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호의 <미생>(위즈덤하우스 펴냄)을 읽다가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구석에 몰린 오차장이 까마득한 후배 장그래를 앞에 두고 술을 마시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릴 때, 마치 내가 술을 마시며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미생>(윤태호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위즈덤하우스 |
열한 살에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가 프로기사를 유일한 목표로 알고 살아가던 청년 장그래는 입단에 실패한다. 절망한 그는 후원자의 소개로 종합상사 '원 인터내셔널' 인턴 사원으로 입사한다. 검정고시 출신 고졸에 취미도 특기도 없는 장그래가 직장 동료들의 뜨거운 열정과 합리적 사고, 따뜻한 인간미에 매혹되면서 '정규직'의 꿈을 꾸게 되는 과정이 바둑판 위 치열한 결전처럼 숨 막히게 묘사된다. 2012년 1월 20일 'Daum 만화속세상'에 첫 선을 보인 이후 연재가 완료될 때까지 내내, '장그래 언제 출근하냐'는 궁금증으로 컴퓨터를 켜던 독자들은 '만화가 아닌 인생 교과서', '샐리러맨 만화의 진리'라는 뜨거운 격찬으로 <미생>을 응원했다.
한국 만화계의 최고 이야기꾼 윤태호의 최신작 <미생>이 이번 '3인1책수다'에서 다루는 작품이다. 도서평론가 이권우(한양대 특임교수), 서평가 이현우(필명 '로쟈'), <프레시안> 기자 김용언 세 명이 다양한 주제의 책들을 선정하여 같이 읽고 토론하는 자리, '3인 1책 수다'는 인터파크도서 웹진 <북앤>() 에 동시 게재된다. <편집자>
▲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현우, 이권우, 김용언. ⓒ프레시안(김봉규) |
<미생>,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
김용언 : 많은 독자들이 그렇듯 저 역시 <이끼>(윤태호 지음, 한국데이타하우스 펴냄)부터 윤태호 작가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지하게 됐습니다. 전작 <야후>(윤태호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가 걸작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아쉽게도 아직 시작을 못했습니다.
<이끼>로 처음 접했고 <미생>까지 읽고 난 뒤의 감상이라면, 윤태호 작가는 최소의 장치로 최대의 리얼리티 효과를 끌어내는 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게다가 만화 자체의 속성이 워낙 이미지 중심이지만, 그 중에서도 영상적인 감각이 가장 뛰어난 작가가 아닌가 감탄했고요. 자유자재로 클로즈업과 풀 쇼트를 오가고, 카메라 트래블링의 효과적인 사용뿐 아니라 컷과 컷 사이의 공백에 있어서도 딱 적절한 순간에 멈추는 능력이 놀라웠어요.
성격이 워낙 급한지라, 완간되지 않은 만화를 기다리는 게 힘들어서 <미생>을 지금까지 안 보고 꾹 참고 있었어요. <이끼>의 경우 웹툰 연재가 한창일 때 뒤늦게 읽기 시작했다가 마지막 3회 정도를 남겨두고는 안달복달한 나머지 막 바닥을 굴러다녔거든요.(웃음) 이제야 단행본으로 뒤늦게 접했는데, 읽는 내내 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미생>에 열광했는지 알겠고, 또 다른 사람들이 왜 이 작품을 판타지라고 비판하는지도 알겠더라고요. 현실을 명쾌하게 건드리는 지점과, 어쩔 수 없이 비현실적인 설정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미생>의 두 가지 전략에 대해 같이 얘기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 도서 평론가 이권우. ⓒ프레시안(김봉규) |
웹툰이 단행본으로 나오는 출판 시장 쪽에서 최고의 작가는 역시 윤태호 작가와 강풀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강풀 작가는 정통 만화가 스타일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힘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인기가 많지요. 윤태호 작가의 경우는 정통적인 만화 계열에 속합니다. 개인적으론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바다그림판 펴냄)의 박흥용 작가가 줬던 그 충격을 윤태호 작가에게서 다시 느꼈어요. 한국에서 정통 만화가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한 희망을 주는 이가 윤태호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웹툰으로는 <미생> 시즌 1이 완료됐고, 단행본은 총 9권으로 완간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8권이 나왔어요. 바둑과 상사에 대한 광범위한 취재를 통해서 이야기를 만들어갔고, 오랜 시간 웹툰으로 연재하며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수렴한 작품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논의해볼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현우 : 만화 쪽에선 제가 제일 문외한인 것 같은데…(웃음) 아마 이현세 작가와 허영만 작가 작품을 읽고 나서 거의 20년만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권우 선생이 좀 전에 말씀하신 정통만화의 적통을 이어간다는 지적에 동의하게 되네요. 전혀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고요. 오랜만의 만화 독서였지만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한편으론 그 흥미와 재미 속에 뭔가 함정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우리 모두 바둑판 위의 돌
