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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인의 팔꿈치에서 영혼의 떨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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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인의 팔꿈치에서 영혼의 떨림이…! [프레시안 books] 파스칼 키냐르의 <세상의 모든 아침>
"나는 욕망 때문에, 습관적으로, 의도적으로, 혹은 직업 삼아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나는 생존을 위해 글을 썼다. 내가 글을 썼던 이유는 글만이 침묵을 지키며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파스칼 키냐르 (1948 ~ )

키냐르의 책을 읽을 때면 나도 모르게 조바심을 내게 된다. 두 눈동자의 리듬이 문장의 리듬과 일치하지 않아 독서의 적막을 깨고 마는 것이다. 한발 앞서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문장을 더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 일쑤다.

키냐르의 책에는 훑어야 하는 문장이 있고 더듬어야 하는 문장이 있다. 훑다가 놓치는 문장은 가슴에 차랑차랑 파문을 남긴다. 더듬는 문장은 아주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있다. 그래서 키냐르의 책을 다 읽고 나면 머리와 가슴이 가득 차오르는 것 같다. 문장 하나하나의 밀도는 높은데 문장 사이의 여백은 넓어서 나는 내가 우주의 씨앗 한 점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어떤 빽빽함을 마주하고 나가떨어지면 기다렸다는 듯, 한동안 온몸이 두근거린다.

▲ <세상의 모든 아침>(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두 가지 종류의 빽빽한 소설이 있다.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소설. 입안의 침이 마르게 하고 양손 가득 땀이 차게 만드는 소설. 작가가 직조해놓은 흥미진진한 서사의 늪에서 한동안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소설. 이런 소설은 이야기의 힘으로 시종 긴장을 유지한다.

다른 종류의 빽빽한 소설은 문장에서 비롯된다. 창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한 문장에서. 한 문장이 다음 문장과 연결될 때 창과 창이 부딪히듯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는 소설. 형언하기 힘든 순간들이 있는 소설. 그런 순간들이 아주 많은 소설. 물론 이 순간들에는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찰나 또한 포함된다. 이런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으레 혼자 있어도 충만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키냐르의 소설은 후자의 빽빽함을 선사한다.

키냐르는 언어에 대해 민감하면서도 음악과도 긴밀하게 맞닿아 있는 작가다. 음악가 출신의 아버지와 언어학자인 어머니를 둔 키냐르는 흡사 말을 '연주하고' 음악을 '쓰는' 것처럼 글을 쓴다. 책을 읽다 어느 순간 귀를 쫑긋 세워 듣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대체 무엇을 들으려 한 것일까. 침묵이었을까, 침묵을 와장창 깨버리는 한 줄기 목소리였을까.

실제로 키냐르의 소설에는 <세상의 모든 아침>(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에 등장하는 비올라 다 감바의 거장 생트 콜롱브 말고도 음악에 몸담은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예컨대 <은밀한 생>(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에는 네미 사틀레라는 음악 선생이 나오고 <빌라 아말리아>(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에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안이 등장한다. 그의 유려한 문장은 소설에 선율을 흐르게 하고 독자로 하여금 아련한 심연에 빠져들게 만든다. "더 구체적으로는 대양의 가장 깊은 곳, 태양 빛이 더 이상 닿지 않는 곳을 심연이라 부른다."(<심연들>(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키냐르는 유년시절에 자폐증을 앓았다고 한다. 자기도 모르게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미치도록 고독했는데 주변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고독함을 토로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가 살기 위해서 글을 쓴 것이. 인간의 영혼을 어루만지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 그리고 이제 그는 쓰는 것이 사는 것이 된 작가가 되었다. 그는 잘 알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두 가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침묵하는 것, 혹은 그것을 글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 극심한 고독함으로 고통 받았던 그는 이제 자발적으로 고독한 자가 되어 글을 쓰고 있는 셈이다. "고독한 자, 무신론자, 광인, 주변인, 새들만 남았다."(<빌라 아말리아>)

