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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종사> 영춘권의 영웅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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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종사> 영춘권의 영웅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최원호의 好看하우스]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
내 주위에는 글을, 정확히는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다. 물론 그중에 실제로 작가라고 불리는 사람은 없다. 확률적으로 보았을 때 역시 작가가 되기는 어려운 듯하다. 좋은 이야기를 쓰기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재능과 열정을 함께 소유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하게 되며, 이는 글쓰기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부족한 천재성을 메꿔줄 만한 도구를 찾아다닌다. 천부적인 손가락놀림을 가지지 못하더라도 악보만 정확하게 기입할 수 있다면 멋진 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자동피아노 같은 글쓰기 도구 말이다.

▲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크리스토퍼 보글러 지음, 함춘성 옮김, 비즈앤비즈 펴냄). ⓒ비즈앤비즈
그래서 글쓰기 교재는 꽤 잘, 적어도 꾸준히는 팔린다. 나는 일하다 힘들 때 가끔 '소설 쓰기의 비법'이나 '시나리오 쓰는 법'에 대한 책들의 판매고를 찾아본다. 그 숫자들, 판매량들은 새로운 이야기라는 성배를 찾아 떠난 모험의 횟수처럼 보인다. 합하면 수 천 수 만이 넘는 여정들이다.

물론 나는 이 여정 또는 탐색이 대부분 실패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글쓰기 책 시장에 여전히 새로운 이론과 방법론이, 즉 새로운 타입으로 디자인된 성배 후보들이 공급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효력이 없다는 측면에서) 가짜 성배가 <인디아나 존스 : 최후의 성전>에서처럼 사람을 해골로 만들어버리지는 않지만, 그리고 작가 지망생들을 일부러 곤경에 빠뜨리려고 만들어진 작법 안내서는 없지만(그러리라 믿는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역시 깨닫고 만다. 시간은 점점 더 빨리 흘러가고 실패한 열정에 재도전할 때 지불해야 할 기회비용은 늘 조금씩 올라간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다시 한 번 시도하는 수 천 수 만의 숫자를 보면서 힘을 얻곤 한다. 포기하지 않고 아직 여정에 올라 있는 자들은 모두가 작은 영웅들이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낭만적인 이야기인가? 영웅은 뭔가를 이룬 뒤에, 또는 이미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외부로부터 부여받는 칭호가 아닌가? 아니, 그렇지 않다고, 영웅이라는 호칭은 소명을 받고 여정을 시작한 모든 이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하는 이 책의 원제는 'The Writer's Journey'다.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크리스토퍼 보글러 지음, 함춘성 옮김, 비즈앤비즈 펴냄)는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이 작가를 꿈꾸는 독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사용하는 근거는 바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다. 인류가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이야기 타입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세계의 수많은 신화와 전설들을 끌어모은 뒤, 그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공통된 원형(Archetype)을 추출한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윤기 옮김, 민음사 펴냄)이 바로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의 이론적 근거다. 인류가 이야기를 할 줄 알게 된 시절부터 끝없이 탐닉해 온 강렬하고도 본능적인 원형을 자신이 쓰려는 이야기에 적용시킬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될 거라고 한다.

그럼 그 놀라운 성능의 '원형'이란 무엇이냐. 놀랍게도 다들 알고 있는 영웅 모험담이다. 평범한 삶 속에 파묻혀 있던 영웅이 이런저런 이유로 소명을 받아 모험을 떠나 관문과 조언자와 동료를 만나고, 동굴 깊숙한 곳에서 죽음의 위기를 만났다가(또는 정말 죽거나) 깨달음을 얻어 부활한 뒤, 약속된 신비의 영약을 얻어 귀환한다는 내용이다.