이권우 : 장그래라는 주인공이 많은 독자들이 몰입할 수 있는 인물이고 <미생>의 전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좋은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설정상 판타지적인 면이 있죠. 장그래는 바둑을 두다 프로 입단에 실패했고, 좋은 인연으로 상사 '원 인터내셔널'에 계약직 직원으로 입사합니다. 그가 일을 배우면서 정규직 전환을 꿈꾸게 되는 설정이, 비슷한 입장의 독자들에게 대중적인 판타지를 자극합니다. 장그래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이현우 : 말하자면 장그래는 고졸 낙하산이죠? 요즘은 이력서에 학력 표기란을 없애는 곳들이 있으니 이게 현실을 반영한 건지 아님 정말 판타지인지는 확실히 모르겠는데…. 다른 캐릭터들에게선 그런 측면을 좀 찾아볼 수 있죠. 장그래의 입사 동기 중 유일한 여성인 안영이 같은 경우, 김혜수 씨가 나왔던 드라마 <직장의 신>을 좀 연상시키더라고요. 오차장도 어느 정도 판타지를 자극하지요.
이권우 : 오차장이야말로 모든 직장인이 바라는 선배 아니겠어요? 전 장그래와 오차장이 이 작품의 아주 강렬한 캐릭터이자, 치밀한 취재가 반영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직장인의 판타지가 투영된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장그래처럼 출발 지점이 낮더라도 더 높이 성취하고 싶은 욕망, 혹은 내가 직장에서 만나는 멘토가 오차장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는 바람 말이죠.
김용언 : 장그래의 개성은 그가 바둑 기사였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하루 일과가 끝나면 오늘의 수를 혼자 둬요. 바둑 용어로 '다면기'(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바둑을 두는 것)라고 하던데, 그렇게 바둑을 두면서 하루를 복기하고, 내가 실수한 게 뭐였는지, 혹은 돌을 물렀어야 하는 지점이 어디였는지를 복기한 다음 그걸 기보로 정리하고 잠듭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 나도 이렇게 살았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무계획적으로 지냈을까 후회되다가도, 이만큼 자신의 한계와 장점을 명쾌하게 알고 그 안에서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하나하나 자기 스텝을 밟아 나간다는 게 비단 성격 문제가 아니라 직장이라는 사회의 여건상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어요. 독자들이 장그래에게 감정이입했던 건, 장그래가 '고졸 낙하산 계약직'이더라도 그처럼 침착하고 멋지게 시작하는 신입사원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크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사실 그런 면에서 이룰 수 없는 꿈같은 존재가 아닐까. (웃음)
▲ 하루를 복기하는 장그래 (1). ⓒ위즈덤하우스 |
▲ 하루를 복기하는 장그래 (2). ⓒ위즈덤하우스 |
이현우 : 전 이 설정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저도 예전에 바둑을 좀 둔 적이 있는데, 어릴 때부터 바둑만 외길로 둔 사람이라면 세상만사를 머릿속 바둑판 위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바둑의 기본은 복기인데, 바둑을 한판 두고 나면 아무리 초보자라도 최초의 몇 십 수까지는 복기할 수 있어요. 내가 왜 그 수를 뒀는지 알아야만 바둑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죠. 장그래처럼 바둑만 두는 생활을 10년 넘게 했다면, 직장을 다니면서도 밤마다 다면기를 자연스럽게 두게 될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이권우 : 인생사와 바둑을 비교하면 양쪽이 잘 이해가 간다는 전제를 깔고 있죠.
이현우 : 직장 생활이 삶의 전부는 아니지만 대표적인 삶의 방식이 됐잖아요. 바둑기사였던 장그래가 상사를 다니면서 바둑과 직장 사이의 접속 지점을 찾아가고 발견하고 깨닫게 됩니다. '꼼수'도 배우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터득하면서 직장 생활의 처세술을 깨닫지요. 그 유사성이 설득력 있고 재미있는데, 퇴행적인 부분도 분명 있다고 봅니다.
