는 조합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 희생은 가벼워지고 뿌듯함은 커질 것이다.

프레시안 협동조합의 조합원이 10만 명을 넘긴다고 상상해 보자. 매달 1만 원씩 낸다면 10억 원이고 프레시안의 기자들은 마음 놓고 정론직필을 휘두를 것이다.

아니 기자들에게만 맡겨 놓을 일도 아니다. 협동조합의 원칙 중 하나인 참여는 조합비를 내는 일뿐 아니라 중요한 의사 결정을 직접 하는 것도 포함한다. 프레시안이 조합원 참여의 통로를 열어 주길 기다리지 않고 이런 저런 제안을 하는 것도 조합원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조합원이 된다는 것은 프레시안을 새롭게 만들고 쑥쑥 키우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참여, 딱 그만큼 민주주의도 자란다.

이런 의문이 생길 것이다. 이 글의 주장대로 원래 협동조합이 (인터넷) 언론에 가장 걸맞은 형태라면 왜 지금까지 그런 언론사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이미 밝혔듯이 (인터넷) 언론은, 이기적 인간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딜레마(공공재)에 속한다. 또 광고가 마치 공짜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민주주의의 희생이었다.

신뢰와 협동이야말로 인류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온 지혜였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기자.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성공해야 언론이 살고 민주주의가 살고,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과 자연이 살아날 수 있다. 한 달에 담배 몇 갑, 술 한 잔, 몇 달에 립스틱 하나를 줄이는 우리의 작은 행위가 세계 최초로 성공한 언론 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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