이 얼마나 명절맞이 클리셰 선물 세트 같은 얘기인가. 게다가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의 서문을 보면 저자 크리스토퍼 보글러가 디즈니에서 일했고, 디즈니를 비롯한 할리우드의 제작사들이 이 책의 방법론을 특히 사랑한다고 쓰여 있다. 흔해빠진 휴머니티를 첨가한 모험 활극 엔터테인먼트에 특화된 책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이상의 넓은 범위를 다룬다. 모험에의 소명이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한 등장인물이 전형적인 캐릭터에 머물지 않고 원형 속의 여러 캐릭터들을 오가는 것이 보다 매력적인 이야기를 구축한다는 점도 반복해 강조한다. 즉 '원형 신화' 자체는 클리셰가 아니다. 클리셰는 다른 모든 흔한 장치들처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태도'다. 그러니 서문을 읽으면서 드는 걱정 또는 선입견은 내려놓아도 좋다.

▲ 존 슐레진저의 1975년 작 <미드나잇 카우보이> 속 더스틴 호프먼(왼쪽)과 존 보이트.

예를 들어 보자. 저자가 '일상에 머물던 영웅이 불현듯 소명을 인식하고 모험을 향해 떠나는' 시퀀스를 설명하면서 예로 드는 영화 중 하나는 바로 비애가 연쇄 폭발하는 걸작 <미드나잇 카우보이>다. 멀쩡한 허우대와 섹스에 대한 자신감 말고는 능력도 가진 것도 없이 시골에서 접시닦이나 하던 우울한 청년(존 보이트 분)이 불현듯 뉴욕을 향해 떠나기로 결심하는 그 순간 말이다. 숨겨진 능력이나 가문의 비밀 따위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이 슬픈 표정의 남창 지망자가 <미드나잇 카우보이>라는 신화 속의 영웅이며 그가 당도한 뉴욕은 모험이 펼쳐질 광야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땅딸막한 건달(더스틴 호프먼 분)은 원형 속에 등장하는 조력자이자 익살꾼이며 현자이고 때로 영웅이 넘어야 할 관문 또는 관점에 따라 절명의 위기 그 자체다.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의 원형 이론을 응용해 <미드나잇 카우보이>를 바라보면 이 영화 시나리오의 매력을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복합적인 캐릭터의 매력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더스틴 호프먼은 <미드나잇 카우보이>라는 '영웅의 여정' 전체를 표상하는 인물이다. 더스틴 호프먼은 신화 속에서 영웅이 마주하는 여러 캐릭터들의 역할을 자신 안에서 순차적으로 교체함으로써, 존 보이트의 성배 탐색을 자신과의 우정을 쌓아나가는 과정 속에 완전히 녹여낸다. 만약 더스틴 호프먼이 이렇게 다채로운 면모를 보이지 못하고 그저 좋은 친구(조력자 또는 스승)에 불과했다면 영화는 원형을 충족시키기 위해 더 많은 등장인물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렇게 진행되었다면 두 남자의 우정에 주목할 시간도 부족해질 뿐더러, 존 보이트가 더스틴 호프먼에게 품을 수 있는 양가적인 감정(나쁜 놈이면서 좋은 놈)도 포기해야 한다.

버디무비는 친구인 두 주인공에 집중해야 하고 또한 그 우정의 스펙트럼이 다양할수록 성공적이라고 본다면, <미드나잇 카우보이>는 가장 성공적인 버디무비 중 하나일 것이다. 두 친구 중 한 명이 영웅일 때 다른 한 명은 나머지 세계의 모든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딱히 얻은 것도 없이 패퇴하듯 뉴욕을 떠나는 이 영화의 비극적인 결말이 결코 초라하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친구이자 악당이며 영웅에게 위기와 깨달음을 함께 제공하는 '여정의 총체' 더스틴 호프먼이 자신의 신화적 소임을 다했고, 영웅인 존 보이트는 여정의 결과물로써 어떤 깨달음을 얻은 채로 원형의 마지막 단계인 귀환에 이르기 때문이다. 존 보이트의 무표정한 얼굴은 영화의 시작 때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관객들은 그의 내면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느낄 수 있다. 신화가 완결되었을 때 영웅의 내면은 늘 한 단계 성장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원형은 충족되었고 관객들은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게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비애는 당당하고 굳세다.