윤태호 작가가 서문에서도 밝혔다시피, 바둑에선 승자와 패자 모두 경기가 끝나면 복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직장 생활과 딱 맞아떨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어요. 진지하게 넌 붙었는데 난 왜 떨어졌을까, 이걸 두 사람이 복기하면서 분석하는 게 힘들잖아요.(웃음) 인턴으로 성실하게 일해도 정규직에서 탈락하는 게 현실인데, 하지만 그런 복기야말로 작가의 기대를 반영하는 부분이겠지요.
바둑은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것에만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경기가 끝난 다음 그걸 되새겨보는 게 가장 중요해요. 바둑적 성찰이라고 해야 할까, 이긴 사람과 진 사람 모두 예의를 갖춰 복기하는 겁니다. 바둑알을 다 치운 다음, 처음부터 다시 둬요. 어디서 실수했는지, 어떤 수가 최적의 수였는지를 하나하나 따져보는 거죠.
이권우 : 1989년 제1회 응씨배 결승에서 조훈현 9단과 중국의 최강자 녜웨이핑9단이 맞붙은 명승부의 기보와, 박치문 <중앙일보> 바둑전문기자의 해설이 매 에피소드마다 실려 있잖아요. 이 기보가 <미생>을 이야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가요?
이현우 : 125편의 에피소드가 한 수 한 수에 다 맞출 순 없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조응이 되었다고 봅니다.
이권우 : 바둑 용어로 실제로 '미생'을 '완생'의 대척점으로 많이 쓰나요?
이현우 : 미생은 많이 쓰는 말입니다. 두 집을 내야 사는 건데, 그걸 내지 못한 말을 '곤마', 혹은 '미생마'라고 부릅니다. 이게 철학에서는 호모 사케르가 됩니다. (웃음)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 동등한 자격 조건을 갖지 못하고 대우를 못 받는 인간이니까요. 인턴 사원이나 계약직 사원이 정식 사원과 다른 대접을 받는 장면들에서 독자들이 호응한다는 게, 우리 모두 미생이라는 공감이 깔려있다는 뜻이겠죠. 그게 징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정규직이 이렇게 많이 양산된 시대가 아니었다면 호응의 강도가 조금 약해졌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권우 : 말미에선 전무까지 건드리잖아요. 중국 사업을 확장하면서 무리한 수익을 상대방에게 안겨준 게 들통 나서 결국 그 기세등등한 전무가 한직으로 물러나는 장면이 나오죠. 그러면서 직장에서 과연 완생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요. 많은 이들이 직장 다니면서 하는 고민이 그거잖아요.
▲ 서평가 이현우. ⓒ프레시안(김봉규) |
이권우 : 장그래의 입사 동기들도 참 재미있는데, 이중에서 '현장파' 한석율은 처음 등장할 땐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더니 주변적인 인물로 남더라고요.
이현우 : 네. 입사 동료들 사이에서 각 역할이 적당히 배분될 줄 알았는데 에피소드로만 스쳐가더군요.
김용언 : 안영이가 좀 지나치게 뛰어나긴 하지만, 어쨌든 안영이, 한석율, 장백기 등의 동기들이 직장에서 만날 수 있는 전형적이고 평범한 인물들이잖아요. 이들이 에피소드들에 간간히 등장하면서 현실성을 담보하긴 하지만, 어쨌든 장그래와 영업3팀의 뒤로 밀려난 감은 있습니다. 특히 한석율은 현장을 못가고 사무직으로 남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웃음)
이권우 : 사무직에 아주 빨리 적응하던데.(웃음) 그나저나 안영이와 장그래도 뭔가 러브 라인이 이뤄질 것 같더니 아무 일도 없던데요.
김용언 : 사실 러브 라인 없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더 좋아하기도 했어요.
이권우 : 장그래의 출신과 안영이의 출신을 따져봤을 때 직장 내에서 쉽게 러브 라인을 형성하긴 힘들었겠지요. 아마 윤태호 작가가 리얼리티와 판타지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제 오차장으로 넘어가 볼까요. 장그래가 엄연히 주인공이지만, <미생>을 읽다보면 오차장이 주인공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에요. 작가가 의도한 건지, 아니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건지 궁금해요.
