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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 로얄> VS. <바람이 분다>,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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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 로얄> VS. <바람이 분다>, 살아라! [최원호의 好好하우스] 미야자키 하야오의 <출발점><반환점>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터뷰와 짤막한 각종 글들을 모은 책 <미야자키 하야오 출발점 1979∼1996>(황의웅 옮김, 박인하 감수, 대원씨아이 펴냄, 이하 '출발점')과 <미야자키 하야오 반환점 1997∼2008>(황의웅 옮김, 박인하 감수, 대원씨아이 펴냄, '이하 반환점')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가 9‧11 테러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의와 폭력의 상관관계에 집중하는 데 비해 미야자키 하야오는 테러로 인해 붕괴한 세계무역센터의 기괴함을 가장 먼저 언급한다. 그가 9‧11에 대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말, 즉 이 비극을 통해 최초로 파악한 점이 아래와 같았다고 하면 어딘가 오싹해진다.

5만 명의 인간이 한 장소(세계무역센터)에 모여 컴퓨터를 노려보며 돈을 벌 궁리를 하는 건 이상해요. 그게 전부입니다.
-<반환점>(237쪽)


▲ <미야자키 하야오 출발점 1979∼1996>(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황의웅 옮김, 박인하 감수, 대원씨아이 펴냄). ⓒ대원씨아이
'이상해요. 그게 전부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9‧11을 투쟁의 형식이기 이전에 문명의 업보로 받아들인다. 누가 비행기로 들이받지 않아도 저 빌딩은 무너졌을 것이다. 아니, 이 세계 자체가 곧 무너질 것이다. <출발점>과 <반환점>을 통틀어 미야자키 하야오가 현 문명의 종말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10여 군데가 넘는다. 그는 '이래서는 망해버리고 만다'거나 '아무래도 망하겠지'라고 아무렇지 않게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 문명의 종말은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고도자본주의 사회가 갖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런데 이는 노동자 혁명과는 관계없는 시나리오다. 자본주의는 혁명에 공격당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몰락으로 인해 내부로부터 붕괴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문명 종말론은 '정서'라는 내적 자원의 고갈에서 촉발한다. 자본 획득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너무 일찍 포섭당한 아이들이 인간으로 살아갈 동력을 발생시키고 축적할 시기를 놓쳐버린 채 어른이 되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들을 '시작하지 못한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마치 양계장에서 사육되는 육계처럼, 시작하지도 못한 채 성장을 강요당한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정서적 원동력이 고갈된 인간들이 서로를 인간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인간 공동체로서의 사회라는 개념 자체가 무너져 버린다. 그 지경에 다다랐다면 이미 인간 외의 '것'들은 치욕스런 꼴을 당한 지 오래일 것이다. 이런 걸 어떻게 지키자는 거냐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다시 묻는다.

수만 명이 두 개의 거대한 탑 속에 모여 전부 돈을 벌려고 컴퓨터 키를 두드리고 있었잖아요. 그편의 문명의 형태로선 이상합니다. 그런 문명을 '지키자'고 해도 '그런데 문명이 뭐더라'하는 이야기가 되죠.
-<반환점>(247쪽)


그러니까 다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이 파국이 절멸을 향한다면 전망도 소용이 없을 테니 마음 편히 망연자실할 수 있을 것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파국의 스펙터클을 감상하는 것만큼 시원한 행위도 없다.

▲ <미야자키 하야오 반환점 1997∼2008>(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황의웅 옮김, 박인하 감수, 대원씨아이 펴냄). ⓒ대원씨아이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또는 미래)에서는 절멸조차 손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자연의 엄청난 재생력에 대한 찬탄은 책 전반에 걸쳐 있으며, 심지어 그는 어리석은 존재들조차 어떻게든 살아남고야 만다고 말한다. 환경오염이 심해진다는 둥 아토피가 대유행이라는 둥 투덜거리면서도 과포화된 개체수를 여유 있게 유지하는 인간이라는 종족도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 없다. 물론 충격적인 인구 급감을 불러 일으키는 비극적인 사건이 환경 재해나 전쟁으로 인해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대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모두 끝나지는 않을 거라고,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고, 미나마타 병 때문에 인간이 떠나가자 그전까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여러 종의 물고기들이 그 바다로 돌아와 힘차게 중금속 물을 마시고 인간의 업보를 짊어진 채 살아가더라는 이야기를 전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였다.

