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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킹 바에서 만난 '기계 알바', 죽은 아내의 목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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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킹 바에서 만난 '기계 알바', 죽은 아내의 목소리를? [프레시안 books] 오영진의 <어덜트 파크>
어느 모임에서 '토킹 바(talking bar)'로 술을 마시러 간 적이 있었다. 여자가 셋이나 있는 모임을 진행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장소였다. 그러나 굳이 우리를 그 곳으로 인도한 사람의 설명에 의하면, 그 곳의 직원은 다만 '대화 상대'를 해 줄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여자들도 내키지는 않지만 그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윽고 유니폼을 입은 앳된 직원이 들어와 단정하게 앉았고, 일행 중 한 분이 "여기 왜 나오지요?"라고 물어보니 "유학비용을 마련하려고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 대답이 아마 매뉴얼 중 일부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질문한 사람이 대학 교수인 것을 떠올리며 상대의 분위기를 읽고 한 대답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직원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를 떴는데, 단정하고 세련된 대화 기술은 매뉴얼이 있거나 훈련된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토킹 바를 찾은 사람들은 바의 직원들과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대화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익명의 힘을 빌려 평소에 하기 어려운 남의 험담이나 비루한 삶의 고민들, 사회에서 하면 욕 좀 먹을 잘난 척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직원들은 아마도 자신의 감정이나 개인적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반응은 숨기고, 손님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녀들은 손님의 삶의 맥락과는 절대적으로 유리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나의 대화 상대가 누군가의 딸이나 여동생이나 부하직원, 혹은 학생임을 인지하는 것은 이 장소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악몽 같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 <어덜트 파크>(오영진 지음, 창비 펴냄). ⓒ창비
따라서 토킹 바의 직원들은 개인적 삶은 없다는 듯이 그 시공간 안에 오롯이 존재해야 하는 사실상 거의 '대화 기계'화된 인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정말로 기계라면 어떨까? 그러니까 로봇이라면?

오영진의 만화, <어덜트 파크>(창비 펴냄)의 스토리텔링이 전개되는 기본적인 상상의 출발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작품을 보자마자 어떤 친구는 바로 "이거 토킹 바 얘기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틀리지 않다.

제목인 '어덜트 파크'는 토킹 바의 직원들보다 더 정교하게 손님의 반응을 감지하여 대화를 진행하는 여성형 로봇들이 있는 남성들의 놀이 공간이다. 이야기는 어덜트 파크의 대화 로봇이 자신의 아내의 기억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며 절망하는 직장인 남성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사실 수년 전, 식물인간이 된 아내의 뇌를 장기 브로커한테 팔아넘겼다.

아내에 대한 잠깐의 배신으로 그는 아내의 병수발에서 해방되었고 한 가지를 내려놓자 직장의 구성원으로서의 윤리도 손쉽게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는 그 이후 새 가정에서의 행복과 새로운 직장에서의 성공을 즐겨온 것이었다. 그런 그가 어덜트 파크에서 마주치게 된 것은 그가 배신한 아내의 기억을 이식받은 대화 로봇이다. 즉, 그런 장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인간의 기억을 가지고, 인간의 감정선을 따라잡는 로봇이나 복제인간 등 인간의 창조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어덜트 파크>는 <블레이드 러너>나 <공각 기동대>와 같은 사이버펑크 장르를 떠오르게 하지만, 오영진의 만화가 여태 그래 왔듯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리얼리즘적으로 그려낸다. 무엇보다도 <어덜트 파크>의 배경은 화려한 마천루로 뒤덮인 도시 공간, 혹은 핵전쟁으로 황폐해진 지구와 같은 SF적 디스토피아는 아니다. 작품 속 공간은 다소 구질구질하지만 익숙한 한국적 삶의 공간이다.

'어덜트 파크'의 대화 로봇들을 제외하면, 이 만화 속에 기계인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 속에는 기계인간 대신 몇 종류의 평범한 인간 유형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평범한 직장인 용배, 병원 원무과에 근무하지만 장기 브로커 역할을 하는 동수, 자신의 아내와 동료를 배신하고 개미 지옥같은 현실에서 발을 빼는 서 차장, 그리고 순수하지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사회에서 물질로 교환 가능한 것은 자신의 장기밖에 남지 않은 강모이다.