이현우 : 직장 생활에서 직속상관의 비중은 클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직속상관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 채 말단 계약직 사원의 직장생활을 그리는 게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상관이 긍정적인 부정적이든, 심지어 군대의 고문관이나 폭탄 같은 존재라도 비중을 크게 차지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권우 : 오차장은 누구나 바라는 멘토일 겁니다. 다만 이 인물은 직장 내에서 정치적이지 않지요. 결론은 눈에 보듯 훤합니다. 직장에서 정치를 하지 않는 인물은 직장에서 버텨내지 못합니다. 장그래의 활약으로 밝혀진 내부 비리를 오차장이 폭로할 때도 주변에서 말이 많았고, 전무가 연루된 중국 사업을 거부할 때도 주변의 반응은 냉소적입니다. 결국 퇴사할 수밖에 없게 돼요. 기업 문화도 군대 문화와 비슷해서 '까라면 까'가 지배적일 텐데, 오차장이 그 안에서 나름대로 절차를 강조하는 순간 윗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내잖아요. 그런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오차장 자체는 현실에서 찾기 힘든 멘토일지라도 그가 전무나 부장과 겪는 갈등이 매우 현실적이기 때문에 직장인 독자들이 좋아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직장이 삶의 전부일까?
김용언 : 전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 갈등이 튀어나올 때마다 굉장히 공감하면서 읽다가도 언뜻언뜻 '아 이건 픽션이지'라고 거리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어요. 영업3팀 같은 경우 팀원들의 사생활을 절대 안 보여줘요. 정확하게는 사생활이 없지요. 다른 팀의 사원들 같은 경우 근무 중 트위터를 한다든가 애인과 통화하며 영화 약속을 잡는 장면이 조금 부정적으로 다뤄지잖아요. 장그래가 "난 그런 거 할 시간 없는데"라고 한 마디를 던진다든가. 그럴 때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게 되더라고요. (웃음) 사실 그처럼 짬짬이 딴 짓하고 한숨 돌리는 게 직장생활의 일상인데, 장그래 이 녀석은 왜 딴죽을 거는 거지! 하면서요.
물론 영업3팀의 특성상 늘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야 하고 심지어 '리세터'라는 별명으로까지 불릴 정도로 매우 바쁩니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그렇게 지나치게 과로하면서 사생활을 가질 자유도 없는 삶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잖아요. 왜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 앞에서, <미생>은 사실 침묵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일을 사랑하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며 그 모든 과정에 성심을 다해 내 시간을 바친다는 측면을 강조하다보니, 그걸 당연시하는 어조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이 있었습니다.
이권우 : 또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로는 여성 직원인 선차장이 있지요. 맞벌이 부부 중 아내가 느낄 수밖에 없는 고충을 아주 생생하게 그려요. 퇴근 후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가는 순번을 정하는 것 때문에 남편과 다투고, 남편이 승진하면서 '아이에겐 엄마가 필요하다'며 선차장의 퇴직을 요구하는 부분들이요. 직장 생활의 가장 내밀한 고충을 솔직하게 묘사하지요. 윤태호 작가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작가로 유명한데, <미생>에서도 직장 여성에 대한 시선이 굉장히 긍정적이고 우호적입니다. 안영이나 선차장도 그렇고, 재무팀의 깐깐한 여성 부장님도 그렇고요.
▲ 맞벌이 부부의 고충을 보여주는 선차장. ⓒ위즈덤하우스 |
<미생>의 만화적 특성에 대해서도 첨언하고 싶어요. 사실 만화에서 사람 얼굴을 그리는 게 아주 어려워요. 다른 유명 작가들의 만화를 보면 얼굴의 현실감이 별로 안 느껴지지만, 윤태호 작가의 만화에선 정말 사람 같거든요. 예를 들어 미국에서 온 스티브 부장 같은 경우, '프레시안 books'에도 글을 자주 쓰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의 이정모 관장이 모델인데, 보면 딱 알아볼 수 있어요.(웃음)
또 장면 묘사도 남다릅니다. 옛날 만화는 공간이 평면적인데, 여기선 카메라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아주 입체적으로 묘사하지요.