그래서 문제는 '살아라'가 되었다. 어쨌든 살아남게 된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다. 이에 대해 수많은 세기말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살아라'를 여러 방식으로 변주했다. 그것은 전쟁물이기도 했고 마법소녀물이기도 했으며 스포츠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그 안에 함정을 갖고 있다. 살아남고 싶은 자는 체제에 복속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하야오는 권투 애니메이션 <내일의 죠 2>를 '시대에 남겨져 썩은 내밖에 풍기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은 것은 (…) 직업의식밖에 없다. 로봇병사이기 때문에 싸우고, 형사이기 때문에 범인을 쫓으며, 가수를 지망하니 경쟁상대를 이기고 (…) 그리고 나머지는 관심이 치마 속인지, 바지 속인지 정도가 돼버렸다.

우연히 자신이 요미우리에 속하고 상대가 주니치나 히로시마나 한신에 속한다고 해서 상대를 미워할 수는 없다. 지고 싶지는 않지만 서로 힘들겠구나 라는 것으로 돼버린다. 그런 로봇 우주전쟁의 TV 애니메이션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등장인물은 서로 편이 갈린 사람들이 법석을 떨기만 할 뿐으로 시청자들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회의 시뮬레이션으로서 그 분열을 리얼리티로 받아들이기도 하는 한편, 싫증을 낸 것이다.

직업의식과 프로의식이란 것은 일종의 몰가치론으로, 어딘가에서 생존경쟁설에 녹아버리는 말이다. (…) 모든 것이 게임이 될 수밖에 없다.
-<출발점>(99쪽)

이런 종류의 '살아라'들은 현 체제의 뻔뻔한 표면에 일말의 틈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체제의 힘을 공고히 할 뿐이다. 이런 '살아라'는 자신 외에는 구원을 찾을 길 없는 무자비한 각개전투를 향해 나아가라고 요구하는 출격 명령이다. 패전의 역사를 기억 속에 품은 채 고도 자본주의의 경제 전쟁을 수행하는 세대가 구사하는 무의식적인 유사 전시 동원 명령인 셈이다. 세상은 바꿀 수 없으니 네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으라고 말이다. 일종의 중산층 판타지다.

더 자세히 표현하면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했던 부모를 두고 패전을 겪은 이후 경제 전쟁이라는 전면전에 투입되어 소기의 성과를 거둔 중산층이 자신의 내면을 정당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판타지다. 이 수많은 '살아라'들은 결국 '우리는 이렇게 살아남았다. 이제 너희 차례다'의 변형형이다. 이 '살아라'들은 가짜다. 응원이 아닌 도발이다.

그리고 다른 '살아라'가 있었다. 이 버전은 앞선 버전과는 달리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답습하지 말라고, 우리는 이미 틀렸다고 고백한다. 후카사쿠 긴지의 마지막 영화 <배틀 로얄>의 마지막 장면이 그렇다. 정서적으로 사지를 절단당한 배틀 로얄의 진행자 겸 선생님과 그를 죽이고 배틀 로얄에서 벗어난 여주인공이 꿈속에서 만난다. 사운드가 소거된 이 꿈 속에서 선생님은 우리(어른들)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곧 커다란 글씨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달려라.'

▲ 후카사쿠 긴지의 1996년 영화 <배틀 로얄>. ⓒ도에이

무엇을 만들고 가르쳐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게 된 자의 자조 섞인 요청, 그렇게 붕괴한 이곳에서 달려 나가 또 다른 장소를 향해 가라는 요청이다. 다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이미 어른들은 시야를 확보할 수 없을 정도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육성이 아니라 문자로 남겨진 '달려라'는 폭력과 불의의 세계에 천착해왔던 노감독 후카사쿠 긴지의 유언장이었을 것이다. 이 유언으로서의 '살아라'는 답을 발견하지 못한 자의 당부며 회한이다. 침몰하는 배처럼 가라앉는 세계에 울려 퍼지는 이함(離艦) 신호다.