<어덜트 파크>는 이들 평범한 인간들 중 어떤 이가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남고, 어떤 이가 어떠한 방식으로 낙오했는가. 그리고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 이가 걷게 되는 길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냉혹한 리얼리즘적 생태 보고서에 가깝다. 어쩌면 이는 직장인이자 만화가인 오영진 작가가 실제로 겪은 삶 속 이야기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삶 속 경험을 세밀하게 만화로 옮겨온 작가의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덜트 파크>가 리얼리즘적 주제를 다루며, 작품의 연출은 사이버 펑크 장르 전통의 극화체와는 거리가 먼 카툰체의 흑백 연출을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이 작품은 여전히 <블레이드 러너>를 떠오르게 한다. 기계인간이라고는 대화인간 '요기'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녀마저도 어덜트 파크 안에 앉아 있는 수동적 존재임에도 말이다. 게다가 이 작품 속에서 치열하게 투쟁을 벌이는 것은 기계나 복제인간이 아닌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덜트 파크>의 중심에 여전히 <블레이드 러너>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은, 사실상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기계로서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용배는 노숙자였던 강모가 자신의 신장을 팔아 차린 호프집의 개업식에 가면서 화환에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고, 굳이 '사회가'라고 남긴다. 병원 원무과 직원인 동수는 "야. 너희 회사에선 나같이 피곤한 인간을 재충전해주는 배터리 같은 건 안 만드냐?"라고 묻는다. 작품 속에서 이들은 분명 사람이지만 서로를, 그리고 자신을 향해 기계인간 같은 태도를 취한다.

▲ <어덜트 파크> 중에서. ⓒ창비

따라서 용배나 동수, 서 차장 같은 인물들이 이끌어 가는 이야기는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리플리컨트'들의 폐기처분을 거부하는, 인간임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블레이드 러너>의 스토리텔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사회의 시스템의 일부이며, 배터리가 나가면 더 이상 소용없는 기계처럼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체제에 순응하여, 혹은 낙오하여 서서히 소멸되던가, 아니면 아직 기계가 온전할 때, 폐기 처분의 길을 걷고 자신의 몸을 부품으로 제공하던가. 그리고 또 다른 길이 있다. 동료를 스스로 폐기처분하는 위치에 서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폐기처분한 동료에게서 발생한 이윤으로 자신의 삶을 연장하는 방법이 있다.

'뭘 모르고 입사하여 자신의 청춘의 대부분을 회사에 바친 용배와 서 차장'은 각각 다른 길을 걷는다. 조직에서 낙오되기 시작한 용배는 스스로 조용히 상황을 인정하고 느린 폐기 처분의 길을 걷는다. 서 차장은 스스로 '허리 업', 그러니까 허리를 펴고 하늘을 바라보며, 그 상황에서 튀어나가게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인간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 순간,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동료들을 기계로서 상대할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의 아내의 장기를 기계 부품처럼 팔고, 동료를 곤경에 처하게 하면서 인간의 삶을 얻게 되었으며, 그가 이제 올라서려고 하는 사회에서의 '인간'의 토대는 그들이 여전히 기계로서의 역할을 해 주어야만 유지가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자신의 동료들을 인간으로 인정한 순간 아마도 그는 자신에 대한 무한한 역겨움에 사로잡힐 것이다.

서 차장은 자신이 팔아버린 아내의 뇌의 기억을 공유한 대화 로봇 '요기'의 소식을 듣자마자, 필사적으로 달려가서 '요기'를 총으로 쏘고, 거금을 치르고 하드 디스크를 강에 던져버린다. 5년이나 아내의 옆을 지켰고, 아내의 기억을 담은 복제 로봇까지 만들 생각을 했던 그였지만, 가까스로 인간의 삶을 살게 된 그에게 자신의 손으로 폐기처분한 식물인간 아내가 자신과의 기억을 공유한 인간이었음을 깨닫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요기'와 마주한 순간에 대해 "더러운 곳이었어요. 기계가 사람을 가지고 노는…" "내 생애 그렇게 더럽고 역겨운 순간은 처음이었어"라고 고백한다. 어덜트 파크에서 아내의 기억을 마주한 순간은 서 차장이 자신이 밟고 올라선 사람들이 자신과 기억을 공유한 '인간'임을 인식하는 순간이다.

장기 브로커인 동수는 용배가 강모를 치료해야 한다고 말하자 도리어 흥분하며 윽박지른다.

"인마 넌 어떻게…꼭 생각하는 것이 기계 같냐! 인간미가 없어. 쉑이가. 넌 매뉴얼대로 인생 사냐?"
"사람이든 기계든 고장 난 데가 있으면 고쳐야지. 강모 걘 치료를 받아야 한다니까. 걘 지금 다른 곳이 아닌 머릿속이 고장 나 있는 거야. 왜 그걸 몰라 사람들이."
"기계 같은 놈!"