만화가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장면은 단연 IT 영업팀 박 대리 부분입니다. 2권 37쪽에서 박대리 등에 날개가 돋는 장면은 압도적이죠. 소설 같았으면 이런 결정적 순간에 온갖 수사학을 동원했어야 할 텐데, 만화에서는 박 대리의 심리적 변화를 묘사할 때 이런 날개를 묘사하는 것만으로 압도적인 인상을 남깁니다. 그렇게 곳곳에 뛰어난 만화적 기법이 돌출되기 때문에 독자들을 강하게 매료시키는 측면이 있어요.
▲ 박대리의 '변신'. ⓒ위즈덤하우스 |
다만 개인적인 불만이라면, 의성어를 너무 많이 쓴 게 아닌가 싶어요. 예능 프로 자막을 보는 느낌이 들거든요. '저벅저벅'하는 발소리는 지나치게 자주 나와요.
김용언 : 전 그런 발소리 자체는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큰 사무실에선 소리에 민감할 수밖에 없어요. 사장님 어디 가냐, 옆 팀에서 뭐하냐 하는 정보들이 그런 소리들로 전달되니까요. '큰 인물'의 등장이라든가 어떤 사건 발생의 전조쯤으로 의성어를 강조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임원급 쯤 되면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지요. 오히려 위압감을 주기 위해서라도 발소리나 말소리를 크게 내는 편입니다. 안영이의 경우, 또각또각 소리 나는 구두를 신고 다니다가 상사한테 꾸중을 듣고 바로 단화로 바꿔 신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전 2권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고 싶습니다. 인턴 P.T 시험에 합격한 후배들에게 오차장이 검은 넥타이를 사준 다음, 시청 앞 쌍용차 해고자 복직 투쟁 텐트로 데려가 해고자의 영정 앞에서 인사를 시킵니다. 아주 뜻밖의 전개였고 그만큼 인상적이며 그 안에 담긴 의미도 분명하지요.
"근로자로 산다는 것. 버틴다는 것. 어떻게든, 완생으로 나아가는 것…."
하지만 이 부분에서의 생경함 자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현우 : 작가적 개입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인데, 이후에 이 해고자들과 연관되는 장면도 없으니 상당히 이례적이긴 하죠.
전 <미생>을 보면서 상사맨들의 일상과 함께 상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처음 알았어요. (웃음) 동창 중에 상사에 다니는 친구들도 잘 못 만나거든요. 이젠 생각도 관점도 사용하는 용어도 다르니까 대화 자체가 힘들어지죠.
김용언 : 장그래가 무역 용어를 못 알아듣고 힘들어하는 장면이 생각나네요.
이현우 : 이게 직장인 독자들에게 어필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세계가 있는 거지요. 자신들만 이해할 수 있는 애로사항이 존재하는, 바깥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문턱이 존재하는 고유한 영역이요. '우리는 팀원, 같이 살고 같이 죽는다'는 팀워크의 정서가 존재하는 영역. 그걸 <미생>이 잘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아쉬운 점은, 한 번도 원 인터내셔널 바깥의 시선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시즌 2가 예고되었다고 하니 좀 성급한 의문일 수 있는데, 원 인터내셔널이 유일한 삶의 조건처럼 설정되어 있어요. 퇴사한 오차장의 선배들이 그러잖아요. 회사는 전쟁터지만 바깥은 지옥이라고, 회사 나올 생각 하지 말라고. 그 대사가 직장인들의 무의식을 건드린다고 생각하는데, 한편으론 그게 위험한 인식의 공유이기도 합니다.
이권우 : 오차장이 퇴사 결심할 때 바로 현실이 튀어나오죠. 지금껏 회사를 통해 아파트 융자금을 저리로 처리할 수 있는데 이제 높은 이자의 융자금 계정으로 바꿔야 합니다. 결국 부인이 직원가로 살 수 있는 가전 제품을 전부 사라고, 보너스 받는 다다음 달까지는 일하라고 말하잖아요.(웃음) 워낙 대기업 중심 사회다보니, 그곳에서 나가 자리 잡는 것도 대단히 어렵구요. 중소기업을 차렸더라도, 살아남기가 쉽지 않겠지요.
이현우 : 기업 사회라는 용어도 있지요. 자본주의의 속성상 어쩔 수 없겠지만, 한국 사회가 어느 순간부터 기업 사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기업 바깥에 사는 게 어려워졌어요. 바깥이 지옥이니까, 어떻게든 기업 내부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전제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아까 나온 쌍용차 분향소에 가는 에피소드가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기업 사회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바깥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게 아쉽습니다. 미생, 즉 생존 자체가 지상과제이며 '바깥은 없다'라는 구도 자체를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게 놀라운 겁니다.