여기서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 책의 원형 이론 도구가 창작 자체보다는 시나리오의 구조 분석을 위한 도구에 더 적합하다는 점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렇다.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는 당신도 잘 할 수 있다며 시나리오나 소설을 시작하도록 독려하고 집필 과정을 이끌어주는 책이 아니다.

서문에도 나와 있듯이 이 책의 구조는 마치 타로 카드의 해설서처럼 구성되어 있다. 타로 카드 안내서들이 이 세계와 우주의 양태를 담은 22장의 카드를 그저 순서대로 한 장씩 설명하듯,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 역시 조셉 캠벨의 영웅 서사를 다소 간소화시킨 뒤 그 여정의 각 단계를 순차적으로 설명해 놓았을 뿐이다. 아무리 상세한 타로 카드 안내서라도 수많은 패의 조합을 절대로 다 설명할 수 없고 그 조합 자체는 점괘를 보는 이가 해석해내야 하듯,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가 단계별로 해설한 영웅의 여정 역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실효'를 발생시키지 못한다.

이 책은 글쓰기 지망생들을 창작으로 이끌고 영감을 부여하는 능동적인 유사 인격체가 아니라 이미 작업에 뛰어든 사람들이 직접 쥐고 사용해야 하는 보조 도구다. 시나리오가 밋밋해 보일 때 원형 이론을 대입해보고 그 시나리오에서 결핍된 특성이 무엇인지 찾아본다거나, 어떤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원형을 멋지게 응용했는지 확인할 때 써먹는 것이다.

▲ 앙가위 감독의 2013년 작 <일대종사>. ⓒ銀都

이를테면 <일대종사>에서 영웅의 소명을 가장 성공적으로 완수한 캐릭터는 왜 최후에 부활과 귀환의 단계를 밟지 않고 몰락의 길을 걷는가? 강호가 종말을 고한 뒤, 마침 '20세기 중반의 홍콩'에 터를 잡고 '살아남은' 영춘권과 팔극권의 영웅들은 몰락한 영웅과는 어떻게 달랐는가? 그 차이는 영화의 주제와, 또는 제목과 어떻게 연관되어 하나의 내적 체계를 형성하는가?

이런 질문과 답변은 모두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의 응용 범주에 간단히 포함된다. 아마 3막 구조를 가진 대부분의 시나리오가 해당될 것이다.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는 극 형식을 파괴한 이야기들뿐인데, 그런 작품들 역시 원형 이론을 사용해서 분석의 힌트를 얻어낼 수 있다. 이른바 반소설 또는 '그 너머의' 소설을 표방한 작품들이 변주하거나 부숴버리려고 했던 원형을 그 작품들 가까이에 갖다댐으로써, 그 작품들이 원형으로부터 탈주를 시도한 방향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향 탐지는 사냥 또는 추적의 첫걸음이다.

▲ <엿보는 자>(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최애영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을유문화사
알랭 로브그리예의 <엿보는 자>(최애영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는 미스터리 소설의 원형 구조를 어떤 단계에서 해체하며, 왜 그 단계를 선택했을까? 리차드 브라우티건의 <워터멜론 슈가에서>(최승자 옮김, 비채 펴냄)의 시공간 배경은 원형의 작동을 어떤 식으로 왜곡하며, 그 결과 원형은 어떻게 변형되었는가? 응용의 폭은 넓다. 매우 넓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3막 구성 시나리오의 미덕을 찬양하는 이 가이드북은 3막 구성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만은 아니다. 신화는 늘 자신을 변형시키려는 시도들에게 변증법적인 기초 재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최후의 응용 형태로, 원형 이론 해설은 새로운 언어-예술 체계를 탐구하고 개발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다 용이하게 해체하기 위한 설계도를 제시할 것이다.

그러니 고전적인 극을 쓰건, 아니면 음운까지 해체시킨 텍스트를 꽃비처럼 뿌리건 간에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는 서사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권할 만하다. 그 모든 이야기들이 시작하는 지점, 이야기하려는 욕망을 낳은 오래되고도 거대한 가족이 있음을 기억해두기 위해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고 태어나지 않은 자는 죽을 수도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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