용배를 윽박지르는 동수, 아내의 기억을 가진 로봇을 보고 격분하여 파괴해 버리는 서 차장은 이 사회에서 과연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어떤 비윤리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오영진 작가의 성찰이 담긴 부분일 것이다. 내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기계처럼 살아가는, 혹은 부품처럼 취급되는 다른 이들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서 차장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과연, 다른 사람의 고통에 눈을 감고, 다른 사람을 기계로 인식할 때 가능하다. 세상의 어떤 상류층도, 자신의 입에 들어가는 고기를 자신의 손으로 도살하지 않는다. 도살자의 역할을 맡은 장기 브로커 동수는 용배에게 기계 같은 놈이라고 윽박지르는 동시에 너와 대화하면 불편함을 느낀다고 괴롭게 고백한다. 그의 불편함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도망친 리플리컨트들을 사냥하는 데커드의 고뇌와도 닮아 있다. 다만 동수의 불편함은 더 이상 깊어지지 않고, 로봇이 된 아내를 만난 서 차장은 그녀를 자기 손으로 제거하면서 마무리된다. <어덜트 파크>의 리얼리즘은 현실 속의 그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이다

그리하여, 모든 이들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기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극히 리얼리즘적인 이 만화에서 등장한 진짜 로봇들의 존재는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오영진 작가는 권말의 후기에서, 자신이 진짜 답답한 상황일 때 꿈에 나타난 '대화 로봇 요기'가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지만, 작품 속 '어덜트 파크'는 앞서 밝혔듯 한국의 각 도시에서 성업 중이기도 하다. 기계의 삶을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기계가 되어주는 사람들. 개인의 경험과 기억 등은 없다는 듯 실제로 작품 속 로봇처럼 자신의 고객을 상대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들을 인간-기계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로봇이라는 계급적 공식으로 굳이 도식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어덜트 파크> 중에서. ⓒ창비

주체적이고 당당한 로봇 '요기'의 모습은 감정 서비스 노동자로서의 직업의식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요기'의 존재를 통해, 작가는 후기 산업사회가 인간의 노동뿐 아니라 감정과 기억, 경험까지를 기계화해서 상품화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강모는 자신의 신체 기관을 팔았지만 서차장의 아내 정희는 자신의 뇌를 팔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 여성으로서의 기억과 경험이다. 그리고 더 아프게 드러내는 것은 상품화되고 기계화된 그들의 감정이 제공되는 곳은 다름 아닌 우리, 기계시대의 노동자들에게라는 점이다.

<어덜트 파크>의 키워드는 따라서 '감정' 혹은 '기억과 경험'일 것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는 나의 감정, 혹은 기억과 경험이 존중받을 수 있는가와 관련된다.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 불도저로 밀려나갈 때, 가차 없이 직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 때, 그 외 다양한 차별과 억압의 장에서, 상대편의 기억과 경험,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인식하고 있다면 그러한 폭력은 자행될 수 있는가? 감정 노동자에 대한 정신적, 언어적 폭력, 성매매 현장이나 기타 다양한 감정 노동의 현장에서 이들은 과연 개인의 경험과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생각되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인간의 외피를 한 기계로 인식되고 있을 뿐일까.

이러한 주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오영진의 예술적 전략은 아마도 성공적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만화가들은 장르적 전통과 자신만의 고유의 예술언어를 활용하여 현실에 작가적 관점을 담아내고, 이를 통해 독자들과 감정적으로 공명한다. 가령 아트 슈피겔만의 <쥐>(권희종·권희섭 옮김, 아름드리미디어 펴냄)가 아버지를 인터뷰하면서 홀로코스트를 낱낱이 드러내고,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김대중·최주현 옮김, 새만화책 펴냄)가 자전적 만화의 형식을 통해 이란의 격동기를 살아가는 개인의 삶을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적절한 예술적 전략의 효과였을 것이다.

'대한민국 아저씨 사이버펑크물'이라는 기묘한 <어덜트 파크>의 장르적 선택은 인간의 노동에 이어 감정마저도 규격화 시켜 소비하는 현대 사회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독자를 현실적 문제에 참여시킨다. 정희의 뇌와 감정로봇 '요기'의 연대는 현실에 안주하지만은 말라는 작가의 작은 제안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사족에 가깝지만 <어덜트 파크>를 보면서 오영진 작가의 출생 연도를 확인해 보았다는 바보짓을 고백하고 싶다. 7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마징가 Z'에서 '기동전사 건담'으로 로봇 전투의 나날이 이어지는 유년기를 보냈다.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은하철도 999>에서는 철이가 기계인간이 되기 위해 메텔과 안드로메다로 여행을 하였으며 조금 더 커서는 <블레이드 러너>나 <공각 기동대>와 같은 사이버펑크물에 빠져들게 된다.

그런데 성인이 된 어느 날, 이 아이들은 현재의 시각이 SF영화 속 디스토피아의 시간임을 깨닫게 된다. <블레이드 러너>의 디스토피아는 2019년이다. 2013년인 현재 우리에게는 대신 군대에게 가서 싸워 줄 전투 로봇도, 우리 대신 우주 식민지에 가서 힘든 노동을 대신 해 줄 <블레이드 러너> 속 복제인간 리플리컨트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잠시 멈춰 서서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그 '로봇'이나 '리플리컨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덜트 파크>에는 그런 개인적 맥락을 지닌 작가에 의해 그려진 것은 아닐까라는 같은 70년대 생으로서의 묘한 공감의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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