<세상의 모든 아침>은 예술과 사랑에 대한 작가의 어떤 집념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 작품에는 원초적인 것을 향해 한평생 외길을 걸어온 작가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생트 콜롱브는 말한다.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

예술과 사랑의 본질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예술과 사랑은 우리가 매일 누려 당연하게 간주하는 것들이 밀집한 곳에서 살짝 벗어난 데에 있다. 둘 다 없었을 때 비로소 존재의 의의를 획득한다. 마치 물속에서 간절해지는 호흡처럼, 어두컴컴한 산속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는 한 점의 빛처럼. 둘 다 예전에 옆에 있었고 이미 알기에 더욱 그리워지는 이름이다. "고독 없이, 시간의 시련 없이, 두려움에 떨며 비틀거려본 적 없이, 어두운 무엇 안에서 방황해 본 적 없이, 동물성에 대한 기억 없이, 우울함 없이, 우울해서 외톨이가 된 느낌 없이 기쁨이란 없다."(<떠도는 그림자들>(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 <빌라 아말리아>(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무엇이 없을 때, 그래도 있었던 것들을 생각한다. 앞날이 불투명할 때 들이치던 희미한 햇살을. 내 주변을 맴돌며 아른거리던 어떤 감정을. 잊고 있다가 문득 떠올라 심장을 뛰게 했던 단어 하나를. 그 단어 하나을 가지고 글을 쓰며 충만해지던 순간을. 그 순간은 일확천금을 위한 것도 입신양명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기록하고 싶었다. 기록함으로써 그 순간을 내 마음속에서 한껏 부풀리고 싶었다. 키냐르 또한 생트 콜롱브의 입을 빌려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활을 켤 때 내가 찢는 것은 살아 있는 내 작은 심장 조각이네. 내가 하는 건 어떤 공휴일도 없이 그저 내 할 일을 하는 거네. 그렇게 내 운명을 완성하는 거지."

나는 이름을 찾아내고 그것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자리에 이름을 가져다두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내 운명이라고 믿었기에 기꺼이 할 수 있었던 일이다. "시란 오르가슴의 향유이다. 시는 찾아낸 이름이다. 언어와 한 몸을 이루면 시가 된다. 시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자면, 아마도 간단히 이렇게 말하면 될 듯싶다. 시란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정반대이다."(<혀끝에서 맴도는 이름>(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전 아카데미 공쿠르 회장이자 문학 비평가인 프랑수아 누리시에는 일전에 이런 말을 했다.

"내 권유로 키냐르의 책을 읽게 될 독자가 영문을 알지 못해 너무 난감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그런 독자에게 '그저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되는 대로 그 안에서 한가롭게 거닐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여기에 한마디를 더 보태고 싶다. 책 속을 한가롭게 거닐다 보면 그의 문장이 온몸을 자극할 거라고. 오감을 생생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예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어진 것에 대한 향수가 생생하게 되살아날 거라고. 그 순간은 당신의 눈을 뜨이게 하고 귀를 열리게 할 거라고. 아름다운 풍경이 당신의 살갗 위에 점점이 수놓아질 거라고. "아름다운 텍스트는 발음되기도 전에 들린다. 그것이 문학이다."(<은밀한 생>)

키냐르 덕분에 나는 어떤 순간을 기억하는 것에 대한 모종의 확신과 사명감을 다시금 품게 되었다. 30년 뒤의 내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게 되었다. "아직은 전혀 알지 못하는 한 여인의 팔에 우연히 팔꿈치가 스칠 때, 영혼은 왜 떨리는 것일까?"(<은밀한 생>) 영혼의 떨림을 경험하고 싶을 때면 난 주저하지 않고 키냐르의 책을 펼친다. 나는 문장을 읽으면서 음악을 듣고 소설을 접하면서 소설가를 상상한다. 은밀한 방에서 자기 자신만의 시계가 흘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묵묵히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는 소설가를. 소설은 완성되지 않아도 소설가는 완성될 수 있다. 키냐르는 자신의 삶으로, 아주 천천히 이 문장을 썼다. 아니, 지금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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