그렇다면 <배틀 로얄>의 이후는 어디일까. 정말로 목적지를 발견할 수 있을까. 가만 앉아 걱정하는 수밖에 없을까. 아니, 어떤 아이는 정말로 달렸다. 그렇게 달려서 세계의 양태를 바꾸어버렸다. 바로 열 살짜리 여자아이 치히로(또는 '센')다. 이 아이의 놀라운 점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짧은 기획서 속에서 이미 작품의 하이라이트로 적시되어 있다. 화려한 장면이 아니다. 바로 치히로가 온천장의 마녀 유바바와 마주한 뒤 유바바의 온천에서 일하겠다고 말하는 대화 장면이다.

보통의 모험물이라면 마녀를 만났을 때, 마녀를 격퇴하거나 아니면 마녀의 주문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저주의 체제 속에서 다른 드라마를 성실히 찾아 들쑤시는 수밖에 없다. 남성적인 영웅 서사 또는 (좋게 포장해서) 시시포스의 돌 굴리기다. 그런데 치히로는 대뜸 "여기서 일하겠어"라고 말한다. 저주를 받아 죽거나 축생이 되어 자신의 숙명(또는 직업)에 복속된 삶을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곳에서 치히로는 자발적 노동을 선언하고 없었던 선택지를 만들어 탈출한다. 자신이 탈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바바가 지배하는 세계, 즉 평범한 판타지 모험물에 적용될 뻔한 세계의 시스템을 바꾸어버린다.

'살고 싶다고 말하면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룰은 권선징악의 세계가 아니에요. 악마는 그냥 죽여 버리니까요.' (<반환점>, 242쪽)

치히로의 놀라운 선택에 대해 유바바는 "시시한 맹세를 하게 해 버렸어"라며 후회와 감탄이 뒤섞인 평가를 내릴 뿐이다.

체제의 균형을 단숨에 흐트러뜨린 이 아이는 결과적으로 특별하다. 그러나 이 특별함은 모든 아이들이 가지고 있었어야 할 평범함에서 기인한다. 치히로가 "여기서 일하겠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건 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아이에게 세계의 의미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세계를 구할 의무도 권리도 관심도 없다. 재미있을 것 같으면 그냥 하고, 이놈은 무리다 싶으면 열심히 도망간다. 심지어 치히로는 그닥 착하지도 않다. 동정과 연민에 가득 찬 소녀였다면 고독하고 불쌍한 괴물 가오나시를 돌보다 잡아먹혔을 것이다. 치히로는 야생동물처럼 아무것도 동정하지 않는다. 가오나시가 안돼 보이긴 하지만 얘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 나도 놀아야지 않겠는가. 할 일도 좀 있고 말이다. 그리고 미안한 얘기지만 가오나시는 별로 재미없는 녀석이기도 하고….

▲ 미야자키 하야오의 2001년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스튜디오 지브리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이들에게서 발견한 '시작'이란 그런 것이다. 재미있을 것 같으면 일단 한다. 하고 싶은데 안 되면 우긴다. 늘 마냥 내키는 방향으로 달려간다. 이것이 <배틀 로얄>의 '달려라(그런데 어디로?)'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답이다. 네 표정은 네 것이라는 말이다. 어디로 달려갈지는 너희가 알아서 재미난 데를 들쑤셔 보라는 식이다. 멋대로다. 멋대로여야만 한다.

지브리의 아이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오래전 코난과 나우시카에서부터 <이웃집 토토로>의 사츠키와 메이, 사춘기 마녀 키키와 물에서 올라온 포뇨에 이르기까지 지브리의 아이들은 외부로부터 주입받지 않은 자기 안의 목소리를 따라 고민하고 살아왔다. 나우시카가 종교적인 신념을 가진 '하늘을 나는 잔 다르크'가 아니냐는 질문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애니미즘은 저도 좋아합니다. 돌멩이도 바람에도 인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걸 종교로서 외치고 싶진 않았어요. 그러니까 나우시카는 잔 다르크가 아닙니다. 바람계곡의 모두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행동한 거예요. 죽는다거나 산다거나 하는 것보다 그 오무의 새끼를 도와서 무리로 데리고 돌아오지 않으면, 마음에 뚫린 구멍이 메워지지 않는 그런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출발점>(443쪽)


그렇게 지브리의 아이들은 매 작품마다 서로 다른 세계관에 구애받지 않고 늘 주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 주체성은 어떤 상황에 임해서도 통용되는 내적인 신념으로,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신의 염원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쓰는 전략이기도 하다. 세계의 경계를 파괴하는 신념이 결국 스크린이라는 경계까지 붕괴시키고 관객들의 삶 속에 파고들어 리얼리티를 얻어내겠다는 야심이다.

