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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은 이론가가 아니라 책략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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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은 이론가가 아니라 책략가였다! [프레시안 books] <박헌영 트라우마> 서평에 대한 반론
이 글은 손석춘의 책 <박헌영 트라우마>(철수와영희 펴냄)에 대한 비평이 아니다. 그 책에 대한 안재성의 서평 '김일성 대신 그이가 북한의 지도자였다면?'(☞바로 가기 : 김일성 대신 그이가 북한의 지도자였다면?)에 대한 비평이다. 짧은 글 한 꼭지에 비평을 단다는 것이 좀 어색한 일이기는 하지만, 안재성이 남로당 인물들에 대한 조사와 서술을 많이 해온 분이라는 점에서(<박헌영 평전>(실천문학사 펴냄)도 썼다) 서평에 나타난 그의 관점을 점검할 필요를 느낀다.

그는 글머리에서 "박헌영과 절친하던 소련의 역사학자 샤브시나 여사"의 증언을 재인용함으로써 박헌영에 대한 애정을 밝혔다.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고 본다. 샤브시나는 해방 당시 서울에 주재하는 소련 부영사의 부인이었는데, 그의 기록 <1945년 남한에서>(김명호 옮김, 한울 펴냄)을 보면 매우 편파적인 기록자다. 해방 직후 상황의 외국인 목격자로서 그의 기록을 내 <해방일기>(너머북스 펴냄) 작업에 많이 활용하고 싶었지만 심한 편파성 때문에 가치가 적었다.

▲ <박헌영 트라우마>(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철수와영희
박헌영을 일방적으로 미화한 샤브시나의 묘사를 글머리에 옮겨놓은 데서부터 박헌영을 높이 평가하려는 안재성의 의지가 확인되고, 이 의지가 글 전체를 관통한다. 때로는 박헌영을 높이 평가해 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으로까지 나타난다.

예컨대 그는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 아니라고 단언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남한 진보지식인들의 이러한 무지와 편견 혹은 기회주의적 측면"이라고 여지없이 매도한다. 이런 가혹한 비판을 하면서 그 대상을 명확히 표시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비판의 태도가 아니다.

나는 비록 진보지식인도 아니고 박헌영에 관해 깊은 연구를 쌓지 못한 사람이지만, 최근 3년간 해방공간의 상황을 넓고 깊게 살피려 애써 온 사람으로서 박헌영에 대한 안재성의 평가를 수긍하지 않는 이유를 나름대로 밝히고 싶다.

안재성은 글 끝에서 박헌영은 1945년 11월 30일 방송 연설이 "합리적이고도 감동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고 극찬하며 독자들에게 읽어보기를 권하는데, 나는 그에게 공산당-남로당 외의 그 무렵 다른 연설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듣기 좋기로 그만 못한 연설을 찾기 힘들 것이다. 정태식이 대독한 이 연설에는 당시 좌익에서 누구나 주장하던 상식적 내용을 넘어서는 것이 없다.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다. 이 연설에서 박헌영은 6개 강령을 제창했는데, 그 대부분을 박헌영 자신이 행동에서 등진 것으로 나는 본다. 예컨대 제5조는 '정론 논쟁의 올바른 수단 방법'인데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당-남로당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태를 많이 보였다. 그리고 제6조는 '각 정당은 주의 강령이 동일할 것 같으면 단일 정당으로 통일할 것'인데, 1946년 여름에서 가을에 걸친 좌익 합당 과정에서 박헌영 일파는 극히 패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손석춘은 책 8쪽에서 "심지어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라고 부르짖는 진보세력도 남쪽에 나타났다"고 했는데 그런 주장을 내가 살펴본 것은 없다. 하지만 '간첩죄'의 일부분은 사실일 것 같다는 생각을 박헌영의 행적을 더듬어 오며 나는 갖게 되었다.

예컨대 그의 '월북'을 둘러싼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46년 9월 7일 미군정은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당 간부들의 체포령을 내렸고, 떠들썩한 체포 작전으로 서울 시내가 발칵 뒤집혔다. 박헌영은 잠적했다가 몇 주일 후 몰래 38선을 넘었다. 그 직후에 공산당이 남로당으로 개편되었는데 허헌이 명목상 위원장을 맡은 남로당을 박헌영은 해주에서 지도했다.

9월 7일의 체포령이 경찰 아닌 군정사령부 쪽에서 나온 것부터 이상한 일이다.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기자들에게 "이번 사건은 경찰에서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상부명령으로 경찰이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수배 이유는 미군정 비방으로 포고령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당시 비슷한 혐의로 체포된 이주하는 공안방해죄로 8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런 사소한 혐의로 공산당 대표를 체포한다는 것은 미군정에게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좌익 지도자 입장에서는 체포를 당하고 법정투쟁과 선전공세를 펴는 것이 자연스러운 길이었다. 손석춘은 책 189쪽에 1946년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불법화했다고 적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박헌영 자신에게 북쪽으로 넘어갈 동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서울이 모든 면에서 조선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공산당도 서울에 당 중앙이 있었고 박헌영이 그것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소련의 직접 지원을 받는 이북에선 공산주의 세력의 성장이 원활했다. 박헌영은 해방 직후 서울에 오자마자 소련영사관에 매달려 활동의 근거로 삼았는데 이북 주둔 소련군은 영사관보다 비교가 안 되게 더 큰 지원 통로가 되었다. 1946년 7월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을 만났을 때 박헌영은 소련의 지원을 놓고 경쟁하기 위해 이북에 가 있을 필요를 느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상황에서 체포령은 마치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려준 격이었다. 그래서 박헌영과 미군정 핵심부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 사령관과 박헌영의 초기 만남을 둘러싼 의문도 이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임경석의 <이정 박헌영 연대기>(이정박헌영기념사업회 엮음, 역사비평사 펴냄)에 의하면 두 사람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만남은 1945년 10월 27일과 11월 15일에 있었다. 그런데 박헌영의 기소장에는 11월 초순 언더우드와 함께 하지를 만난 일이 적혀 있다. 언더우드(원한경)는 10월 26일에 사령관 고문으로 조선에 부임했는데, 해방 전에 박헌영에게 도움을 준 일이 있다고 한다. 박헌영 기소장에는 언더우드가 "선교사로 가장한 미국 정탐기관의 노련한 탐정"으로 지목되어 있다.