이권우 : 자영업자들이 잠깐씩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의 실패가 좀 더 철저하게 그려졌다면 이들이 조직에 연연하게 되는 이유가 더 잘 설명될 텐데 말이죠.
이현우 : 외부가 차단되어 있으니까 직장 생활에 대한 성찰적 거리가 확보되지 않습니다. 거기서 살아남느냐, 탈락하느냐의 구도만이 지배하게 돼요. <미생>이라는 작품 자체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는 그 전제에 대한 불만인 건데요, <미생>이 그 부분까지 다룰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권우 : 윤태호 작가가 <미생> 시즌 2에서 '장그래, 설국 열차를 타다'를 그릴 수도 있지요.(웃음)
이현우 : 기업 사회를 비판적으로 다룬 책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기업을 아이스하키에 비유합니다. 그야말로 전쟁터에요. 아이스하키에는 반칙이 허용되는데, 반칙을 저지르면 몇 분간 퇴장당하는 페널티가 주어져요. 그 다음 다시 나올 수 있으니까, 경기 내에서 반칙이 권장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아이스하키 링크 바깥은 다른 세계잖아요. 거기엔 다른 규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거죠. 제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건, 직장 내 문화가 바깥 세상으로까지 확산되는 그 상황 자체입니다. 하버마스를 흉내내자면 '생활세계의 기업화'라고 해야 하나, 아까 주인공들에게 사생활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주인공들의 사생활은 '준비'로만 보여줍니다. 출근 준비.
김용언 : 엑셀을 배우라는 말을 듣자마자 컴퓨터 학원을 끊고, 외국어가 필요하다고 하면 바로 영어학원을 끊지요. 물론 직장 생활에 필요한 스킬을 습득하는 건 직원의 당연한 의무지만 그 끊임없는 연마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좀 힘들더라고요.
이현우 : 기업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는 상황에 대한 비판 의식이 없다면, 직장인들의 애환을 위무하는 데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듭니다.
김용언 : 원 인터내셔널이 닫힌 생태계인데, 그 생태계가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거죠.
이권우 : 시즌 1이 그 닫힌 생태계의 생리를 보여줬다면, 시즌 2는 아마 '지옥에서 살아남기'가 되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 ⓒ위즈덤하우스 |
출판 만화의 미래, 밝다!
이현우 : 요즘 베스트셀러 중 한 편이 조정래 작가의 <정글만리>(해냄 펴냄)인데, 중국식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비즈니스맨들의 분투기를 다뤘지요. <미생>과 <정글만리>의 뜨거운 반응을 보자면, 이렇게 직장인이라는 확실한 독자층을 상대로 출판계 쪽에서 적극적인 시도를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 소설로는 정비석 작가의 <소설 손자병법>(은행나무 펴냄)도 그 갈래에 속하지요.
▲ <프레시안> 기자 김용언. ⓒ프레시안(김봉규) |
이권우 : <미생>도 드라마화하면 딱 좋을 것 같은데요.
김용언 : 아, 드라마 계약 됐대요. 2014년 방영 예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등장인물들의 프리퀄을 다룬 모바일 영화가 만들어졌고요.
이권우 : 전 만화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올해가 아주 즐겁습니다. <미생>이 완간되고 <설국열차>(자크 로브·뱅자맹 르그랑 지음, 장 마르크 로셰트 그림, 이세진 옮김, 세미콜론 펴냄)가 재출간되었고,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안토니오 알타리바·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이미지프레임 펴냄) 같은 뛰어난 작품을 볼 수 있었고요. 만화 출판이 늘 어려웠는데, 이렇게 잘 팔리는 작품이 등장한다는 건 아주 긍정적인 현상입니다. 예전 만화가들이 도달하지 못했던 걸 윤태호 작가는 해냈다는 거거든요. 무료 웹툰으로 볼 수 있는 만화를 책으로 소장하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 자체가 우리 만화사에서 큰 의미를 가집니다. 그럼으로써 최규석, 앙꼬, 김태권 같은 젊은 작가들에게도 좀더 큰 희망이 있는 거구요. 결과적으로 한국 출판 만화계의 풀이 넓어질 것이라는 기분 좋은 전망을 해봅니다.
오늘도 긴 시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10월 초 '3인1책수다'의 마지막 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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