따라서 지브리의 어떤 작품에 대고 '그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라고 묻는다면 작품의 중심을 비껴갈 확률이 높다. 어디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아이들에게 거기가 어디냐는 질문은 부차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현실과 신들의 세계를 잇는 전철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냐는 질문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답한다.

보통 자신이 사는 세계와 주변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 어째서 이야기 속의 일에만 그렇게 관심을 갖나요? 집이나 회사 옆을 달리는 전철이나 트럭이 어디로 가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에 한해서 그 전철은? 이라고 물어옵니다. 치히로는 그런 거엔 관심을 갖지 않아요. 눈앞에서 일어나는 현실로도 벅찹니다. 그 세계는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처럼 막연한 세계입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선 자신들의 세계입니다. 그곳에 어쩌다 타지에서 사람이 왔어요. 그게 치히로입니다.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 예를 들어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10살 소녀가 일을 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건 친절한 사람도 짓궂은 사람도 포함해서, 개구리 무리에 들어간 것 같은 겁니다. 이건 그런 영화예요.
-<반환점>(223~224쪽)


어디에서고 살아갈 수 있는 힘. 이것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문명의 종말을 예상하고 그 뒤를 바라보며 내민 카드다. 그가 아이들을 위한 작품을 만드는 이유는 그저 아이들이 미래를 살아가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 아니라, 아이일 때만 체득할 수 있는 '나다움'이 요동치는 세계를 헤쳐 나갈 힘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다움을 간직한 채 성장한 아이들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시기가 다가와도 뒤틀어지거나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비록 어린이들이 주인공일 때에 비하면 세상의 무게가 좀 더 크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지역 택배업에 종사하는 마녀 키키는 사춘기의 알 듯 말 듯한 감정 변화를 겪는 중에도 자신이 몸담은 소규모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한 다음, 비로소 임금노동자의 삶을 받아들이고 다른 노동자-시민들에게 마음을 연다.

그런가 하면 지브리 역사상 최고의 내적 난관에 부딪힌 소년, <모노노케 히메>의 아시타카는 어떤가. 자기 부족의 차기 족장으로 지목되었다가 재앙신의 저주를 받은 이후 마을에서 추방당한 이 청소년은 커뮤니티가 제작해낸 신념, 즉 집단으로부터 발생한 이데올로기의 허망함을 이미 깨달은 상태다. 아시타카는 탐욕이 아닌 생존 자체를 위해 숲을 파괴하는 에보시 고젠 일당과 숲의 세력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양쪽 모두의 의심어린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에도 가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 미야자키 하야오의 1997년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 ⓒ모노노케 히메

아시타카는 서로 싸우는 자연과 인간 세력이 모두 합당한 이유와 필요한 만큼의 욕망만을 갖고 서로를 불가피하게 죽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는 고민 끝에 투쟁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떤 체제에도 속할 수 없다는 신념을 확인한다. 따라서 아시타카는 투쟁의 접경 지역을 홀로 거닐며 약자를 보살피는, 암컷의 미덕을 갖춘 낭인이 된다.

그래서 나중에 아시타카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연 산이 "아시타카는 좋아해. 하지만 인간을 용서할 순 없어"라고 말했을 때, 아시타카는 웃으며 "그래도 좋아. 나와 함께 살아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의 편도 자연의 편도 아니다. 그러니 '아시타카는 좋아해. 다만' 뒤에 어떤 표현이 붙어도 상관없다.