사령관 고문으로 막 부임한 언더우드가 아는 사이인 공산당 지도자와 사령관 사이의 비밀모임을 주선하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비선(秘線)을 유지함으로써 각자의 조직에서 관리자 역할에 도움을 주고받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약간의 정보 교환만 해도 하지에게는 좌익의 동향 파악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박헌영에게는 좌익의 헤게모니 장악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생각하면 박헌영의 항일투쟁 경력에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그가 똥을 집어먹는 등 정신병자 행세로 병보석을 받은 얘기를 손석춘이 책 앞머리에 적었는데,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같은 사건으로 수감된 죄수들 가운데 옥사한 사람은 있어도 병보석은 박헌영 하나뿐이었다. 병이 나면 감옥 안에서 죽게 놔두지, 풀어주지는 않는 상황에서 죽을병도 아닌 정신병으로 병보석? 그리고 병보석으로 나온 몇 달 후에 해외탈출 성공? 일제당국과 사이에도 어떤 교감이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 증거는 없지만 합리적 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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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박병엽 지음, 정창현·유영구 엮음, 도서출판선인 펴냄). ⓒ도서출판선인
거듭 말하지만 이 글은 손석춘의 책이 아니라 그에 대한 안재성의 리뷰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재성 글의 근거를 확인하기 위해 손석춘의 책도 대충 훑어보았는데 양쪽 모두에 해당되는 문제 하나를 지적해야겠다. 보천보 얘기다.

안재성은 '보천보'가 어느 작은 마을에 있는 둑 이름이라고 했다. '보천洑'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사실 '보천堡'는 면소재지 급의 마을 이름이다. 어떻게 이런 착오가 나왔는지 궁금해서 손석춘 책을 뒤져보니 78쪽에 실린 원경의 발언 내용이다. 물론 문제의 초점은 보천보 전투의 주인공이 김일성이냐 여부에 있는 것이지만 기본 팩트는 정확하게 제시해야 독자의 신뢰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원경의 잘못된 생각을 아무 여과 없이 독자에게 전한 것은 두 분 모두에게 아쉬운 일이다. '프레시안 books' 편집자에게도 아쉬운 일이다.

현실에서 좌절을 겪은 인물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박헌영을 높이 평가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손석춘이 책 뒤에 '8월 테제'를 붙여놓은 것은 이것이 그가 이론적 지도자 자격을 얻은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중석은 '8월 테제'의 "많은 부분이 12월 테제의 번안이라고 판단될 정도"라고 평했다.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 236쪽)

12월 테제는 1928년 제6차 코민테른의 비타협적 노선에 따른 것이었다. 1935년의 제7차 코민테른에서는 연대를 중시하는 쪽으로 노선이 바뀌었다. 그런데 박헌영이 제7차 코민테른의 노선을 해방 때까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바로 샤브시나의 증언으로 알아볼 수 있다.

재건위원회에서 정치노선을 작성할 때 박헌영은 우리 영사관 도서관에 자료 특히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 관련된 자료를 여러 번 의뢰하곤 하였다. (임경석, <이정 박헌영 연대기> 214~215쪽에서 재인용)

해방 직후 서울 시내 여기저기 "박헌영 선생은 어서 나타나 우리를 지도해 주시오!" 하는 벽보가 나붙어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나는 박헌영의 지도력이 '8월 테제'보다 이런 책략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비밀을 좋아하는 책략가였다는 사실은 그의 행적 어느 대목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다.

박헌영의 책략가 성향이 민족사회나 좌익 전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이끈 공산당과 남로당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현시적 효과를 위해 당의 역량과 인민의 신뢰를 지나치게 소진시켰다는 지적은 널리 제기되어 왔다.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그의 책임도 그 연장선 위에서 거론되는 것이다. 그가 실제로 행사한 권력보다 더 큰 권력을 쥐었을 경우 이 민족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나는 상상할 수 없다.

안재성의 저술을 내 작업에 고마운 마음으로 많이 활용해 왔지만, 근거 없는 생각을 너무 앞세우지 말아야 독자의 신뢰와 이해를 더 잘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번 글이 특히 그랬다.

박병엽의 진술을 안재성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하다. 노동당 간부 출신으로 남한에서 여생을 보낸 박병엽의 회고 내용이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책, 중앙일보사 펴냄)에서는 '서용규'라는 가명으로 소개되었고,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도서출판선인 펴냄)과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도서출판선인 펴냄)에서 본명으로 나타났다. 나는 <해방일기> 작업 중 많은 장면에서 그의 진술이 정황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렸는데, 아마 안재성은 나랑 다른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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