아시타카는 세계의 측면을 홀로 걸어가기로 했으니 어떤 불가의 조건도 그를 관통할 수 없다. 그는 혼자됨으로, 생존하기 위해 필연의 적을 상정하지 않음으로 자비무적(慈悲無敵)의 상태를 지향한다. 어떤 진영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투쟁의 딜레마를 온전히 자신 안에 받아들일 수 있다. 압력 받지 않은 날것인 채로 아시타카의 품에 안긴 딜레마는 그의 품속에서 부화하여 그 품 안에 비로소 온전한 세계의 모습을 그려내게 될 것이다. 이 내면의 평화는 진영 바깥으로 자신을 추방한 열외자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경지다. 아시타카는 살아남기에 복무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이라는 세계-를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브리 역사상 어떻게 살(고 죽을) 것인가에 대해 가장 처절하게 고민해야 했던 이 소년소녀 이야기의 개봉 당시 캐치카피는 '살아라'였다. 그렇게 살아가자. 그렇게 살아가면…

그렇게 살아가면 언젠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지브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또는 답하지 못했다. 성인 '돼지'가 등장하는 <붉은 돼지>는 지브리의 인간 성장사(또는 '어린이 보완 계획')와는 동떨어진 일종의 외전일 뿐이다.

(시바 료타로는) 스무 살의 자신이 "왜 이 어리석은 전쟁을 벌인 나라에 태어났는가?"라고 의심했던 물음에 "지금 그때의 자신한테 편지로 소설을 쓴다"고 답했었다.
-<출발점>(219쪽)


그리고 드디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바람이 분다>가 찾아왔다(한국에선 9월 5일 개봉한다). 제로 전투기를 개발한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은 최초로 등장한 '지브리의 어른'이다. 지브리의 특징상 주인공의 나이가 많을수록 더욱 강력하게 육박해 들어오는 세계의 압력은 이번에야말로 대단할 것이다. 이제 살아간다는 딜레마에는 역사가 드리운 굴레까지 추가되었다. 게다가 유바바의 온천장처럼 유연함을 가진 체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브리 최초의 어른은 시작부터 막다른 골목에 놓여 있다.

▲ 미야자키 하야오의 2013년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 ⓒ스튜디오 지브리

따라서 나는 <바람이 분다>가 역사적 비극을 직접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비겁한 작품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설정 속에서 이미 퇴로를 다 끊어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전쟁을 일삼는 국가의 중산층으로 태어났다는 변명할 수 없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최선을 다해 말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영을 선택할 권리도, 진영의 성질을 바꾸어 버릴 힘도 가지지 못한 '어른'인 채로도 여전히 자신으로서의 세계를 구축하고 또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 이미 어른이 된 우리는 대체 무엇을 원동력으로 삼아 살아가야 할까.

<반환점>에는 신쵸문고판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 말미에 실린 미야자키 하야오의 해설이 담겨 있다. '하늘의 희생'이라는 제목의 해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류가 하는 짓은 너무 흉포하다." 비행이라는 꿈이 단 10여 년 만에 대량살상의 주역으로 탈바꿈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놀랄 정도로 빨리 소모되며 죽어간' 비행기 위의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가 비관적으로 쓰여 있다. 그는 말한다. "비행기의 역사는 흉포 그 자체다. 그런데 나는 비행사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 이유를 변명처럼 써놓는다. 내 안에 흉포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또는 지브리의 어른은, 또는 사회에 진입한 우리는 이제 딜레마를 품에 안을 수도 없이 등에 짊어진 채 살아간다. 대량소비문명을 비판하면서도 토토로 비디오로 많은 돈을 번 자신을 조소하면서, 국가폭력을 부정하면서도 전쟁병기로 이용되었던 비행기에 늘 매혹되면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러한 자기 안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저 인정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답을 구하지 못한 채 질문만을 일삼고, 염치없게도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살아달라고 계속 요청하면서 저물어간 세월이었다.

이런 우리여도, 이런 어른들이어도 괜찮을까. 저만치 앞서 빛을 뿜으며 달려가는 아이들과 보조를 맞추어 함께 이 세계를 살아갈 수 있을까? 꿈과 번뇌로 빚어낸 거대한 삼엽기가 <바람이 분다>의 30초짜리 광고 속을 끝없이 날아가고 있다.

PS. 번역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 이 두 책에는 직역투의 문체가 무리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꽤 있다. 책 만듦새의 완성도가 높다고는 할 수 없으므로 감안하시기 바란다. 물론 재미있는 내용이 많으니까 충분히 보상은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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